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서른여섯

권태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어쩌면 그것도 사랑

by 흐를일별진




친구들 사이에서 권태기가 화두에 올랐습니다. 관계를 끝내고 싶은 순간과 권태기. 비단 그 감정은 보편적인 사랑에만 해당하는 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맺는 모든 관계에 해당하는 말이죠.


생각해 보면, 저의 경우 권태라는 감정은 늘 제 문제에서 비롯됐습니다. 저를 둘러싼 상황은 변하지 않아요. 변한 건 저였습니다. 누구도 노력하라고 한 적 없지만, 혼자 노력하다 지쳐버렸을 때. 거리 조절에 실패해서 선을 넘어버렸을 때. 익숙해졌거나 진절머리가 났거나, 변하고 싶어졌거나.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데 가장 편한 방법은 처한 환경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가진 걸 바꾸고 싶은 거죠. 연인은 그래서 이별하고 친구는 멀어집니다. 일은 내려놓고요. 익숙한 걸 내다 버리고 새로운 걸 찾아갑니다.

그러나 익숙함의 권태는 습관입니다. 누굴 만나도 어떤 일을 해도 익숙해지는 순간은 찾아옵니다. 나라는 사람도 매 순간 변하게 될 거고요. 그때마다 주변을 바꿀 순 없습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어요. 권태라는 감정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선 내 마음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 이름의 감정 속엔 참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거든요.

나를 좀 더 사랑해 줘. 내 마음을 알아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나를 믿어줘. 더 잘하고 싶은데 내가 부족한 것 같아. 인정받고 싶어. 더 좋아하게 될까봐 무서워. 나를 미워하지 마. 아직도 좋아해. 변하지 말고 날 바라봐줘. 요즘 힘든 것 같아. 위로가 필요해.

온갖 복잡한 감정이 한 단어에 들어 있습니다. 마음의 결핍을 채우지 못할 때, 우리는 권태라는 이름으로 도망치려 합니다.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숨기기에, 권태는 참으로 적절한 단어입니다. 내 찌질함을 감추기에도 완벽하죠.


어쩌면 권태라는 감정은 무언가가 싫어졌을 때보다는 아직 좋아하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감정이 부정적으로 변하게 될 때가 있으니까요. 좋아해서 화가 나고 서운한 게 쌓여가는 거. 서운함을 상대의 변화에서 찾고 속상함을 표현하지 못하면 그 감정이 권태가 되는 거죠. 어쩌면 정말 마음이 끝난 걸 수도 있고, 아니면 두 사람 모두 각자의 권태에 허덕이고 있는 걸 수도 있습니다.

변화의 여지는 대화로만 찾을 수 있어요.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고 권태라는 단어에 숨지 않고, 다시 한번 감정의 출발선에 서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정도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솔직하지 못하면 어떤 식으로든 끝은 찾아옵니다. 선택의 책임은 나에게 있고요.


보편적인 사랑에서의 권태. 저는 그 감정도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사랑이라는 감정도 똑같다고 생각했어요. 뒤따라오는 모든 감정이 사랑이었기에, 굳이 그 사람을 내려놓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다만 사랑을 제외한 것엔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친구와는 거리를 뒀고 일은 포기해 버렸어요. 사람에게서 권태를 느끼면 무작정 혼자 남았습니다. 저는 상당히 비겁한 방법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 식으로든 권태감을 즐기는 중입니다. 사랑해서 권태기가 온 거고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지쳐버린 거다, 최선을 다했기에 이런 시기가 왔다, 그렇게 생각하는 중입니다. 흘러가는 시기. 한 번쯤 꺾이는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면 권태라는 단어는 아무것도 아닌 거 같습니다. 매사 열정적일 순 없으니까요. 권태는 극복하는 게 아니라, 나를 깨닫고 흘려보내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나를 돌아보라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라고. 저는 천천히 느린 호흡으로, 모든 감정을 제대로 소화하며 살고 싶습니다. 권태로움을 삶의 한 방향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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