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도망칠 수 없어서
처음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고 호흡이 가빠져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순간. 흉통과 위통이 같이 와서 허리를 폈다간 몸이 찢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순간. 숨을 아무리 몰아쉬어도 그 숨이 턱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순간. 물에 빠져 코만 간신히 내놓고 숨을 쉬지만, 결국 입 안으로 물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순간. 온몸을 휘감아 돌던 피가 한순간에 멈춰버리고 금방이라도 곧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순간.
몇 번은 기어가듯 집에 들어가 미친 사람처럼 혼자 울고 소리를 지르며 내 몸을 때리고 나서야 가라앉았고, 몇 번은 밖에 주저앉아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며 심호흡하고 나서야 가라앉았고, 그러다 몇 번은 병원에서 혼자 링거를 맞다 울음이 터지고 나서야 괜찮아졌다.
최근 내 증상에 대해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의 공황은 10년 치 방송 작가 생활을 하며 겪었던 상처와 그간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의 결과가 살만해지니 증상으로 드러난 거라고. 그동안은 내가 내 몸을 아프게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그 때문에 멀쩡하다고 착각했던 거라고. 생각해 보면 난 늘 도망쳤고 사람을 끊어냈으며, 힘든 상황이 닥친 만큼 혼자 동굴 속으로 들어갔었다. 남들의 말은 듣지 않고 내가 살 만큼 잠수를 하고 나서야 밖으로 나왔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잃으면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를 향한 모든 공격을 내게 유리한 쪽으로 정당화 했다. 어쩌면 그 모든 과정이, 얼떨결에 내 증상 발현을 막아주고 있었던 게 아닐까. 전혀 치유되지 않은 상태로 피하는 게 익숙했던 지난 시간이, 우습게도 나를 지키고 있었던 게 아닐까.
요즘의 나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쳐 있다. 아니, 도망쳐선 안 된다. 집에 벌어진 일, 나를 둘러싼 관계에서 벌어진 일, 소중한 사람에게 벌어진 일까지 모든 게 내 책임이자 견뎌야 할 몫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나는 버텨내야만 한다. 그들의 곁에 있기로 한 내 선택에 책임져야만 한다.
내 공황 증세는 도망칠 수 없기 때문에 발현된 거다. 동굴에 들어갈 틈이 없기 때문에 심해진 거다. 그걸 아는 내가 스스로를 버틸 수 없어진 거다.
결국 최근 정신 건강 의학과를 찾아 제대로 진단받고, 길면 1년가량 약을 챙겨 먹으며 관리를 해야 한단 말을 들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 과정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최소한 도망치지 않았음에, 내 상처를 마주하고 있음에 만족하고 있다. 내게 닥친 모든 비극을 이제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증명하는 것만 같다.
어떤 존재는 허물을 벗고 제 모습을 찾듯이 나 또한 성장할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다. 성장엔 고통이 동반되기에 이번만큼은 두 눈 똑바로 뜨고 내게 닥친 모든 일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 그 과정에서 절망하고 상처받고 무너지더라도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표현하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자 한다. 몸의 증상이 아무리 거세게 일어난다고 해도, 나는 결국 이겨낼 거다. 고통도 비극도 결국에는 삶. 이제 막, 긴 터널 속으로 들어왔으니 앞으로는 밖으로 나갈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