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그늘
어쩐 일인지, 나는 다시 학교 호두나무 아래 서 있었다. 나무 그늘은 눈부신 여름 햇살을 막아주었고, 그 너머로 담임 선생님의 또렷한 모습이 보였다. 정갈한 정장과 군인 같은 자세, 그 듬직한 기품이 가슴을 뛰게 했다. 저런 분이 내 아버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가 나를 향해 다가와 손을 뻗었을 때, 나는 순간 겁이 나 몸을 움츠렸다. 집 밖에서 얼굴과 목소리를 드러낼 때마다 몰려드는 불안은 늘 내 속을 뒤집어놓곤 했다. 여름의 열기가 피부에 달라붙듯 짓눌렀다.
"절 보지 마세요!"
나는 비통하게 외쳤다.
그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이내 차분하면서도 다정한 음성이 흘렀다.
"넌 내 자랑스러운 제자란다. 네가 얼마나 멋진데."
"거짓말!" 나는 몸을 돌려 독사처럼 쉭쉭대는 목소리를 뱉었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사랑하는 제자야, 여길 보아라."
간청하는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지만, 눈물만 훔칠 뿐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가야 한단다." 그는 한 걸음 더 다가오며 말했다.
"거절하고 싶지만 거절할 수가 없어. 나는 가야만 한단다."
"그럼 다른 분을 보내세요. 제가 선생님을 지킬게요!"
내 목소리는 흐느낌에 젖어 떨렸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떠날 수 없어. 아이들이 남아 있고, 학교에 대한 의무를 버릴 수 없단다."
"선생님이 돌아오지 않으시면 전 정말 혼자가 되고 말 거예요."
나는 애원했다.
그가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자, 나는 움찔하며 몸을 뺐다. 순간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우리는 하늘 밑 같은 신의 자손이야. 믿음 있는 곳에 버려짐은 없다. 언젠가 너도 세례를 받아 네가 짊어져야 할 의무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내 손에 성경을 쥐여주었다.
"길을 잃을 때면 말씀만이 네 길을 비춰줄 것이다."
돌아서 떠나는 기척에 나는 서둘러 몸을 돌렸으나, 이미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손에 쥔 성경을 펼치자, 너덜거리는 표지 사이에 낯선 종잇장이 끼워져 있었다. 붉은 볼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고통 속에도 행복이 있나니.
그 아래에는 민호의 세례명, 가브리엘이 휘갈겨 적혀 있었다.
종소리가 뎅뎅 울리며 또래들의 소란이 몰려왔다. 고요하던 그늘은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발걸음 소리, 속삭임, 웃음이 뒤엉켰다. 누군가 돌을 던졌다. 안 봐도 알았다.
"여기야!"
아이들의 고함 너머, 민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나무 밑에 쭈그려 앉아 공포에 질린 나를 향해 걸어왔다. 표정에는 짜증과 냉소가 섞여 있었다.
"민호야, 방금 선생님이—"
"변명은 필요 없어, 멍청아! 어떻게 된 건지만 말해!"
그의 말이 내 입을 끊었다.
"쉬는 시간에… 선생님이 가야 한다고 하셨어." 나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그림자처럼 붙어 있으라 했잖아!"
민호는 나를 조롱하며 다가왔다. 나는 시선을 떨군 채 아무 대답도 못 했다. 그는 내 명치를 짓밟고 이를 드러내며 윽박질렀다.
"대답해, 이 바보야!"
겁에 질려 뒷걸음질치는 내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왜 그래? 또 바보처럼 도망쳐봐!"
그는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더니, 목덜미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숨이 막혀 버둥거리는 순간, 민호는 문득 손을 멈추었다. 세상이 정지한 듯 고요가 흘렀다.
그때, 깨달음이 전율처럼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 빌어먹을 쓰레기들!"
내 목소리는 분노로 갈라졌다.
"고작 호기심이나 채우자고 감히 선생님을 잃던 그 순간으로 되돌려?"
민호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선생님도, 민호도, 아버지도 나를 버렸어." 나는 내던지듯 말했다.
"왜 나여야 했지? 모두가 고통받는다지만, 왜 나는 이토록 끔찍해야만 했어? 난 고작 열 살배기 아이였는데!"
민호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속마음을 드러내니 기분이 어떤가?"
나는 그의 눈을 응시하며 무표정하게 뱉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그러자 그의 손아귀가 스르르 사라지고, 사방은 어둠으로 가득 찼다. 단 하나, 문이 열려 있었다.
천국으로 향하는 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