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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Oct 11. 2024

신분 (5 / 6)

   집, 학원, 독서실만을 쳇바퀴 돌듯 오가는 생활을 마치고 나도 대학생이 되었어.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긴 했지만 연수가 있는 신촌은 아니었지. 동기들을 따라 몇 번 미팅도 하고 소개팅도 나가 보았는데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어. 나온 애들 중에 연수를 닮은 사람은 없더라고. 1학년을 마치고 바로 군대에 갔어. 야간 보초근무를 설 때 고참이 첫사랑 이야기나 좀 해보라고 하면 연수 이야기를 몇 번 꺼냈는데 이야기를 들은 고참이 야, 다시 연락이라도 한번 해 봐, 혹시 알아? 라고 할 때마다 그건 안 되지 말입니다, 서로 신분이 다르지 말입니다, 걔는 대학생이고 전 군바리여서 넘보는 건 주제넘은 일이지 말입니다, 라고 말하곤 했어. 그러면 고참은 사랑에 신분이 어딨어, 국경도 없는 게 사랑인데, 하며 흥분했지. 고참의 그깟 신분 따위라는 말에 설득당하고 싶다는 마음을 뿌리쳐야 했어. 사랑에 국경은 없을지 몰라도 신분은 있지 말입니다, 라는 단호한 말과 함께 말이야.


   고참이 되어 후임병을 데리고 야간 보초근무를 서게 되었을 때 나도 가끔 후임병에게 첫사랑 이야기를 꺼내 보라고 했어. 고등학교 때 벌써 첫사랑을 마친 놈들도 있고 군대에 끌려오면서 끝난 놈들도 있고 위태롭게 어찌어찌 잇고는 있지만 몇 달 안으로 끊어질 것 같은 놈들도 있고. 후임병이 첫사랑과 헤어진 혹은 헤어질 나름의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내가 볼 때 원인은 하나로 수렴했어. 처음에는 균형이 잘 맞는 시소를 탄 것처럼 서로의 눈높이가 같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한쪽으로 기울어 버린 관계 때문에. 달라진 서로의 눈높이 때문에. 그렇게 서서히 벌어진, 그러니까 결국 신분의 차이 때문에.


   제대 후 내 신분에 어울리는 사람을 몇 만났어. 연애라고 할 만한 관계도 있었지. 만나면 말도 잘 통하고 재미있고 늦은 밤까지 함께 있다가 헤어지는 걸 아쉬워도 했는데 그냥 그뿐이었어. 눈앞에서 멀어지면 어느새 연수가 머릿속을 차지하더라. 연수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연수도 지금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져 집으로 가고 있을까. 나처럼 집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라도 한 캔 사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연수 집 근처 편의점 알바생을 부러워하곤 했어. 그는 잠깐이라도 한 번씩 연수의 얼굴을 볼 테니까. 연수가 자주 들르는 단골 카페 주인은 얼마나 좋을까. 난 왜 연수의 주변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했을까. 편의점 알바생이 되어 단골 카페 주인이 되어 그렇게 연수의 주변 사람으로 연수를 계속 지켜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만났던 어느 누구도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연수를 밀어내지 못했어. 분명 함께 있을 때에는 설레고 가슴도 뛰었는데 말이야. 눈앞에 있어야만 의미 있던 연애는 매번 짧게 끝났어. 그들도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저녁때 헤어지면 통 연락 한 번 없고 먼저 만나자는 말도 안 하는 남자 친구를 보면서 사랑을 확인하긴 어려웠겠지. 몇 달을 넘기지 못하고 늘 이별을 통보받았어. 속이 빈 껍데기를 보는 것 같아, 라는 말과 함께 말이야.


   건강 보조 식품을 제조해 판매하는 회사에 영업직으로 입사하고 2년쯤 지났을 때 연수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어. 상대가 연수보다 여섯 살 많은 신경외과 전문의라더군. 신촌에 있는 대학을 나와 신촌에 위치한 대학병원에서 일한다고. 그놈의 신촌. 그러면서도 그 정도는 되어야 연수를 차지할 수 있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 연수 상대로 잘 어울리겠구나. 연수에게 걸맞은 신분이구나.


   그날 입사 동기와 술을 마셨어. 이제 끝인데도 자꾸 떠오르는 연수를 떨쳐 내려 급하게 마셨나. 끝이어서 멀리 밀려나는 연수를 붙잡고 싶어서 많이 마셨나. 잔뜩 취해 버스 정류장 바닥에 기대앉아 졸면서 버스 몇 대를 그냥 보냈어. 길 한쪽 구석에 속을 한번 게워 내고 나니까 정신이 좀 들더라. 편의점에 들러 물티슈와 생수 한 병을 사 들고 나와 간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어떤 상상 하나가 떠오르는 거야. 상대가 의사라잖아. 영화나 소설에서 보면 의사라는 직업은 밤낮없이 환자에 치여 살고 중요한 기념일 근사한 저녁식사 중이더라도 긴급 호출을 받아 병원으로 달려가고. 그렇게 매일 긴박한 상황 속에서 살다 보니 예민하고 날카롭고 까칠하고. 거기에 출세욕이라도 좀 있다면 모든 시간을 병원에만 쏟으면서 가정은 내팽개치고. 시간이 지날수록 능력을 인정받고 사회적 지위도 얻겠지만 그게 남편으로서는 단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돈 벌어다 주는 걸로 유세를 떨고 밖에서 받는 대우를 연수에게도 요구하고 저만 잘난 줄 아는 오만함으로 연수를 무시하지 않을까. 처음엔 사랑으로 버틴다지만 사랑이야 금방 식어 버리니까. 몇 년이 지나면 연수도 남편을 탓하면서 한쪽으로 기울어진 관계를 원망하지 않을까. 싸우는 날이 반복되면서 둘 사이가 소원해지고 결국에 가서는 이혼을 결심하게 되지 않을까. 이혼을 한다면, 그래서 연수에게 이혼녀라는 딱지가 붙게 된다면 연수의 신분은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보잘것없는 내가 연수에게 다가가도 괜찮지 않을까. 니 까짓게 무슨, 이라고 타박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비슷해진 신분 앞에서 당당할 수 있지 않을까.


   연수의 결혼 소식이 기쁠 줄은 몰랐어. 앞으로 10년만 더 기다려 보자. 그깟 10년 금방이다. 연수의 남편이 성공하려는 야망이 큰 사람이라면, 보다 높은 신분을 움켜쥐려는 사람이라면 이혼은 생각보다 더 빨라질 수도 있다. 연수가 이혼녀가 된다면,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그때 연수 앞에 다가선다.


   그땐 정말 당장이라도 연수가 이혼할 것만 같았는데. 당연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몇 년이 지나도록 일어나지 않았지. 가끔씩 내가 아는 연수 정보를 조합해 인터넷을 뒤졌어. 그럼 어쩌다 연수의 흔적을 접하기도 했는데 그날은 연수 페이스북을 찾아낸 거야. 그전까지 연수는 일상 사진을 공개된 곳에 올리지 않았는데 아이가 태어나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건 또 다른 느낌인가 봐. 페이스북 첫 번째 사진에는 연수를 꼭 닮은 여자 아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웃고 있었고 두 번째는 아이를 가운데에 두고 연수와 의사 남편이 양 옆에 앉아 손을 잡고 있는 뒷모습 사진이었어. 한 달이 지나 올라온 세 번째 사진은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문구가 초콜릿으로 쓰인 결혼기념일 케이크였어. 그 사진을 마지막으로 페이스북이 비공개로 바뀌었고 더는 연수의 사진을 볼 수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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