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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Oct 23. 2024

구원 (4 / 5)

   입사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함께 일하게 된 팀원들에게 처음 인사를 하던 날, 재하는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이 싫지 않았다. 몇 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발 다가서며 재하를 환영했고 몇 명은 재하가 인사를 마칠 때까지 의자 방향을 재하에게 향한 채 관심을 유지했다. 단 한 사람, 머리를 뒤로 묶어 하얀 피부가 도드라져 보이던 여직원만이 예외였다. 그녀는 재하를 힐끗 한 번 쳐다보고는 꼿꼿한 자세로 앞에 놓인 모니터만 응시했다. 모두가 재하에게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한 두 마디를 건넸지만 그녀는 말을 아꼈다. 그날 밤, 재하는 자신에게 시큰둥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어떤지, 하얀 얼굴만큼이나 투명하고 맑은지를 상상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녀는 재하에게 관심을 주지 않음으로써 재하의 관심을 빼앗았다.

   “두 개 사면 도장 두 번 찍는 거 맞죠?”

   그것이 입사한 지 3개월 만에 소진이 재하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다. 그런 세세한 규정까지는 미처 마련하지 못했지만 재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두 개 사면 도장 두 번.”

   재하는 쿠폰에 도장 두 개를 찍는 소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소진은 무인 샵을 이용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먼저 쿠폰에 도장 10개를 찍었고 보상으로 버터링 쿠키를 골랐다. 소진의 이름이 적힌 무인 샵 쿠폰의 빈칸은 빠르게 채워졌다. 도장 20개를 찍었을 때 소진은 처음으로 재하를 보며 웃었고 30개를 채우던 날에 둘은 회사 근처 이자까야 집에서 소주 두 병을 먹고 취했다. 소진은 40번째 칸을 채워 얻은 혜택으로 앞선 세 번에서 집어 들었던 버터링 쿠키 대신 재하를 택했다. 그런 소진에게 재하는 바로 빠져들었다. 어쩌면 소진의 목소리를 상상하던 밤부터 이미 빠져 있었는지도 몰랐다.


   소진은 눈에 거슬리는 걸 그냥 참고 넘기지 않았다. 재하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그랬다. 재하 험담을 하는 직원에게 실수인 척 커피를 쏟아버리는 것도 그런 일 중 하나였다.

   “저것들은 지들이 직접 당해봐야 알거든.”

   당해봐야 안다는 이들에게 소진은 직접 당하게 함으로써 알려주었다. 실수로 가장하든 사고로 위장하든 소진은 일을 꾸며 그들에게 해를 입혔다. 소진은 그런 일련의 과정을 구원이라고 표현했다.

   “내가 은혜를 베푸는 거야. 은혜를 받은 자들은 구원을 얻는 거고.”

   소진이 벌이는 구원 놀이에 재하도 가담하면서 소진의 유쾌함을 즐겼다. 처음엔 주로 소진이 은혜를 베풀 사람을 정했지만 점차 재하도 구원할 사람을 직접 고르기 시작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몇 분간 자리를 비웠다가 몸 전체에 담배냄새를 묻히고 돌아오는 박 팀장은 유독 담배를 피우고 오면 기운이 나는지 별로 궁금할 것도 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잔뜩 담배냄새가 배어있는 날숨에 담긴 말이었다. 팀원들이 몇 번 눈치를 주긴 했지만 박 팀장은 늘 일관된 말로 무시했다.

   “남자의 냄새야. 이게 어른의 냄새인 거지.”

   박 팀장은 재하가 은혜를 베풀기로 마음먹은 첫 번째 사람이었다. 박 팀장이 담배를 피우러 나가자 재하는 은근슬쩍 박 팀장 자리로 향했다. 다른 팀원들이 앞의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박 팀장 자리의 유선 마우스 줄을 서너 번 꼬고 그 위에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위태롭게 얹었다. 가슴이 뛰었다. 담배를 피우러 나간 박 팀장을 지금처럼 애타게 기다린 적은 없었다. 몇 분 후 사무실로 돌아온 박 팀장은 들었어? 총무팀 이 대리가 이번 달 주식으로만 이백 벌었다던데? 하며 흡연장에서 주워 온 정보를 뱉어놓고는 마우스 선 위에 위태롭던 종이컵을 마우스보다 먼저 집어 듦으로써 재하가 베푸는 은혜를 외면했다. 소진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겨우 웃음을 참고 있었다. 퇴근 후 소진이 구원 실패 위로주를 마셔야 한다며 회사 근처 수제버거집으로 재하를 끌고 갔고 버거와 함께 콜라 대신 맥주를 주문했다.

   “아쉽거나 한건 아니지? 충분히 어설픈 계획이었잖아.”

   “다 의도한 거였어. 박 팀장이 어설프잖아. 뭐랄까, 눈높이 계획 같은 거였단 말이야”

   “눈높이 너무 낮췄다. 한참 올려야겠어.”

   소진은 수제버거와 맥주를 먹는 내내 밝았다. 회사에서는 쉽게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소진은 아무런 감정도 묻어있지 않을 때의 얼굴이 가장 예뻤고 재하는 그 무표정한 얼굴에 반했었다. 드물게 한 번씩 소진이 웃을 때면 눈가에 가벼운 주름이 몇 가닥 잡혔는데 재하는 그 사소한 흠이 살짝 아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애를 시작하고 웃을 때 생기는 눈가의 주름이 자신에게로 향하면서 아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오히려 눈가의 주름이 사라지고 자신이 반했던 가장 예쁜 얼굴이 될 때마다 지금 소진의 기분이 안 좋은 건 아닌지,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소진의 주름은 망망대해에서 애타게 찾는 등대 같은 것이었다. 안락한 육지가 가까이에 있다는 일종의 신호. 소진이 흠 있는 조금 덜 예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재하는 망망대해를 떠돌다 몇 달 만에 귀항하는 선원처럼 마음이 들떴다.


   수제버거집을 나와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겨울 초입이었지만 산책로가 잘 정비된 공원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공원 입구를 지나 오른편으로 접어들자 잔디가 깔린 공터가 펼쳐졌고 키 높은 나무들로 가려져 있던 밤하늘이 공터 위로 펼쳐졌다. 구름이 없어 유난히 까만 밤이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재하는 오늘 일을 떠올렸다. 결과적으로 박 팀장의 하루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낯선 불편함이 재하의 마음 한 곳을 찔렀다. 이래도 되는 건가. 그저 남에게 해만 끼치는 건 아닌가. 혼자였다면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 간단한 답이 소진과 닿으면서 모호해졌다. 소진은 이런 일을 벌이는 게 아무렇지 않은 걸까. 재하가 잡고 있던 소진의 손을 자신의 점퍼 주머니에 넣으며 물었다.

   “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몇 점 있어?”

   까만 밤하늘을 한번 쳐다본 소진이 머뭇거림 없이 말했다.

   “없는데. 나 하늘 잘 봐”

   소진은 당당했다. 알려주는 거라 했다.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거라 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울 일 따위는 없다고 했다. 잡은 손에 힘을 준 소진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걱정 마. 재하야. 넌 언제나 나와 함께 떳떳할 거야.”

   또박또박 분명한 발음이었다. 밤하늘에 두었던 시선을 소진에게 돌렸다. 소진이 눈가에 흠이 있는 덜 예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다는 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진을 보는 걸로 충분했다. 소진이 바로 하늘이었다. 모호한 답이 소진과 닿으면서 간단해졌다. 마음 한 곳을 찌르는 가시가 더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면서 공원은 찬 기운이 돌았다. 공원을 비추는 가로등 불빛이 어둠에 반해 선명해졌다. 공원 바닥에는 가로등 불빛보다 키가 작은 나무의 그림자가 깔려있었다.

   “재하야.”

   공원을 나설 때 소진이 재하를 불렀다. 소진에게 고개를 돌리는 걸로 재하가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재하 앞에 소진이 마주 섰다. 한참 동안이나 재하의 눈을 응시하던 소진이 입을 열었다.

   “우리 결혼하자.”

   재하가 멍하니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서 있기만 하자 소진은 도장이 100개가 찍힌 무인 샵 쿠폰을 꺼내 들어 재하 눈앞에 내밀었다.


   결혼 후 소진이 회사를 옮겼고 넉 달이 지나 재하도 새로운 회사를 찾았다. 결혼과 이직으로 한동안 뜸하던 소진의 구원은 층간소음 항의에도 뻔뻔하던 윗집 젊은 남자를 시작으로 음식에서 건져낸 머리카락을 보고도 그럴 리 없다며 우기던 동네 식당 여주인, 별 이유 없이 길고양이에게 돌을 집어던지던 50대 남자에게로 이어졌다. 그중 몇 번은 재하와 함께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구원의 당위성을 찾지 못한 재하가 주저할 때면 소진은 혼자 계획을 세워 은혜를 베풀었다. 소진의 은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과감해졌고 구원이 필요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까지도 손길을 뻗쳤다. 남에게 해를 입히는 횟수가 점점 잦아지고 그 강도도 점차 세지면서 재하는 혼란스러웠다. 혼자였다면 하지 않았을 일들이 계속해서 쌓였다. 그러면서 깊숙이 묻어 놓았던 의문이 고개를 들었고 녹아 없어진 줄 알았던 가시가 다시 돋아났다. 재하는 조금씩 커져가는 가시를 외면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결혼한 지 3년이 지나고 벌어진 혜원의 사고로 재하는 처음으로 소진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혜원의 병문안을 다녀온 소진이 마치 일의 결과를 보고하듯 재하에게 혜원의 상태를 알렸다.

   “두 달 입원에 정신 불안. 그리고 약간의 후유증이 남을 왼쪽 다리.”

   이 정도면 만족한다는 말투. 계획대로 잘 마무리되었다는 표정. 소진을 보는 재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소진을 마주하기가 겁났다. 두려움이 재하를 구석으로 몰았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었다. 재하는 거실에 걸린 사진 속에서와 같은 환한 웃음을 지웠고 자신의 활시위를 끊었다. 소진은 그런 재하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색한 관계가 1년 정도 이어지던 어느 날 재하가 소진에게 현우의 일을 꺼냈고 소진은 아무런 말없이 재하가 세운 계획을 따랐다. 4개월이 지나면서 둘의 구원은 거의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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