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이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자 재하가 들어오라는 듯 한발 뒤로 물러섰다. 재하가 내준 공간을 지나 부엌으로 간 소진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식탁 위에 던져 놓고 냉장고 문을 열어 캔맥주를 꺼냈다. 행동 하나하나를 재하가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 맥주 한 모금을 마셨다.
“녹음된 거 들었어. 연기 잘하더라.”
소진의 말에 재하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소진이 말을 이었다.
“이제 거의 된 것 같은데. 슬슬 현우에게 헤어지자고 할까 봐.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할까. 그냥 지겨워졌다고 할까.”
4개월 전, 별안간 현우를 짓밟고 싶다던 재하에게 소진은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지금처럼 건조한 어투로 그래,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라고만 했었다.
“여전히 이유는 안 궁금해?”
“글쎄, 너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대신 다른 궁금증이 생겼다는 듯 소진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냥 헤어지는 걸로는 약하지 않아? 사고라도 하나 끼워 넣을까? 혜원이 때처럼 말이야.”
재하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걸로 충분해. 현우가 사랑엔 늘 진심이라 헤어지고 나면 몇 달 동안은 폐인으로 지낼 거야.”
그런가. 그냥 헤어지기만 하면 되는 건가. 재하 뒤로 거실 벽에 걸려 있는 결혼사진이 보였다. 사진 속에서 손을 맞잡은 재하와 소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환한 웃음이 먼 일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소진은 재하의 마음이 이렇게 약해진 건 모두 혜원이 탓이라고 생각했다.
혜원은 소진의 대학교 같은 학번 동기였다. 말수 자체가 적었고 어쩌다 몇 마디 하더라도 잘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던 혜원은 다른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소진은 혜원과는 다른 이유로 그들 밖에서 겉돌았다. 동기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자유를 처음 맛본 그 나이대의 평범한 학생들이 그렇듯 기껏 해야 다른 과 남학생들과의 미팅, 입고 있는 옷 브랜드, 아이돌 가수 품평으로 웃고 떠들었다. 그러다 점심을 정문 앞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혼자 운영하는 분식집 3,000원짜리 떡볶이로 하느냐, 한 블록 지나 잘생긴 아르바이트생이 서빙을 하는 12,000원짜리 파스타로 하느냐의 선택의 기로에 서면 제법 진지해지곤 했는데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소진은 그들의 유치함에 하품이 났다. 봄학기 내내 혜원과 소진은 각자의 이유로 다른 동기들과 몇 발자국 떨어져 지냈다.
가을학기가 시작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작은 소란이 생겼다. 교양과목이던 ‘프랑스 영화의 이해’의 강의를 맡은 삼십 대 초반 키가 큰 남자 강사가 출석을 부르고 난 후 13분짜리 프랑스 흑백 단편영화를 빔 프로젝터를 통해 틀었다. 지루한 13분이 지나고 강사가 앞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에게 영화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혜원이었다. 혜원이 머뭇거리다 몇 마디를 말했는데 혜원의 작은 목소리를 끊으며 강사가 소리쳤다.
“뭐라는지 하나도 안 들리네.”
담당 교수에게 뭐라 한소리를 들었는지 수업에 들어올 때부터 표정이 굳어있던 강사가 혜원을 몰아쳤다.
“좀 더 크게 말해봐요. 내가 뭐 그쪽과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말이야. 왜 속삭여.”
강의실은 순식간에 싸늘해졌고 혜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첫 수업 때부터 10분이나 늦게 나타나서는 반말을 섞어 자신을 소개하던 강사가 소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참을 늘어놓았던 프랑스 유학시절 이야기도 이미 지나버린 과거 전성기 때 기억에 파묻혀 현재를 부정하는 불만 가득 찬 패배자의 푸념으로만 들렸다. 강사 왼쪽 귀에서 금빛으로 반짝이는 귀걸이와 옆을 지날 때마다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도 수업 내내 거슬렸다.
“소곤거리면 귀엽다고 착각하나 본데, 그런 건 애인 앞에서나 하시고.”
강사는 어느새 혜원 앞까지 다가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는 혜원을 향해 까닭 모를 증오를 내뱉었다. 순간 날카롭고 예리한 목소리가 강의실을 파고들었다.
“씨발. 프랑스 영화 존나 지루하네.”
혜원을 아래로 꼬나보던 강사가 고개를 들어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붉어진 얼굴로 고개 숙이고 있던 혜원도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봤다. 강의실안 모든 눈이 일시에 소진에게로 향했다. 소진이 교재와 펜을 가방에 넣고 일어나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동기들을 뒤로한 채 입을 다물 줄 모르고 자리에 얼어붙은 프랑스 유학파 출신 강사를 지나 굳이 뒷문이 아닌 앞문을 통해 느릿한 걸음으로 강의실을 나갈 때까지 강의실은 얼어붙은 듯 고요했다.
이틀이 지나고 3층 빈 강의실에서 난데없이 떨어진, 나무로 된 사각 분필통이 인문대 앞을 지나던 프랑스 유학파 출신 강사의 머리를 때렸다. 강사는 곧바로 응급실로 실려가 왼쪽 이마 위 상처 부위 머리카락이 모두 잘린 채 12 바늘을 꿰매야 했다. 소진은 그날 이후 더 이상 출석 일수를 채우지 않아 ‘프랑스 영화의 이해’ 과목에서 F학점을 받았다.
혜원은 이후의 모든 수업에서 소진 옆자리에 앉았다. 혜원은 수업에 열심이었고 교수의 말을 노트에 빼곡하게 적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되면 꼼꼼하게 필기한 전공 노트를 소진에게 건넸다. 이따금씩 수업을 빼먹는 소진을 위해 대리출석을 해주고 리포트를 대신 써 주기도 했다. 학업에 관련한 혜원의 도움은 졸업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졸업 후에도 혜원은 꾸준히 연락을 하며 소진을 따랐다. 소진은 그런 혜원이 귀찮았다. 꼼꼼하게 필기 된 전공 노트와 대신 써 줄 리포트가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연락하거나 만나는 것이 귀찮다는 티를 몇 번이나 냈는데 그런 쪽으로 혜원은 둔했다.
오랜만에 재하까지 함께한 술자리에서 혜원이 취했다.
“그때 정말 굉장했어요. 강사 옆을 스치듯 지나쳐서 강의실 앞문을 쾅 닫고 나가는데 소진이가 나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 강의실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니까요.”
혜원은 몇 년 간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수줍고 조용하던 성격을 어느 정도 걷어낸 듯했다. 마침 오르는 술기운의 도움을 받았는지 혜원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컸다.
“그 이후로 우리 소진이 제가 거의 업어서 졸업시켰어요.”
“소진이도 공부는 잘하지 않았어요? 졸업 평점 꽤 높았던 걸로 알고 있는데.”
소주가 담긴 잔을 비우고 입가심할 안주를 고르며 재하가 물었다.
“그 평점 제가 다 올려준 거거든요. 소진이 평점에서 최소한 1점은 아마 제 덕일걸요?”
혜원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저 아니었으면 재하 씨 그 회사에서 우리 소진이 못 만났을 거예요. 그 회사 졸업 평점 엄격히 본다면서요.”
혜원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소진이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진은 화장실 문을 안에서 잠그고 세면대 앞에 서서 수도꼭지를 돌렸다. 쏟아져 나온 물이 세면대를 맴돌다 배수구를 통해 버려졌다. 물이 빠지는 세면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소진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로 돌아온 소진이 손등으로 혜원의 어깨를 살짝 치며 말했다.
“혜원아 우리 셋이서 스키장 한번 갈까?”
상급자 코스를 한번 달려보면 실력이 부쩍 늘 거라는 재하의 말에 혜원이 살짝 주저했지만 소진의 스키 실력도 자신이 키운 거니 걱정 말라는 재하를 혜원이 마지못해 따랐다. 상급자 코스에서 혜원은 속도를 이겨내지 못했다.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잔뜩 굳어진 몸으로 급한 경사로를 달렸다. 그런 혜원을 붙잡겠다며 소진이 달려들었고 그대로 소진과 부딪혀 넘어진 혜원은 한참 아래까지 몇 바퀴나 구르고 나서야 멈췄다. 혜원의 부상은 심했다. 두 달간의 입원 치료 중에 소진이 두 번 병문안을 갔다. 퇴원 후에도 왼쪽 다리에 후유증이 남을 거라는 이야기를 병문안을 다녀온 소진이 재하에게 전했다. 그 이후부터였던 걸로 소진은 기억했다. 재하가 지루하고 재미없어지게 된 때가.
재하가 몇 달 만에 내민 계획이 소진은 반가웠다. 재하와 함께 현우 일을 꾸미면서 소진은 둘을 두껍게 에워싸던 예전의 차가운 공기를 다시 느꼈다. 차고 건조하게 날이 파랗게 선 공기를 지금 재하도 느끼고 있겠지. 차가울수록 더 또렷하게 서로의 온기를 느끼던 그때를 기억하겠지. 소진은 어쩌면 지난날의 재하를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다. 과거의 팽팽하던 재하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는 생각에 소진의 한쪽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당신 웃는 모습 오랜만이네.”
재하의 말에 소진이 서둘러 표정을 가다듬었다. 고개를 돌려 재하의 시선을 피하고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더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