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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Oct 09. 2024

신분 (4 / 6)

   연수를 다시 본 건 수능일이 얼마 남지 않았던 9월이었어. 채란이가 자기 생일에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다며 함께 보자는 문자를 보냈어. 재수생이 그 자리에 간다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혹시 연수도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학원을 째야 하지만 너 생일이니까, 라며 답문자를 보냈지.


   약속 장소는 드래프트 맥주를 파는 곳이었어. 조금 이른 시간이었는지 술집엔 여덟 명인 우리밖에 없었어.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대학생들 술자리가 원래 그런 것인지 다들 목소리가 컸고 동작은 과장스러웠어. 그러다 이따금씩 내가 끼어들 때마다 소란함이 조금 진정되었는데 대학생활은 재미있냐? 그렇지 뭐, 그러는 넌? 재수는 할 만해? 나도 그렇지 뭐, 하는 말 따위에 큰 목소리와 과장된 동작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안 해도 아쉬울 것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연수를 몰래 훔쳐봤어. 몇 달 만에 보는 연수의 모습. 단발이 아닌 긴 머리. 앞머리를 핀으로 꽂아 드러낸 동그란 이마. 하늘거리는 하얀색 원피스. 그 아래로 보이는 가느다란 발목. 더 맑아진 것만 같은 깔깔대는 웃음소리. 연수에게 몇 마디 말을 걸어 보고 싶었는데 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더라. 학원이 끝나는 시간인 10시까지는 술자리가 이어지기를 바랐는데 의외로 일찍 끝나 버렸어. 한 녀석이 난 이제 가야겠다, 어제 새벽까지 달렸더니 피곤해, 하면서 일어섰고 다른 한 녀석이 오늘은 이만 하자, 나 내일 수업 1교시야, 하고 따르면서 술자리가 정리되었어. 술집 앞에 서서 다음 생일은 교선이던가? 아냐, 기섭이 생일이 12월이잖아, 생일 아니더라도 자주 좀 보자, 등 서로 기대하지도 않는 약속들을 던지고 지하철 역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흩어졌어.


   시내 중심가를 벗어나 횡단보도 보행신호를 기다리면서 기섭이 생일에 연수를 또 볼 수 있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은호야,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깜짝 놀라 돌아보니 연수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어. 연수는 너 아직 그 동네 사는 거지? 걸어갈까? 여기부터 걷기엔 좀 멀려나? 하며 묻는 듯 말하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앞서 걷더라. 함께 걸으며 연수와 나눴던 말들은 이전에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말들이었어. 곱씹으며 해독을 해야 했던 사귈 때의 말들이 아니었지. 직접적으로 뜻을 알리는 말들. 채란이 통해 남자 친구 얘기 들었다고 했더니 같은 학교 남자애가 자기를 혼자 좋아해서 한동안 쫓아다닌 거라고, 오늘 너 보니 반갑더라는 말에는 선약이 있었는데 나에게도 연락했다는 채란이의 말에 약속을 취소하고 나온 거라고 연수는 돌려 말하지 않았어. 그러다 헤어졌던 날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더라. 연수는 그날이 언젠가는 올 줄 알았다고 했어. 오히려 자기 생각보다 훨씬 늦게 온 거라고. 그래서 고마웠다고. 그리고 미안했다고. 혼자 좋아하던 마음을 채란이가 알리는 바람에 곤란했겠다고. 내키지도 않은데 억지로 사귀는 건 아닌가 해서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그런데도 그땐 여자 친구로 있다는 게 좋아서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는, 그만해도 된다는 말을 계속 미뤘다고. 못난 욕심을 채워서 정말 미안했다고.


   연수의 뜻밖의 말에 난 당황했어. 내가 길에 멈춰 서는 바람에 연수가 몇 걸음 더 걷다 뒤를 돌아봐야 했어. 그때 나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알게 되어서 너무 기뻤는데. 너와 함께 있는 게 행복하면서도 그 시간이 너에게 해가 되는 건 아닌가 싶어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그런데도 그땐 남자 친구로 있다는 게 좋아서 이제 그만 하자는, 헤어지자는 말을 미룬 건데.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연수에게 탓하듯 소리쳤어. 그게 아니라고. 헤어진 그날 이후로 너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없다고. 매일 너와 함께 잠이 든다고. 지금도 나의 하루는 너로 시작해서 너로 끝난다고.


   얼어붙은 시간이 길게 이어지는데 연수가 먼저 오랜만에 구두를 신어서 그런지 발이 아프다며 여기에서 택시를 타고 들어가겠다며 그래도 되냐고 물었어. 연수는 택시를 기다리면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어. 우리가 좋아했던 시기가 서로 엇갈렸구나. 택시를 기다리면서 연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난 왜 연수의 마음을 묻지 않았을까. 난 미련하게도 이제는 아닌 건가, 더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가, 그러면서도 엇갈린 건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만 머릿속으로 되뇌고 있었어. 독서실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는데. 그 이후로 단 하루도 좋아하는 마음을 놓은 적이 없는데. 그렇게 분명 서로의 마음은 겹쳤었는데. 엇갈린 게 아니었는데. 난 왜 연수의 말을 바로 잡지 않았을까. 갈게, 하는 짧은 말을 두고 택시 문을 여는 연수를 왜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을까. 택시에 오르는 연수를 붙잡았다면 연수와 난 어떻게 되었을까. 연수는, 나는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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