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현 Oct 14. 2024

신분 (6 / 6)

   서른여섯에 나도 결혼을 했어. 나이가 차고 선이라도 보라는 압박을 받아 나간 자리에서 그녀를 만났지. 보통의 부모에게서 자라나 무난한 학교생활을 하고 졸업 후 평범한 직장을 다니던 여자였어. 좋아하는 면보다는 거슬리는 면이 없는지를 먼저 찾고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결혼했지. 결혼생활은 무난했어. 내 부족한 점이 그녀 앞에서 전혀 부끄럽지 않다는 게 편했어. 그녀도 나만큼의 부족함이 있었으니까. 그녀는 양말을 아무 곳에나 벗어 둔다거나 술자리가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 이유로 잔소리를 했지만 그걸 귀담아듣지는 않았어. 그녀도 옆집 사는 여자 스타일이 촌스럽다며 흉을 보거나 홈쇼핑을 보면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들이고는 했으니까. 결혼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더라. 그녀가 완벽하지 않으니 나도 구태여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느슨함. 그게 마음에 들었어. 서로에게 기대하는 게 없다는 것. 서로를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지루하고 평온한 날들이었지.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야.


   네 번째 결혼기념일을 한 달가량 앞둔 날 아침, 샤워를 하고 나와 머리를 말리는데 그녀가 이거 뭐야? 하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어. 그녀가 가리킨 곳을 거울을 통해 보고선 나도 흠칫 놀랐어. 평소보다 더 취하도록 마셨던 술 때문이었을까. 몇 번 반복되면서 긴장이 떨어진 탓이었을까. 어깨 근처에 다른 여자의 흔적이 묻어 있었어. 미처 지워지지 않은 빨간 립스틱 자국. 나도 몰라, 하면서 얼버무렸지. 그럼 누가 아는데? 하고 묻더라. 뭔가 변명거리라도 찾아서 둘러댔어야 했는데. 난 그저 피곤하니까 따지고 들지 마, 라는 말만 던지고는 서둘러 집을 나왔어.


   오전 내 그녀에게 온 문자는 없었어. 퇴근 무렵까지도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어. 원래 연락을 잘하지 않는 사람이긴 했어. 일이 있어 늦는다고 문자를 보내려다 관두었지. 나 역시 그런 문자를 한 번도 보낸 적이 없었으니까. 술에 취해 밤늦게 집으로 오면서 그녀가 자고 있기를 바랐어. 오늘 하루가 이대로 끝나 있기를 바랐지. 그녀가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무슨 자국인지 기억났어? 하고 물었어. 마치 저녁은 먹었어? 라고 묻는 듯한 톤으로. 그녀는 늘 그런 식으로 화를 냈어. 나는 고단한 하루를 빨리 끝내고 싶었어. 그녀에게 귀찮다는 듯이 말했지. 지난 계약 건 때문에 심기 불편한 거래처 부장님 모시고 룸에서 술 좀 먹었다. 됐냐? 그 말을 듣고도 그녀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어. 마치 자리에 굳어 버린 듯 작은 움직임조차도 없었지. 한참이 지나고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어. 당신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거슬리는 말투였어.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푸석푸석한 말투. 물기 하나 없이 건조하게 위로 떠올라 나를 낮추보는 말투. 안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더라. 손가락 끝으로 그녀를 거칠게 가리키며 네가 뭔데 참견이야, 신경 꺼, 하고 차갑게 쏘아붙였어. 그 말에 그녀 눈빛이 얼어붙었어. 난 그런 그녀를 외면하고 방으로 들어갔지.

 

   내 말이 심했다는 건 다음날 술이 깨고 나서야 깨달았어. 하지만 굳이 잘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그게 잘못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들 그런 거 아니야? 원하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들이 쌓여 넘치는 곳이 회사잖아. 난 속 좁은 그녀를 탓하면서 매일 밤 취한 채로 귀가시간을 늦췄어. 며칠 뒤 그녀가 말없이 짐을 꾸려 집을 나갔어. 그제야 일이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거야. 원인 제공을 한 사람이 나이긴 했으니 이번엔 그냥 한발 물러서 주겠다고 마음먹었어. 심한 말을 했던 것도 술김에 그런 거라고 말해 주고. 하지만 먼저 손 내밀어 화해하려던 마음은 몹시도 실망했다는 장모님과 다짜고짜 질책하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나서 싹 사라졌어.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유난을 떠나. 꼭 다른 사람에게까지 떠벌려야 하나. 아니 몇 번 양보해서 고민을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하더라도 왜 하필 가족인 건가. 그럭저럭 무난한 사위라는,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하는 아들이라는 신분에 금이 갔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 분수에 그 정도면 됐다며 순순히 받아들인 신분이었는데 그마저도 허물어졌다는 사실에 분노가 느껴지더라. 그녀를 용서할 수가 없었어. 정신 나갔어? 지금 뭐 하자는 짓이야, 라고 거칠게 문자를 보냈어.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이건 둘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이 따위 행동은 지켜야 할 선을 넘은 게 아닌가. 그녀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답을 보냈어.

   빈껍데기와 사는 건 참을 수 있었는데 어쩌지. 이제 그 껍데기마저 깨져 버렸어.

   깨져버린 빈껍데기라는 말에 별안간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이 떨리더라. 왜 문득 연수가 떠오른 걸까. 부끄러운 신분 때문에 다가갈 수 없었던 날들. 연수가 불행하기를, 그래서 신분이 떨어지기를 바랐던 날들. 그런 내가 비루하고 가여워 누구에게도 속을 보일 수 없었던 날들. 그렇게 속을 감추고 껍데기로만 살아왔던 지난 날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어. 껍데기뿐이면서 그녀에게는 왜 그리도 당당했을까. 왜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을까. 왜 그녀와는 늘 같은 신분일 거라고 자신했을까. 더는 그녀를 볼 자신이 없더라. 그녀에게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게 한다면 너덜너덜한 신분이나마 지킬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 신분은, 나의 얇고 가는 손목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어지면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한 달이 지나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어. 이혼하자. 어차피 사랑도 없는 관계였잖아.


   지금도 가끔 연수 생각을 해. 연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신분에 걸맞은 행복을 누리고 있을까. 연수는 지난 20년 동안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길을 지나다 우연히 마주친다면 연수를 알아볼 수 있을까. 혹시라도 시간이 충분히 지난 어느 날, 우연히 연수를 만난다면, 서로를 한눈에 알아본다면, 마침 우리가 헤어졌던 열여덟 그때처럼 벚꽃이라도 흐드러지게 피어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이 말을 꼭 해 주고 싶어.

   못난 욕심을 채워서 정말 미안했어.

   뜻밖의 말에 연수가 당황해할지도 모르겠지만, 연수가 불행하기를 바랐던 지난 20년을 연수에게 내보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 정도까지가 지금의 부끄러운 신분을 연수에게 드러내지 않는 일이 될 테니까. 그러면 연수에게 난 어릴 적 잠시 좋아했지만 단지 시기가 엇갈려서 헤어진 옛 남자 친구의 신분으로 남을 테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