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문집

느리게 걷기

길의 굴곡, 바람을 느끼며

by 더디지만 우아하게

천천히 걸어야 보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아름답습니다.

우리 삶이 그렇습니다.


루앙프라방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2년을 지냈습니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 대학로의 풍경보다 더 선명하게 그려지는 곳입니다. 그곳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나서부터입니다. 자전거를 타면 길의 굴곡을 오롯이 느낄 수 있습니다. 허벅지가 조금 뻑뻑해지면 오르막길, 페달이 조금 빨리 돌면 내리막길입니다. 제 머릿속 지도에는 이제 도시의 굴곡을 표시하는 등고선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그마한 도시. 키 큰 외국인. 유난스러운 복장. 긴 꽁지머리. 그리고 낯선 자전거. 그곳의 사람들은 자전거와 함께 저를 기억합니다. 그래서인지 이따금 지인에게 자전거를 빌려주고 혼자 걷고 있으면 길가의 현지인들이 누가 제 자전거를 훔쳐간 게 아닌지 걱정스레 말을 건네곤 합니다. 따뜻하고 마음 넉넉해지는 풍경입니다.


한 번은 자전거가 멈춰 섰습니다. 격주로 수리점에 들릴 정도로 애지중지했던 녀석이지만 라오스의 비포장 도로를 이겨내기엔 벅찼나 봅니다. 평소처럼 수리점에 바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왠지 그러고 싶지 않은 날이 있었습니다. 아마 일종의 회기 본능이 다시 찾아왔을까요? 운전을 하는 내내 자전거를 그리워했습니다. 자전거가 생긴 지금은 다시 뚜벅이가 그리워졌나 봅니다.


두 발로 도시를 걸으니 자전거를 탈 때처럼 길의 굴곡이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다만 잃어버린 무언가를 또다시 만습니다. 자동차가 갈 수 없는 곳을 자전거로 다녔듯 두 발은 자전거로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저를 이끌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이 다녔던 골목길로 때로는 새롭고 때로는 낯선 두려움으로 찾아왔습니다. 겁쟁이는 저는 뚜벅이가 된 이후 갈 수 없는 장소와 시간이 생겼지만 그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늘 걸음이 느린 아이인 저라서 고마웠습니다.


정든 도시를 떠나왔습니다. 이젠 고향이 많아져서 제2-, 3-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을 멈췄습니다. 루앙프라방이 특별하게 기억되는 하나의 이유는 자동차로 오토바이로 자전거로 그리고 두 발로 모두 도시를 걸었기 때문입니다. 골목길에 놓인 사람들의 표정과 풍경, 그리고 바람이 불던 그날의 상쾌함도 제 지도에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오늘도 조금은 느리게 걸으며,

조금 더 풍성한 오늘이 되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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