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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Sep 20. 2024

사소한 고비 (1 / 5)

   전화가 걸려온 건 월요일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1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결혼 준비가 한창이었고, 그 때문에 이곳저곳에 핸드폰 번호를 남겨 놓았던 터라 그런 곳들 중 하나이겠거니 싶었다.

   이상혁 씨 되시죠? 저는 에버나인 김종호라고 합니다. 잠시 통화 괜찮으세요?

   에버나인이 어디였더라. 김종호라는 이름도 낯설었다.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탕비실로 자리를 옮기면서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며칠 전 해운대 다녀오셨잖아요. 3박 4일 동안.

   지난주 출장지가 해운대였다. 업무차 건 전화인 건가. 거꾸로 쌓여 있는 종이컵을 하나 뽑아 들고 정수기 쪽으로 향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가 영상 하나를 가지고 있어요. 상혁 씨가 관심 가질 만한 영상이에요.

   전화를 그냥 끊을까 했는데 상대가 내 이름도 알고 해운대도 알고 3박 4일도 알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상대가 주려는 것도 보험도 아닌 청약도 아닌 영상이라 해서 끊지 못했다.

   영상이라뇨?

   상혁 씨가 해운대 숙소에서 여성분과 함께 있는 모습이 담긴 영상인데. 그날 기억나시죠? 빨간 비키니.

   빨간 비키니? 핸드폰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힘을 받은 핸드폰이 귀를 세게 눌렀다. 그날이 벼락 치듯 밀려들었다. 그날, 해운대 숙소, 빨간 비키니 차림의 여자, 긴 머리, 다급한 말투, 미안해하는 눈빛. 기억이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

   저희가 좀 알아봤어요. 상혁 씨 이제 곧 결혼하시는 것 같던데, 맞죠? 안타깝게도 이 영상이 상혁 씨의 행복한 결혼에 걸림돌이 될까 봐 걱정이 좀 돼요.

   시선이 먼저 굳었다. 심장은 뒤늦게 쿵 내려앉았다. 내려앉은 심장이 폐를 누르는 건지 숨이 내쉬어지지 않았다. 종이컵을 들고 있는 손도, 정수기 쪽으로 가려던 다리도 얼어붙었다. 머릿속만이 뜨겁게 그날의 기억으로 요동쳤다.

   저기, 누구세요? 결혼에 영상이 왜요.

   목소리가 떨렸다. 몸이 먼저 떨려서 목소리가 흔들린 것 같기도 했다.

   많이 놀라신 것 같은데 큰일은 아니에요. 영상부터 일단 보내드릴게요. 천천히 영상 보시고 다시 말씀 나누죠. 내일 이맘때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하지만 핸드폰을 귀에 댄 채 한동안 있어야 했다. 얼어붙은 팔을 내릴 수 없었다. 몇 분 후 핸드폰으로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 18초짜리 영상이었다. 영상에는 빨간 비키니 차림의 여자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캔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내가 있었다. 내 손에도 맥주 캔이 들려있었다. 빨간 비키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은영은 스몰웨딩을 하자고 했다. 아담한 카페를 빌려 내부를 하얀 꽃으로 꾸미자고 했다. 손으로 직접 쓴 청첩장을 돌리고 소중한 사람 몇 명의 번잡스럽지 않은 축하를 받고 싶다고 했다. 은영이 처음부터 스몰웨딩을 원했던 건 아니었다. 사실 돈 때문이었다.


   함께 살 집을 구하러 한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공인중개사무소에 들렀다.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돈 액수를 들은 중개업자는 우리가 들으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곳에서 지하철로 30분 더 떨어진 아파트 단지의 공인중개사무소에서도 비슷한 한숨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 금액에 아파트 전세 나오는 건 없어요. 저쪽 동네 빌라 가 보셔야겠는데.

   중개업자는 벽에 걸려 있는 지도 한 곳을 가리키며 말하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사무소를 나와 중개업자가 알려 준 동네를 찾아가면서 부족한 보증금만큼 월세를 내면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다고 은영에게 말했다. 월세로 살면 돈을 모을 수가 없다며 은영은 고개를 저었다.


   65인치 TV에 사운드가 죽여주는 큼직한 스피커를 TV 양 옆에 두고 영화를 보자 했다. 그 말에 은영은 3인용 패브릭 소파에 앉아서, 라고 거들었다. 신혼여행에는 은영이 열의를 보였다. 가장 먼 곳으로 가자고 했다.

   이곳이 낮일 때 그곳은 밤인 데 있잖아. 사람들이 깨어 있을 때 자고, 자고 있을 때 깨는 곳에 가고 싶어.

   집을 구하러 다니면서 우리가 모은 돈이 턱없이 적다는 걸 깨달은 은영은 이내 많은 것을 포기했다. 은영은 신혼여행지를 동남아로 정했다.

   두 시간의 시차면 충분해.

   난 그런 은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 지원하는 저리 대출을 받으면 65인치 TV도 밤과 낮이 바뀌는 신혼여행지도 모두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은영은 우리의 시작을 빚과 함께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스몰웨딩 이야기가 나온 것도 그때부터였다.


   은영은 진수 소개로 만났다. 전주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IT 쪽으로 진로를 정한 다음 서울로 올라와 강남에 있는 취업 학원에 다닐 때였다. 한 달 학원비로 사회 초년생 한 달 월급 정도를 내야 하는 곳이었다.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는 건 그 학원비까지였다. 먹고 자는 건 주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통해 해결해야 했다. 적은 돈이었다. 갈 수 있는 곳은 고시원뿐이었다. 침대와 간이 책상만 놓인 고시원의 작은 방에는 창이 없었다. 몇몇 창이 있는 방도 있었다. 창을 열고 손을 뻗으면 건너편 건물 벽에 닿았다. 있어도 없는 듯한 창이었다. 그런 창이라도 달려 있으면 이틀 치 아르바이트 비용만큼을 더 내야 했다.


   학원이 끝나면 김밥이나 햄버거, 혹은 컵라면 등을 사들고 와 고시원의 작은 방에서 먹었다. 작은 방에서는 조금만 먹어도 금세 배가 불렀다. 배가 부르면 먹던 걸 책상 한쪽으로 치우고 핸드폰의 작은 화면으로 미드나 영화를 봤다. 벽 너머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이어폰을 꽂았다. 고시원 첫 달에는 성공이나 부를 언급하는 자기 계발서 책을 펼치기도 했다. 읽다 보면 자꾸 우울해졌다. 책에서 말하는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너무나도 나인 것 같았다. 더 읽기가 싫어져 안 보이는 곳에 치웠다. 잘 시간이 되면 맥주 한 캔을 아껴 마셨다. 누군가를 만나지도 않았다. 만나는 게 귀찮기도 했지만 딱히 만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매일매일이 찍어낸 듯 똑같았다. 창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우울이 작은 방에 고였다. 아침이 되면 전날 먹다 남은 김밥 몇 개를 입에 욱여넣고 고시원을 나섰다. 우울에 젖은 채였다.


   같은 과 친구였던 진수는 졸업하자마자 서울의 작은 인테리어 회사에 취직했다. 이따금씩 전화해 내 안부를 물었는데, 진수는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그제 같은 내 하루를 지루해하지 않고 들어 주었다. 몇 달이 지나면서는 거의 진수만 말을 했다. 어, 응, 그래, 만 반복하다가 전화를 끊기도 했다. 할 말이 없었다. 있어도 할 수 없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 해도 이미 지난주에 한 것 같고 지지난주에도 한 것 같아서.

   10분 넘게 과장 욕을 하며 흥분하던 진수가 뜬금없이 물었다.

   너 여자 한번 만나 볼래?

   창이 있는 방으로 옮길까 하던 차였다. 햇빛 한 줌 없는 창이지만 그런 창이라도 있어야 고인 우울이 밖으로 빠져나갈 것 같았다. 방을 옮기는 대신 여자를 만나 보기로 했다. 어제와 다를 내일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만남이 내일로 이어지지 않아 다시 어제로 돌아가야 한다면 그때 방을 옮겨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긴 머리를 목 뒤로 묶은 은영은 청바지에 남색 후드티 차림이었다. 흰색 단화를 신었고 달팽이 그림이 그려진 에코백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고시원을 나서면서 양복을 입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는데 그러지 않아 다행이었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서 은영은 차가운 게 싫어서요, 라고 묻지 않은 대답을 했다. 태어난 곳이 서울이고 서울을 떠나 살아 본 적이 없고 아래로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다고 했다. 작년에 동생이 대학생이 되었는데, 자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했다고 했다. 대학 등록금을 자식 둘이나 대줄 만큼 넉넉한 집이 아니기도 했지만 어차피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어서 대학에 가지 않은 것이 아쉽지는 않다고 했다. 은영은 중간중간 말을 멈추고 내 표정을 살폈다. 계속 말을 이어도 될지를 헤아리는 듯했다. 넉넉하지 않은 집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부모님 생활비나 동생 학비를 감당해야 하는 건 아니고 냉장고를 바꿔야 한다거나 하는 큰돈 드는 일이 생길 때 조금 많이 보태는 정도라고 했다. 역시나 내가 먼저 묻지 않은 대답이었다. 은영은 대답으로 물었다. 자신을 먼저 말하고 나를 기다렸다.

   지금 고시원에 있어요. 창이 없는 방인데,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불을 켜요. 내가 아침을 깨우는 거예요. 아침이 나를 깨우는 게 아니라.

   첫눈에 반했다거나 두근거리는 끌림을 느낀 건 아니었다.

   창이 있는 방으로 바꿀 생각이었어요. 창으로 밤낮을 느끼고 싶었거든요.

 서울 여자인데 상상하던 서울 여자와 달랐다. 은영의 서울은 나의 전주에서 멀지 않았다. 시내버스를 한 번만 타면 그녀가 사는 곳에 닿을 것만 같은 친밀감이 느껴졌다.

 근데 창이 아니었어요. 그건 그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요.

   은영이 손가락으로 커피잔을 톡톡 두드렸다. 손톱 끝이 닳아 있어 소리가 몽툭했다. 남에게 상처 입힐 수 없는 연한 손이었다. 손을 잡고 싶다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혹여 은영이 내 손을 잡는다면 놓는 건 먼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제와는 다를 내일을 절대로 먼저 놓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은영과 헤어지고 고시원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은영이 보낸 문자를 받았다.

   우리 사귈래요?

   취미가 뭔지를 묻는 것처럼 은영이 물었다. 답변을 보내려는데 문자 하나가 더 들어왔다.

   상혁 씨 전라도 억양이 듣기 좋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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