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현 Sep 23. 2024

사소한 고비 (2 / 5)

   학원은 9시에 시작해 6시에 끝났다. 은영이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과 같았다. 퇴원을 하고 퇴근을 하는 저녁이면 은영을 만났다. 처음 몇 번은 없는 돈을 모아서, 몇 번은 진수한테 빌리면서 데이트 비용을 댔다. 언젠가부터는 은영이 밥값을 내기 시작했다. 내가 미안해하니 은영은 취업하거든 매일 오빠가 내, 하며 별일 아니라는 손짓을 했다.


   취업은 했지만 은영의 바람은 반만 이루어졌다. 밥값은 다시 내 몫으로 오긴 했지만 매일이 아니었다. 회사 업무는 신입 사원이 감당하기에 벅찼다. 일이 많았고 일 하나를 처리하는 시간도 오래 걸렸다. 야근이 데이트 대신 매일 이어졌다. 입사한 지 8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은영이 처음으로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 전날 내린 비로 벚꽃이 져버린 게 문제였다. 벚꽃이 한창이던 일주일 동안 세 번의 약속이 틀어졌다. 반차를 내고 여의도에 가자는 약속은 갑작스러운 서비스 장애로 깨졌다. 조명이 밝은 밤 벚꽃을 보자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팀장이 10시가 넘도록 퇴근을 하지 않아서였다. 어쩔 수 없이 다음날로 약속을 미뤘는데, 밤부터 내린 비가 하루 종일 벚꽃 잎을 떨궜다.


   헤어지자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주 토요일, 렌트한 차를 끌고 은영의 집 앞으로 갔다. 은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 앞이라고 문자를 보내니 2층 빌라의 작은 창으로 은영이 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렌트한 차에 기대 서서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10분 후 은영이 집 밖으로 나왔다.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강원도 쪽으로 가면 벚꽃 아직 남아 있을 거야.

   차에 타면서도 은영은 말이 없었다. 서울톨게이트를 벗어날 때 은영은 렌트 비싸지 않아? 하고 처음으로 물었다. 여주를 지날 즈음엔 평소의 은영으로 돌아왔다.


   정말 헤어질 각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은영은 그 뒤로도 크게 싸울 때마다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만났다. 헤어지자는 말이 여러 번 쌓이다 보니 말끝이 무뎌졌다. 헤어지자는 말을 들어도 헤어질 걱정을 하지 않았다. 만난 지 4년이 지나면서 은영은 아무리 싸우더라도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내일 이맘때가 정확히 언제를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식사하러 가자는 동료들을 물리고 회사 앞 벤치로 나왔다. 동료들과 밥을 먹는데 전화가 걸려 오면 난처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벤치에 앉아 편의점에서 사 온 김밥을 먹으며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를 기다리면서도 전화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점심시간이 끝나 갈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김종호입니다.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영상은 보셨나요?

   차분한 말투였다. 어제도 그랬던 것 같았다. 말투 때문인지 어제보다는 떨림이 덜했다.

   저기, 영상은 어떻게 찍은 거예요? 제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상혁 씨가 숙소 잡기 며칠 전에 카메라를 설치했어요. 영상은 그렇고. 번호는, 첫날 와이파이 한 번 끊어졌었잖아요. 그래서 상혁 씨가 공유기를 껐다 켰고요. 와이파이 새로 연결되면서 화면 하나 떴던 것도 기억하시죠?. 그 화면을 통해서 상혁 씨 핸드폰에 프로그램을 하나 심었어요. 이 정도면 되나요? 기술적인 부분이 궁금하시면 더 말씀드리고요.

 와이파이가 연결되는데 2~3분가량 소요되니 핸드폰을 끄지 말라고 안내하는 조잡한 화면이었다. 확인 버튼을 누르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널찍한 샤워부스가 마음에 들어 노래도 흥얼거렸다. IT 직종에서 일한다는 녀석이 해킹을 당하면서도 노래나 부르고 있었다니 한심한 일이었다.


   영상을 처음 보고는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놀랐다. 시간이 지나 진정이 되면서 정신이 들었다. 처음 본 여자였고 그 여자와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잘못한 게 없으니 굽힐 일이 아니었다.

   이봐요. 영상 속 여자는 저와 아무 상관이 없는 여자예요. 옆집에 사는 여자라 했고 도어록이 고장 나 문을 열 수 없다 해서 잠시 머물다 간 것뿐이에요.

   영상이 불륜의 증거가 아니라고 하면 그가 당황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내 기대와 달랐다.

   아, 그렇죠. 저희도 알아요. 그 여성분 저희 직원이거든요.


   은영은 스몰웨딩을 알아봤다. 하지만 스몰웨딩은 돈을 아끼는 결혼 방법이 아니었다. 인터넷 검색과 전화 몇 통화만으로 알 수 있었다. 스몰웨딩은 미리 세팅된 식장에 몸만 들어가면 되는 일반 예식장과는 달랐다. 모든 걸 하나하나 준비해야 했고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돈이었다. 스몰웨딩이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로망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로망 따위는 대개 비쌌다. 스몰웨딩을 포기한 은영은 먼저 결혼한 친구들이 식을 올렸던 곳들을 떠올렸다. 그중 몇 군데를 추려 방문 예약을 잡았다.


   토요일 오후, 예식장은 차려입은 사람들로 붐볐다. 누군가의 결혼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주례사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식장을 채웠다. 예식장 직원이 소파가 놓인 사무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직원은 카탈로그를 우리에게 잘 보이는 방향으로 펼쳤다. 주차장 사진을 가리키면서 넉넉한 주차 공간을 어필하고, 지도를 가리키면서 걸어서 5분 거리인 지하철 역을 강조했다. 식장이 하나여서 다른 하객들과 겹치지 않고 식이 진행되는 동안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했다. 능숙함이 밴 행동과 말투였다.

 여기에서 결혼하시면 모시는 분들에게 폐 끼칠 일이 없는 거예요.

   결혼 당사자도 물론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하객들의 쾌적함과 편안함이 최우선인 게 바로 결혼식이라고 힘을 주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듣고 나니 공감이 됐다. 나 역시도 앞선 친구들의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의 행복한 표정보다는 차려진 음식에 관심이 더 갔으니까. 우리 표정을 살피던 직원이 결혼식 비용이 적힌 계약서를 내밀었다. 세부 항목별로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 계약서에 적힌 숫자가 미리 산정해 놓았던 예산보다 높았다. 은영이 머뭇거렸다. 여기로 하자, 다른 건 다 마음에 들잖아, 라는 의미로 은영의 손을 잡았다. 은영은 손을 빼며 계약서에 적힌 금액에 시선을 고정했다. 사무실에 침묵이 흘렀다. 직원이 손가락 끝을 이마에 댔다. 작은 한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돈 때문인 침묵이 불편했다. 은영은 여전히 계약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4시 30분 타임도 있긴 한데, 그 시간대로 하시면 식대를 할인해 드릴 수 있어요. 그리고 사진 촬영 비용도 빼 드리고요.

   직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친절했다. 식대 할인이 들어가고 사진 촬영 비용이 빠지니 예산으로 잡았던 금액에 어느 정도 맞춰졌다. 은영이 저희 의논 좀 하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하고는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직원이 우리를 따라 일어섰다. 직원에게 눈인사를 하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예식장에서 5분 거리인 지하철 역 앞에서 은영이 멈춰 섰다. 은영이 4시 30분 타임으로 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그거 남에게 민폐잖아.

   그게 왜 민폐야?

   그냥 원래 계획대로 12시 타임에 해. 그래야 청첩장 돌릴 때 안 미안하지.

   미안할 것 같은 사람한테는 청첩장 주지 마.

   은영이 거칠게 대꾸하고는 지하철 역 아래로 내려갔다. 몇 걸음을 두고 은영을 뒤따랐다. 좁히거나 벌리지 않으면서 은영을 앞에 두고 걸었다.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며 점심과 저녁 사이에 낀 애매한 시간을 생각했다. 애매한 시간에 결혼을 하고 밤낮이 두 시간만 바뀌는 애매한 곳으로 신혼여행을 가는 이유가 고작 돈 때문이라는 게 답답했다. 문득 은영과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