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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수집가 Aug 12. 2022

'작은 여행' - 일상이 예술이 되는 놀이

오늘은 나에게 특별한 날이다. 수원에 있는 화성행궁과 행리단길을 산책하는 작은 여행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가고 싶은 곳도 표시해두었다. 오늘 여행일정은 수원 아이파크 미술관에서 미술 전시를 보고, 행리단길의 독립서점들을 구경한 뒤, 화성행궁의 성벽을 따라 둘레길을 걷는 것이다. 


나는 작은 여행을 즐긴다. 작은 여행이라함은 그리 멀지 않은 가까운 곳으로 가벼운 마음과 몸으로 슬쩍 산책을 나가는 것이다. 너무 멀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우리 동네도 아닌 2시간 이내의 장소로 나만의 작은 여행을 떠난다. 가방 안의 물건도 핸드폰, 이어폰이 전부다. 여행의 목적은 없다. 그냥 익숙하지 않은 낯선 풍경 속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그 풍경 속에는 내가 맡아보지 못한 그곳만의 냄새와 공기와 소리가 있다. 그리고 그 풍경 속을 걷고 있는 내가 있다. 그 시간 자체가 나에게는 아주 사치스럽고 여유로운 시간이다. 목적없이 발길이 닿는대로 산책하는 시간. 


오랜 비가 그치고 오랫만에 여름의 햇살이 반기는 금요일 오후, 수원 아이파크 미술관에서는 <우리가 마주한 찰나> 라는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부유하는 찰나의 시간들을 소중히 인식하고 마주하는 순간, 일상은 예술 그 자체가 된다






구름과 풍경의 그림이 아름답다. 진짜 하늘보다 더 아름답다. 그러나 그림은 진짜를 흉내낼지언정 진짜가 되지는 못한다. 살아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짜를 흉내낸 가짜이지만 부유하는 찰나의 시간을 소중히 인식하고 그 순간을 영원히 박제하려는 예술가의 노력으로 작품은 아름답게 완성된다. 아무 보상없이 나에게 아름다움을 선물해주는 하늘과 자연을 소중히 만끽해야겠다. 부유하는 찰나의 시간을 소중히 바라보고 싶다. 먼지 한톨도 놓치지 않고 그것들을 흠뻑 맛보고 싶다.



수원 아이파크 미술관은 특별한 장소가 있다. 2층 전시실 끝에 아주 작은 도서관이 있는데 다양한 예술서적들과 잡지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전시를 다 보고 살짝 지친 다리를 쉬어가며 책들을 뒤적거린다. 이보다 더 완벽한 여행이 있을까. 아름다운 예술과 아름다운 책. 모든 것이 완벽하다. 




그곳에서 발견한 오늘의 문장


'오늘 세 군데를 들러야 하고, 네 통의 편지를 써야 하며, 시작한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식으로 자신의 걸음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를 완전히 통제하면서 살아가는 이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내 영혼은 온갖 생각과 취향과 감각에 완전히 열려 있으니 탐욕스러우리만치 있는 그대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다. 삶이라는 고달픈 여정에 간간히 흩뿌려진 기쁨을 외면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토록 귀하여 쉽게 눈에 띄는 것도 아닌데, 행여 기쁨의 열매가 눈앞에 보일라치면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라고 그 기쁨의 열매를 따야 정상이다. 

 <내 방 여행하는 법>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지음, 장석훈 옮김, 유유



걸음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를 완전히 통제하면서 살아가는 이라는 구절에서 뜨끔한다. 나를 돌아본다. 사실 오늘의 작은 여행도 즉흥적으로 떠나왔다기보다는 이렇게 저렇게 산책해야지 하고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평소에 나를 둘러싼 것들을 통제하려고 하는 나의 성향이 여행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통제를 놓고 자유롭게 숨쉬고 싶다. 온갖 생각과 취향과 감각에 완전히 열려 있는 상태로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살고 싶다. 작은 여행은 나에게 그런 삶을 연습하는 나와의 놀이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기쁨의 열매를 만끽하기 위한 연습놀이. 





미술관을 나와 행리단길의 점찍어둔 독립서점들을 찾아갔다. 백년서점과 브로콜리숲. 이름이 참 예쁘고 기억하기 쉽다. 백년서점의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엽서들과 책들, 브로콜리 숲의 단정한 책들 사이를 여행하고 다시 산책길을 나섰다. 보고 싶은 책들이 많았지만 산책하는 자에게 책은 짐이 될 뿐이다. 오늘은 활자들을 내려놓고 오직 살아있는 감각으로 산책을 누리고 싶다.




오감을 열되 머리는 비우고 설렁설렁 산책을 한다. 두 다리는 가볍고 정신은 맑다. 모든 것들을 유심히 보되 집착하거나 생각을 떠올리지 않는다. 그냥 본다. 그냥 걷는다. 그냥 숨쉰다. 아무 목적없이 산책한다. 무언가를 할 때마다 목적과 이유를 생각하려고 하는 나의 습성을 산책할 때는 내려놓는다. 그래서 살아있다는 기분이 든다. 목적없이 여기 그냥 존재하는 것. 아무 이유없이 그냥 길을 걷는 것. 그런 행위가 작은여행의 묘미다. 


작은 여행의 또 하나의 즐거움은 아름다운 풍경들이 여기저기 보물찾기처럼 흩어져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멈춘듯 미술관의 예술품을 비웃듯 살아있는 아름다운 풍경들이 보물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숨을 잠시 멈추고 카메라에 그 순간을 수집한다. 순간을 수집하는 순간 나의 일상은 예술이 된다. 목적없이 노는 아이처럼 놀이하는 사람이 된다. 


오늘도 맛있는 풍경과 순간들을 가지고 잘 놀았다. 산책하는 기쁨을 누렸다. 작은 여행을 마무리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익숙하던 일상이 영화속 장면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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