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더스의 개를 생각하면 파블로프가 떠오른다. 살다 보면 이런 종류의 불규칙성을 종종 만나게 마련이다. 마치 비피더스를 생각하면 파스퇴르가 생각나는 것처럼. 그나마 후자는 유사성이 있고 나름 평화로운 관계인 반면 플랜더스와 파블로프는 어떤 의미에서 양 극단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플랜더스와 파블로프가 동시에 연상되는 게 싫었지만 괜찮은 해결방법을 찾지 못한 채 지금까지 흘러왔다. 잘못이라면 경영학을 공부한 탓이랄까.
태어나서 기억이 있을 때부터 강아지와 함께였다. 물론 강아지보다는 조금 더 큰 아이들도 있었다. 도시와는 조금 벗어난 곳에서 강아지와 함께 자란 어린 시절. 플랜더스의 개를 좋아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지 모르겠다. 보통의 강아지와 달리 목동을 도와 양을 모는 목장견을 키워서 조금 더 목가적인 성향을 가졌던 것 같다. 책으로 읽어본 게 전부였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플랜더스의 개의 풍경만큼이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파블로프는 다르다. 소중한 강아지가 실험대상으로 전락한다. 실험과 훈련을 가장한 강압이다. 모든 의학이 임상실험을 통해 발전했다는 주장에는 달리 대응할 말이 없다. 궁색하지만 어쨌든 파블로프의 개는 슬프다. 조금 더 슬픈 사실은 파블로프의 개의 실험 결과가 우리에게도 흔히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흡사 로봇이 인류를 지배한다는 공상과 비슷하다. 파블로프가 강아지를 실험했다. 그리고 실험 결과는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 되었다.
학위논문처럼 오랜 기간 집중해야 하는 일은 이내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다. 수많은 동기부여도 무용지물이다. 그러다 문득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마음으로 울었다. 어머니와의 대화는 늘 잃어버린 무언가를 상기시킨다. 누군가는 의지를 다지기 위해 소중한 이에게 전화를 걸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에게 어머니의 전화는 파블로프가 아닌 어린 시절의 플랜더스를 기억하게 한다. 삶의 모든 무게를 홀로 견디며 나에게 선사해준 플랜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