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벽에 걸려있는 시계 바늘이 정확히 6시를 가리키자 소진은 코트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 안 스무 명 남짓 직원들은 여전히 각자 자리에서 일에 열심이었다. 소진이 책상 뒤로 난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남았는데 두터운 구름 탓인지 거리가 어두웠다. 하루 종일 흩날리던 비는 잠시 멈춰 있었다.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비 안 올 때 얼른얼른 들어가세요.”
소진의 목소리에 윤 팀장이 모니터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옆에 벗어 두었던 안경을 뒤집어 눈앞에 가져다 대고 소진을 보며 말했다.
“오늘도 데이트예요? 부럽다 소진 씨.”
윤 팀장은 시력이 꽤 안 좋으면서도 안경을 끼고 모니터를 보는 게 어지럽다며 일할 때에는 안경을 벗었고 대신 모니터 화면에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때문에 자리에 앉아 있을 때 가뜩이나 왜소한 윤 팀장은 큼직한 모니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소진보다 여섯 살 많은 윤 팀장은 자존감이 부족했다. 원래부터 남들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는 성격이었는데 2년 전 팀장이 되면서 그런 성향이 부쩍 심해졌다. 팀 운영에 관한 공지사항을 전달할 때마다 말을 꺼내기도 전부터 팀원들을 의식했다. 동의를 구할 것도 없는 사소한 사항에도 윤 팀장은 늘 팀원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바랐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는 거 맞죠? 정말 불만 없는 거죠?
윤 팀장이 먼저 팀원들에게 사적인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적으로 이야기를 하더라도 팀원들의 대답은 필터를 몇 번이나 거쳐 정제된 의례적인 말뿐일 거라고 소진이 윤 팀장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을 들은 윤 팀장은 그나마 얼마 되지도 않던 대화마저 끊었다. 다만 소진에게만은 예외였다. 윤 팀장은 업무와 상관없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이따금씩 소진에게 하곤 했는데, 사적으로 묻는 건 저도 사적으로 대답해 드릴게요, 라는 소진의 말을 그대로 믿는 듯했다.
“팀장님도 회사에만 충성하지 말고 연애도 좀 하고 그러세요. 저도 부러워하게.”
소진은 가방을 멘 채 모니터 너머 윤 팀장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면서도 윤 팀장이 연애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설사 하더라도 자신이 윤 팀장을 부러워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소진의 업무 평가는 좋았다. 소진은 평가를 잘 받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일단 일을 잘하는 것이 기본이겠지만 남들보다 높은 평가 등급을 위해서는 단순히 일을 잘하는 것 말고도 중요한 무언가를 더 보태야 한다는 걸 알았다. 소진은 다른 동료들보다 한 발 정도만 높은 곳에 있었다. 남보다 높은 곳에 있을 자신이 없다면 그들을 자기 발아래로 끌어내리면 될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윤 팀장이 필요했다. 윤 팀장을 내편으로 만드는 건, 적어도 적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먼저 눈을 마주쳐 주고 지금처럼 한마디를 더 건네고 한번 더 웃음을 지어주는 것. 그렇게 관심을 주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윤 팀장은 자신을 바라보는 팀원들의 시선을 항상 궁금해했는데 그 답 대부분을 먼저 눈을 마주쳐주고 말을 걸고 웃음으로 대하는 소진에게서 얻었다. 소진은 일주일에 한 번 화분에 물을 주는 것처럼 팀원들 이야기를 한 두 개 던져주는 걸로 윤 팀장의 궁금증을 채워주었다.
“들었어요? 강 대리가 팀장님 얘기를 좀 하는 것 같던데. 위에서 던지는 불필요한 일들을 팀장님이 쳐내지 못해서 힘들다고. 너무 윗사람들 눈치 보는 거 아니냐고.”
“강 대리가 그런 말을 했어요?”
“아, 모르셨구나. 괜히 이야기했다. 확실한 건 아니에요. 저도 직접 들은 건 아니어서. 팀원들끼리는 사실도 아닌 걸로 이런저런 말들 많이 하잖아요. 마음 쓰지 마세요.”
올봄, 회사의 기대가 쏠려 있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강 대리를 견제하는 건 탕비실에서 믹스커피를 내리는 윤 팀장에게 강 대리의 흠 하나를 슬쩍 건네는 걸로 충분했다. 한 줌 눈만 뭉쳐 건네주면 이후로는 윤 팀장이 스스로 눈덩이를 굴릴 것이다. 소심한 윤 팀장에겐 강 대리를 불러 사실 여부를 파악해 볼 용기 따위는 없다. 윤 팀장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며칠간 쉽게 잠들기 힘들 것이며 상반기 평가 시즌 한 두 자리밖에 없는 최상위 평가자 후보를 고를 때 조직에 불만의 뜻을 비친 강 대리를 제외함으로써 자신의 평온한 잠을 방해한 것에 대한 마음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
회사에서 느린 걸음으로 20분 거리에 있는 카페는 한적했다. 창 쪽에 위치한 테이블에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현우가 카페로 들어오는 소진을 보고 손을 들었다. 소진이 고개를 한번 까딱하고 현우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재하는 만나 본 거야?”
“아까 낮에. 재하는 이미 각오하고 있는 것 같더라.”
현우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 놓인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올리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재하를 부르는 현우 목소리를 시작으로 둘의 대화가 이어졌다. 10분 정도 이어지던 대화는 요즘 매력이 넘치는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현우의 마지막 말로 끝이 났다.
“기분이 묘하더라. 자기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지도 모르고 넋이 나가서는. 하필이면 아내가 바람피우는 상대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그걸 듣고 있자니 죄책감도 조금 들고.”
소진은 현우의 목소리 톤이 평소보다 반음 정도 높다는 걸 느끼며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셨다. 이미 얼음이 많이 녹아 쓴맛이 옅어져 있었다. 밍밍해진 맛이 지금의 재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소진의 표정을 살피던 현우가 말을 이었다.
“학교 다닐 때 재하는 마치 당겨진 활시위 같았어. 금방이라도 화살이 날아갈 것처럼 팽팽하게 말이야. 그 긴장감 때문에 주변 친구들이 재하한테로 몰려들었어. 재하랑 있으면 당장이라도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거든. 묘한 떨림이랄까. 그런 게 항상 느껴졌는데 오늘 보니 많이 느슨해졌더라. 하긴 시간이 많이 지났지.”
당겨진 활시위. 소진도 재하의 그런 면이 좋았다. 소진이 다니던 회사에 신입으로 들어와 인사과 직원과 함께 인사를 하던 날, 재하는 분홍색 박스티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사내 출퇴근 복장에 별다른 규정이 없긴 했지만, 첫 출근날 대부분의 신입사원들은 구김 없이 잘 다려진 정장을 입었다. 사무실내 다른 직원들과 별다를 것 없는 옷차림이어서 위화감이 없는 신입사원. 그래서 오히려 더 튀는 신입사원. 인사과 직원은 재하를 소개하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친구예요. 이력서 지원동기란에 회사 건물이 멋있어서라고 쓴 친구.”
소진은 재하에게서 왠지 모를 두근거림을 느꼈다. 지루하기만 한 팀 분위기에 화살이라도 마구 쏘아 날릴 것 같은 묘한 기대감. 재하가 본격적으로 화살을 쏘기 시작한 건 3개월 수습기간이 끝난 후부터였다. 수습딱지를 뗀 기념이라며 직접 담갔다는 인삼주를 박카스병에 담아 직원들 책상 위에 놓는다거나, 초코파이나 버터링 쿠키, 카스타드 등의 간식을 사무실 책상 위에 진열해 놓고 ‘100원 무인 샵’이라 쓴 푯말을 세워둔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푯말 옆에는 100원짜리가 넉넉히 담긴 거스름 통과 열 번 찍으면 한 번 무료로 제공한다는 모두 100칸짜리 쿠폰도 볼펜 뚜껑으로 만든 도장과 함께 놓여 있었다. 아침을 거르고 출근하던 소진이 그 작은 매점의 단골이 되었다. 재하가 입사한 지 6개월이 되던 가을, 프로젝트 완료 일정을 맞추기 위해 매일같이 야근을 하던 어느 늦은 밤, 소진은 40개의 도장이 찍힌 무인 샵 쿠폰을 재하에게 건네며 말했다.
“나랑 사귈래요?”
소진은 연애 시절 재하와 함께 했던 번뜩이는 추억들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오는 걸 급히 틀어막았다.
“이혼도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지?”
“그렇다니까. 너도 방금 녹음한 거 들었잖아.”
현우가 핸드폰을 소진 앞으로 내밀며 다시 한번 들어볼래? 하는 눈빛을 보냈고 소진은 핸드폰을 건네받아 테이블 끝, 손이 닿는 가장 먼 곳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재하의 목소리가 담긴 핸드폰을 한동안 바라보던 소진이 혼잣말을 뱉었다.
“재하는 나를 벽으로 느끼고 있었구나.”
팔짱을 낀 채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 소진을 바라보던 현우가 자세를 세워 의자를 앞으로 당겼다.
“이제 슬슬 우리 미래도 그려봐야 하지 않겠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아직.”
소진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한걸음 물러났다. 지금까지 참고 기다려준 현우에게는 미안했지만 시간이 더 필요했다. 예정된 결말이었고 소진도 그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 결말이 지금 이곳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소진이 현우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얹었다.
“미안해. 조금만 더 기다려줘.”
술이나 한잔 하자는 현우의 제안을 다음으로 미루고 소진은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창가 빈자리에 앉아 20분가량 창밖을 바라보다가 하차벨을 누르고 3분 정도 버스가 지나온 길을 거슬러 올라 왼쪽으로 난 길로 접어들어 5분을 더 걸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잠시 멈추고 고개를 들어 8층, 자신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거실 쪽 불이 켜져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당신 너무 지루해, 라고 말했던 날을 떠올렸다. 진심이었다. 그때 재하의 활시위는 단지 느슨해져 있던 게 아니었다. 다시 당길 수 없게 끊어져 있었다. 8층에 닿았다는 벨소리가 이어지는 소진의 생각을 끊었다. 소진은 현관문 앞에 서서 크게 심호흡을 하고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소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재하가 거실에 서 있었다. 소진을 보는 재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소진은 그 미소가 낯설다는 듯 바라봤다. 재하가 희미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우 만나고 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