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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Oct 25. 2024

구원 (5 / 5)

   현우가 3년마다 주어지는 2주간의 소중한 안식휴가를 장마철로 잡은 건 현우에게는 나름 이유가 있는 선택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회사에 출근하고 하루 종일 젖은 느낌으로 일을 하고 퇴근 시간, 그 축축함이 미처 마르지도 않았는데 다시 끈적이는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 괴로웠다. 현우는 비를 싫어했다. 지나온 삶에서 더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들, 이를테면 고등학교 2학년 때, 은근한 따돌림의 분위기가 욕설, 폭력과 함께 직접적으로 현우에게 다가왔던 날이 비와 함께였다. 첫눈에 반해버려 서둘러 결혼을 결심하고 값 비싼 반지를 준비해 프러포즈를 했던 날,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며칠을 술에 취해 지내다 결국 이혼을 결심한 날,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던 날. 현우의 기억으로는 그 모든 날들에 비가 왔다.

   “비는 언젠가는 그쳐.”

   재하는 늘 같은 말로 현우를 위로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들엔 언제나 재하가 옆에 있었다. 욕설과 폭력이 지나간 후 학교 건물 뒤 쓰레기 소각장 한쪽 구석에 숨었던 현우를 찾아내 손을 내민 사람이 재하였다. 프러포즈를 설레어하고 결혼을 축하하고 아내의 외도에 분노하고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던 날, 함께 술 취한 사람이 재하였다.

   “비가 개이면 더 좋은 날들이 올 거야.”

   뻔한 위로였지만 현우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우울한 감정은 재하의 말처럼 비가 그치면 사그라지곤 했다. 비는 그저 외면하기만 하면 저 혼자 부슬거리다 그쳐 사라진다는 걸 현우는 이혼을 하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다. 비는 언젠가는 그쳤고 비 개인 하늘은 맑고 높았다. 재하의 말처럼.


   장마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위세를 떨치던 구름은 두텁게 움켜쥐었던 하늘을 조금씩 내주고 있었다.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거실의 푹신한 소파에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현우는 이혼한 아내의 물건 중 유일하게 버리지 않은 모카포트(현우는 그 커피 맛을 좋아했다)로 커피를 끓였다. 커피가 내려지기를 기다리며 토스터기에 식빵을 굽고 냉장고에서 크림치즈를 꺼냈다. 가볍게 허기를 채운 현우는 샤워를 하고 출근할 때는 입지 않는 간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재하가 여느 때처럼 편의점에서 산 삼각김밥을 들고 오래된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긴 시간 동안 누군가의 관리를 받은 흔적 없이 방치된, 그래서 이제는 공원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곳에서 재하는 혼자였다. 벤치 옆 느티나무의 굵은 뿌리가 공원 바닥을 헤치고 땅 위로 거칠게 드러나 있었다. 제멋대로 갈라져 얽힌 뿌리가 마치 포승줄처럼 재하의 발목을 결박하고 있는 듯했다. 느티나무가 드리운 그늘은 빠져나갈 틈 없이 재하를 에워싼 그물처럼 보였다. 굳이 이런 곳을 찾아 점심을 먹는 재하가 답답했다. 그러면서도 재하가 이곳을 찾는 이유를 현우는 어쩌면 알 것도 같았다. 폐쇄되어 버려졌던, 그래서 오히려 아늑했던 쓰레기 소각장이 현우의 기억에서 떠올랐다. 현우가 벤치 한쪽 편에 자리를 잡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거의 끝인 거지?”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소진이 곧 얘기할 거야. 헤어지자고. 아마 지겨워졌다고 하지 않을까 싶네.”

   “지겨워졌다라. 소진이 답네.”

   “고생했어.”

   현우는 바닥의 젖은 흙을 발로 한번 긁어내고는 나직이 말했다.

   “그러게.”


   4개월 전, 소진이 곧 다가갈 거라고, 모른 척 자연스럽게 만나 달라고 재하가 부탁할 때만 하더라도 현우는 재하가 장난을 치는 걸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재하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를 묻자 재하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구원하려고.”

   소진과의 둘 사이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인다는 게 미안하지만 이런 부탁을 할 사람이 자기에게 딱 한 사람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다 정말 소진이 나를 좋아하게 되기라도 하면 어쩔 거냐는 농담을 건네 봤지만 재하는 웃지 않았고, 현우 역시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재하에게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고인 빗물이 발목을 덮고 무릎을 지나 허리까지 차오르는 걸 지켜보면서도 현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몇 번이나 손을 내밀었지만 재하는 현우의 손을 외면했다. 언젠가 비는 그칠 거라고, 그러면 모두 괜찮아질 거라고도 말해봤지만 그건 현우에게나 통했던 위로였다. 재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비를 맞으며 오랫동안 젖었다. 현우는 그런 재하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다 내민 재하의 손이었다. 재하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 무엇이든 일단은 잡아야 했다. 있는 힘껏 단단히 그 손을 움켜잡고 구렁텅이 밖으로 재하를 끄집어내야 했다. 일주일이 지난 목요일, 재하의 일을 의논하고 싶다며 소진에게 문자가 왔다. 현우는 금요일 저녁에 시간이 빈다고 답문자를 보냈다.


   “그래서 이제 네가 말하던 구원은 된 거야?”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부족하면 다른 뭔가를 또 꾸며내 봐야지.”

   “이런 짓을 또 한다고? 너 정말 제정신이야? 재하야. 그거 집착이잖아. 난 네가 망가질까 걱정된다고.”

   “좀 망가져도 괜찮아. 현우야. 난 소진이 놓고 싶지 않다. 어제는 이야기도 제법 많이 나눴어. 슬쩍 웃기도 했는데. 소진이 웃는 모습을 본 게 거의 1년 만이야.”

   현우는 재하의 목소리가 갑자기 밝아졌다는 걸 느끼고는 재하를 쳐다봤다. 재하의 입가에 웃음기가 번져 있었다.


   재하의 첫 직장, 첫 출근을 축하하기 위해 만난 술자리에서 재하는 현우야, 나 인생의 여자를 만난 것 같아,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소진이 얼마나 매력이 넘치는 사람인지를 설명하는 재하의 눈이 빛났다. 연애는 이제껏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던 재하였다. 그런 재하에게 첫사랑인 거야? 이제야 너 어른 됐구나, 하며 현우도 함께 기뻐했다. 그날 둘이 취할 때까지 나눈 대화는 온통 소진이었다. 재하는 늘 그랬다. 소진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재하는 늘 밝았다. 현우는 소진을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고 설득하려던 마음을 접었다. 재하의 웃음을 다시 본 것도 거의 1년 만이었다. 재하를 웃게 하는 사람은 소진이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재하와 인사를 하고 공원을 나오면서 현우는 재하를 한번 뒤돌아보고 나직이 혼잣말을 했다.

   “그래. 웃으니 됐다.”

   하늘은 맑았다. 간간이 보이는 구름은 그간 품고 있던 검은 때를 말끔히 벗어내고 청명한 하늘과 어우러졌다. 시원한 바람이 옷깃을 훑고 지나갔다. 유난히 길었던 장마가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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