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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Sep 25. 2024

사소한 고비 (3 / 5)

   은영과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만난 지 6년쯤인가 되었을 때였다. 회사 1년 선배인 박 대리가 여자 친구와 2박 3일 일정으로 전주에 놀러 가기로 했다면서 가 볼 만한 곳이나 현지인만 아는 맛집 따위를 물었다. 떠오르는 대로 몇 군데를 꺼내니 박 대리는 여자 친구랑 콩나물 국밥 먹긴 좀 그렇잖아, 하며 정색했다. 한정식집 아는 데 없어? 비싼 레스토랑이나, 하고 몇 번 더 물어서 전주에 있을 때는 돈 안 벌 때라서요, 하고 멋쩍게 웃었다. 며칠이나 그 말이 신경 쓰였다. 여자 친구랑 콩나물 국밥 먹긴 좀 그렇잖아. 은영과 한 번도 비싼 레스토랑에 간 적이 없었다. 곧 은영의 생일이었다. 박 대리에게 여자 친구와 가기 괜찮은 식당을 물었다. 박 대리는 지난주에 다녀왔다며 한 곳을 추천했다. 테이블이 몇 개 없어 예약이 필수라고 했다.


   식당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었다. 크게 난 창을 흰 벽이 감싸고 창을 감싼 흰 벽을 담쟁이덩굴이 두르고 있었다. 은영은 식당 입구에서부터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이런 데 비싸지 않아?

   위축된 은영을 보며 나는 호기롭게 말했다.

   생일이잖아. 우리도 이런 데 한 번쯤 와 보고 그래야지.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한 직원이 예약한 자리로 안내했다. 큰 창 너머로 한강이 반짝이는 자리였다. 테이블에는 리넨 소재의 식탁 매트가 깔려 있었다.

   뭐 먹을래? 여기 봉골레 파스타가 맛있대.

   은영은 말없이 메뉴판만 들여다봤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한참을 뒤적이던 메뉴판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파스타 하나가 55,000원이야. 너무 비싸. 이런 걸 어떻게 먹어. 그냥 나가자.

   예약까지 하고 왔는데 어떻게 그냥 나가. 내가 산다니까.

   직원이 두어 걸음 떨어진 거리에 서서 주문을 기다렸다. 은영은 잠시만요, 하며 직원을 물렀다.

   둘이 먹으면 10만 원이 넘어. 제정신이야? 그냥 나가자니까.

   제정신이냐는 말이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렸다.

   매일도 아니고 어쩌다 한 번이잖아. 쪽 팔리게 왜 그래.

   대응하는 목소리가 격했다. 은영이 메뉴판을 내려놓고 나를 쏘아봤다. 나 역시 지지 않고 은영의 눈빛에 맞섰다. 은영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갔다. 직원의 의아한 시선이 그런 은영을 쫓았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올게요, 하는 말을 급히 남기고 식당을 나왔다.


   소박하고 소탈한 은영을 사랑했다. 허영과 사치가 없는 은영이 고마웠다. 은영을 만난 게 행운이라고 늘 생각했다. 그날, 그런 은영이 다르게 보였다. 내가 반했던 모습이 거슬렸다. 구질구질해 보였다. 은영이 입고 있는 옷도 들고 있는 가방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것이었다.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은영의 오래된 옷과 낡은 가방처럼 절대로 변하지 않는 미래. 제정신이기 위해서는 콩나물 국밥 따위만 먹어야 하는 삶. 숨이 탁 막혔다. 그날, 처음으로 은영과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부산 출장은 손을 들어 자원했다. 두 달 전 납품한 소프트웨어에 발생한 오류를 처리할 목적의 출장이었다. 그간 쌓인 납품업체 불만까지 달래야 했어서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출장을 핑계로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결혼에서 한 발 떨어져 숨을 돌리고 싶었다. 3박 4일 일정으로 부산 출장이 정해졌다. 은영에게 전화해 출장 사실을 알렸다. 은영은 힘들겠네, 하며 위로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부산역에서 택시로 15분 걸려 납품업체에 도착하자 회사 마크가 가슴에 박힌 점퍼를 입은 직원이 바로 부장실로 안내했다. 부장은 마른 체격에 얇은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회사 점퍼를 입지 않은 채 회사 점퍼 입은 사람들을 관리했다. 대리 직함이 적힌 내 명함을 보자마자 부장의 말이 짧아졌다. 오류 원인이 뭐야? 처리하는데 얼마나 걸려? 회사 점퍼를 입은 사람들은 나에게 친절했다. 나를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동료로 보는 듯했다. 퇴근할 시간이면 부장실로 불려 가 그날 업무 진행상황을 보고해야 했다. 부장은 숫자를 원했다. 몇 프로가 진행됐다는 거지? 앞으로 몇 시간이면 되는 거야? 보고가 끝나면 부장은 퇴근했다. 부장이 퇴근해도 회사 점퍼 입은 사람들은 남아서 계속 일을 했다. 10시가 넘어 공유 숙박 앱으로 예약한 숙소에 체크인을 했다. 밤이 바다를 덮어 창 전망을 가렸다. 짐을 풀고 있는데 은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식대 할인을 받으려면 하객 수 100명을 보장해야 된대. 그래서 상담할 땐 그런 얘기 없지 않았냐고 따졌는데 안 통해. 출장 다녀오면 예식장에 전화 좀 해봐.

   내가? 하고 떨떠름하게 물었더니 은영은 남자가 강하게 말하는 게 낫잖아, 하며 내 말을 물리쳤다. 은영이 원하는 건 할인된 80인분 식대다. 나는 예식장에 전화해서 80인분 식대를 깎아야 한다. 남자인 내가 강하면서도 비굴한 목소리로 깎아 주세요. 구걸하듯 강하게 제발 깎아 주세요. 출장을 왔다고 현실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여자는 출장 마지막 날 밤에 나타났다. 오류 처리가 100% 완료되었다는 마지막 보고를 부장에게 전하고 숙소로 돌아와 맥주 캔 하나를 땄을 때였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 숙소에 벨이 울렸다. 현관문 외시경으로 보니 여자였고 문을 열고 보니 빨간 비키니 차림이었다. 옆집에 사는데 도어록이 고장 나 들어갈 수가 없다고. 사람은 불렀고 오는데 30분이 걸린다고. 복도에서 기다리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봐 민망하다고.

   보시다시피 이런 차림이어서요. 사람 올 때까지만 신세 좀 져도 될까요?

   비키니 차림의 갈 곳 없는 여자에게 야박할 수는 없었다. 여자를 안으로 들였다. 여자가 내 손에 들린 맥주 캔을 보며 물 한잔 마실 수 있는지 물었다. 사놓은 생수가 없었다. 없다는 걸 알면서도 냉장고를 뒤졌다. 그러다가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이거밖에 없는데 어쩌죠?

   여자가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나도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몸에 열이 올랐다.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불편하면서 야릇한 시간이 이어졌다. 에어컨이 윙, 하는 소리를 내며 정적을 깼다. 그제야 몸을 가릴 수 있는 타월이라도 가져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만요, 하며 일어서니 여자가 나를 따라서 일어섰다.

   생각해 보니 여기 있는 것도 죄송한 일이네요. 이만 갈게요. 고마웠어요.

   들어왔던 현관으로 여자가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 여자의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봤다. 여자가 나가고 현관문이 닫혔다. 여자가 남긴 맥주 캔이 보였다. 치우려고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맥주 캔 따위야 내일 치워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남긴 맥주 캔을 바라보며 두 번째 맥주 캔을 땄다. 들뜬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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