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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디지만 우아하게 Sep 18. 2016

느리게 걷기

길의 굴곡,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걸어야 보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아름답습니다.

우리 삶이 그렇습니다.


루앙프라방이라는 조그마한 도시에서 2년을 지냈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대학로의 풍경보다 더 선명하게 그려지는 곳입니다. 그런 도시를 새롭게 만났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닌 이후입니다. 자전거를 타면 신기하게도 길의 굴곡을 느낄 수 있습니다. 허벅지가 조금 뻑뻑해지면 오르막길, 페달이 조금 빨리 돌면 내리막길입니다. 제 머릿속 지도에는 이제 도시의 위치와 함께 굴곡을 표시하는 등고선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그마한 도시. 키 큰 외국인. 유난스러운 복장. 긴 머리. 그리고 낯선 자전거.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와 함께 저를 기억합니다. 그래서인지 때로 친구에게 자전거를 빌려주고 혼자 도시를 걸으면 길가의 현지인들이 누가 제 자전거를 훔쳐간 게 아닌지 걱정스레 말을 건네곤 합니다. 따듯하고 마음 넉넉해지는 풍경입니다.


한 번은 자전거가 멈춰 섰습니다. 격주로 수리점에 들릴 정도로 애지중지했던 녀석이지만 비포장 도로를 이겨내기엔 벅찬가 봅니다. 평소 같으면 수리점에 전화하고 바로 갔을 텐데,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던 날이 있었습니다. 아마 일종의 회기 본능이 다시 찾아왔나 봅니다. 운전을 하면서 자전거를 그리워했고 그래서 어렵게 자전거를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뚜벅이에 대한 그리움이 생겼습니다.


두 발로 도시를 걸으니 자전거를 탈 때처럼 길의 굴곡이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다만 잃어버린 무언가를 다시 만습니다. 자동차가 갈 수 없는 곳을 자전거로 다녔듯, 두 발은 자전거로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이 다녔던 골목도 때로는 새롭고, 때로는 낯선 두려움으로 찾아왔습니다. 겁쟁이인 저라서 뚜벅이가 된 이후 갈 수 없는 시간과 장소가 생겼고 그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발견이었습니다. 그리고 늘 걸음이 느린 아이인 저라서 다시 한번 고마웠습니다.


정든 도시를 떠나왔습니다. 이젠 고향이 많아져서 제2-, 3-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을 멈췄습니다. 루앙프라방이 특별하게 기억되는 하나의 이유는 자동차로, 오토바이로, 자전거로, 그리고 두 발로 모두 도시를 걸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더 생생하게 기억되는 곳입니다. 도시의 위치, 굴곡을 표시하는 등고선과 함께 이제는 골목길에 놓인 풍경과 사람들, 표정, 그리고 바람이 불던 느낌도 제 지도에 남아있습니다.


조금은 느리게 걸으며, 조금 더 풍성한 오늘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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