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서른다섯

사람의 눈이 두려웠던 이유

어린 시절 '사건'이 성장에 미치는 영향

by 흐를일별진



한창 사진을 배우던 대학 시절.

여자 동기끼리 자취방에 모여 이런 이야기를 했다. 각자 마음속에 있는 트라우마를 꺼내보자.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말하고 싶은 사람만 이야기해보자. 대화의 이유는 사진을 찍기에 가장 완벽한 소재인 나를 알기 위해서였다. 동기들은 하나 둘 이야기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자리에 모인 동기들의 대다수가 '성'과 '폭력'에서 시작된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다. 그들의 어두운 기억은 끊임없이 형태를 바꿔가며 마음에 영향을 주었다. 나는 말을 하기보다는 듣고만 있었는데, 순간 몇몇 장면들이 뇌리를 스쳤다.


할머니 집 옥상. 하얀 벽. 옥상에 다다르기 전 사각지대와도 같은 계단의 연결 부분. 초록색 바닥.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앉아 있는 사촌 오빠. 그 앞에 서 있는 나. 내 배에 닿던 자그마한 무언가. 퀴퀴한 된장 냄새가 풍기던 방 안. 숨이 막힐 듯 무거운 이불에 깔리듯 누운 나. 그 위의 오빠. 모든 게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내 눈을 바라보던 그의 표정만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랬다. 사실 나도 오빠도 상당히 어린 축에 속했는데,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간접적인 어떤 행위가 자신의 기분을 좋게 해 준다는 걸.




학창 시절의 나는 사람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더라도 내 시야는 그들 너머 어디에 닿아있었다. 단 둘이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는 친구의 콧잔등이나 미간을 바라보며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극장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배우와 눈이 마주치는 경우에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언가가 나를 관통하는 것 같은 묘한 기분 이후엔, 이내 불쾌해졌다. 한 번 씩 친구들이 장난을 친다고 얼굴을 들이밀면 난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 내 눈을 바라보며 다가오는 그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웃는 표정으로 바라봐도 무 표정으로 바라봐도, 눈과 눈이 마주친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나는 왜 이럴까 진지하게 고민해봤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내가 근본적으로 소심한 성향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이유 모를 시선 공포는 스무 살, 성인이 될 때까지도 이어졌다. 달라진 게 있다면 더는 친구들이 나를 놀리지 않았다는 것뿐. "넌 왜 눈을 안 마주쳐?"라고 묻기 전엔 내 두려움을 먼저 말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다 의외의 곳에서 오랜 트라우마를 마주했다. 아아, 긴 시간 헛돌던 톱니바퀴가 딸깍 소리와 함께 맞물려 돌아가는 듯했다.


아마 어린 시절의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고 있었을 거다. 언젠가부터 엄마는 내가 오빠와 단 둘이 있는 걸 경계했고, 오빠가 있을 땐 날 할머니 집에 데려가지도 않았다. 엄마의 기분에 예민하게 반응했다던 딸이니 그 일들이 '문제'라는 걸 몰랐을 리 없다. 그러니 이토록 새까맣게, 그 무렵의 일들을 잊는 것으로 도망친 거겠지. 다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라서 트라우마의 형태로 긴 시간 나를 괴롭혀온 것 같다.




동기들과의 긴 대화가 끝나고 얼마 뒤, 내겐 연인이 생겼다. 첫 연애였고 마음과 마음이 통한 것도 처음이라 들뜬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트라우마의 정체를 알게된 나는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여전히 그 친구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변한 건 없었다. 결국 동기들의 특훈이 시작됐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사람의 눈을 보는 연습을 했다. 일정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며, 친구들이 내게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간혹 너무 가까워졌을 땐 눈을 감고 싶을 정도의 공포감을 느꼈지만 그마저도 조금씩 나아졌다. 서서히 마음이 열리고 나니 좋아하는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었다. 나와 대화하는 사람의 표정을 보고 눈빛을 읽고 그 너머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시선을 피해선 안됐다.

변화가 시작되던 그 무렵. 날 똑바로 바라보는 눈엔 사랑이 가득했다. 애정과 걱정, 날 생각하는 마음이 전부였고 때로는 날 갈망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다. 나는 그런 눈을 보는 게 좋아졌다.




서른 여섯. 이제 나는 사람의 눈을 본다. 표정을 읽고 미묘한 눈빛의 변화를 읽는다. 피하지 않는다. 물론 과거의 기억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의 내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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