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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수집가 Jan 13. 2023

단 하나의 올레길만 걸을 수 있다면

올레 3B 코스, 시간이 머무는 책방, 신풍신천 바다목장길, 소금막 해변

2023년 1월 7일 토요일


* 27,087보

* 19.66km 걸음

* 제주 올레 3-B 코스, 시간이 멈춘 책방

* 점심 : 편의점 참치김밥, 빵, 자몽쥬스 / 저녁 : 당케올레국수의 보말죽



# 제주 올레 3-B 코스 - 소박하고 점잖으며 아득한 바다에 반하다

오늘의 산책 코스는 올레 3-B 코스다. 올레 3코스는 A와 B, 두 코스가 있다. A코스는 20.9KM로 소요시간이 거의 7시간이라 나의 체력으로는 조금 무리인 듯 해 B코스를 걷기로 했다. 올레 3-B 코스는 14.4KM로 A코스와 달리 제주 동남쪽 바다를 끼고 쭉 걷는다. A코스는 오름을 오르며 산길을 걷다가 신풍포구에서 합류하게 된다.


올레 3-B 코스는 온평포구에서 시작한다. 온평초등학교 정류장에서 내려 아랫길로 내려간다. 10분 정도 내려가니 반짝반짝 넘실대는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나는 이미 이 산책길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소박하고 점잖으며 아득한 바다가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진다. 관광화가 너무 되어 올레길의 참매력이 덜해진 월정리 쪽 바다나 함덕 쪽 해변과 달리 이곳은 매우 한적하고 조용하다. 심심한 듯하지만 빛나는 매력을 갖고 있는 길이 바로 올레 3-B 코스다.



신산환 해장성이라는 돌로 쌓은 성을 지나면 중간중간 천막을 친 포차 같은 식당이 2~3곳 있다. 간판에 '오징어, 한치 구워드려요'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바닷가 한쪽 길에 줄을 꿰어 오징어들이 나란히 몸을 말리고 있다. 하얗고 빛나는 몸들. 그리고 그 앞의 바다.

올레 3-B 코스의 가장 큰 매력은 어여쁜 바닷길을 동무삼아 산책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중간중간 벤치나 쉴 곳, 정자나 의자 등이 잘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걷는 내내 바다멍을 즐기다 다리가 아프면 나만의 전용 쉼 의자가 있는 야외 카페에서 바다멍을 이어갈 수도 있다. 올레길을 지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방법은 무리하지 않고 중간중간 잘 쉬어주는 것이다. 이런 예쁜 바다를 보며 쉴 수 있다는 것이 이 길의 매력이다. 몇 번을 가방을 내려놓고 쉬었는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나는 이 길에서 많이도 쉬었다. 덕분에 5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소개된 이 코스를 9시에 출발해 5시에 끝냈으니 거의 8시간을 걸었다. 느리게 걷는 것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목적지만을 향해 빠르게 걷다 보면 걷기의 매력을 오롯이 느낄 수 없다. 걷기의 기쁨은 걷는 중에 비로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주 천천히 나의 호흡에 맞게 걷는 것이 좋다.





#  '시간이 머무는 책방' - 무인 우주 정거장의 무인 서점에 불시착하다

신산포구를 지나 걷다 보면 2개의 카페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통유리와 세련된 건물이 인상적인 대형 카페 '아오오'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무인서점 겸 카페인 '시간이 머무는 책방'이라는 곳이다. 나는 그중 '시간이 머무는 책방'을 들어갔다.

드르-르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도 없다. 어서 오세요 하고 반기는 주인도 없다. LP판과 플레이어, 손때 묻은 책들, 주인분이 만든 제주보물지도, 그리고 오롯이 흐르는 시간만이 나를 반긴다. 아무도 없는데 꽉 찬 느낌. 시간만이 나를 반기는 이런 기분은 정말 처음이다.

창밖이 보이는 테이블에 앉았다. 바깥에 보이는 풍경이 비현실적이다. 푸른 바다가 철썩 거리며 파도치고, 햇살은 눈부시게 내리죄며, 바람에 나뭇잎들이 나부낀다. 움직이는 액자를 보고 있는 것 같다. LP플레이어가 고장 나있어 대신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었다. 음악을 들으며 창가 자리에 앉아 바다를 보고 있자니 지금 이곳이 현실이 아닌 저 우주 속 한 서점인듯하다. 아무도 없는 무인 우주 정거장의 무인 서점. 그곳에 불시착한 나.



지브리 애니메이션 중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의 여주인공 소피는 모자 만드는 일을 한다. 그 소피가 일하는 공방이 생각난다. 아주 크고 넓은 창이 있고, 그 창가 테이블에 앉아 모자를 만드는 소피. 비현실적인 영화 속 공간이 현실에 재현된 느낌이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 발견한 보석 같은 나만의 비밀 장소. 다음에 또 오고 싶다. 블로그에서 우연히 보고 찾은 곳인데 오길 정말 다행이다.

무인서점의 매력은 주인이 없는 빈 서점에 나 홀로 있다는 것이다. 내 방이 아닌데 내 방처럼 이렇게 앉아 글도 쓸 수 있고, 책도 볼 수 있고, 햇살을 죄며 창밖을 보며 바다멍을 할 수도 있다. 서점 이름처럼 시간이 머무는 책방이다. 잠시 현실의 시간을 내려놓고 꿈속의 시간에 머물며 쉬어가는 느낌이다. 앞으로 살고 싶은 공간도 이런 아름답고 비현실적인 공간이면 좋겠다.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창가에 책상을 놓고 그곳에서 글을 쓰고, 가만히 앉아 음악을 듣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이 조금씩 흘러넘치는 공간. 평화가 잔잔히 숨 쉬는 공간. 그런 공간을 꾸미고 싶다.

이런 공간에선 음악도 다르게 들린다. 나만을 위한 음악이 되어 음악이 머리나 귀가 아니라 온몸으로 들린다. 연주자가 바로 내 옆에서 나만을 위해 음악을 들려준다. 오직 나를 위해.

좋아하는 공간, 좋아하는 순간, 좋아하는 시간을 이렇게 하나씩 보물찾기 하듯 수집하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 24시간 영업중 바닷가 편의점 식당에서 공짜 김밥을 먹다

시간이 머무는 책방에서 오롯이 시간과 머물다 나왔다. 다시 걸을 시간이다. 한가롭게 걷다 보니 배가 고파진다. 몸은 참 정직하다. 거짓 없이 솔직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물론 세상 일과 바깥의 것에 너무 정신이 팔리면 자신의 몸이 하는 말에 무신경해져 건강을 잃기도 한다. 그래서 걷기가 필요하다. 걷다 보면 자신의 호흡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몸이 하는 말에 반응하게 된다. 걷기와 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나는 내 몸을 돌보고 내 몸과 대화할 수 있는 걷기라는 행위가 좋다.


마침 어제 숙소에 여행계획을 짜다 올레 3-B 코스 중간에 있는 '주어코지 국수창고'라는 식당을 발견해서 그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해산물 비빔국수와 보말김밥이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유리문에 '귤수확으로 영업을 잠시 쉽니다'라는 종이와 함께 귀여운 고양이만이 가게 안에 누워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야옹아, 배고픈데 문 좀 열어주면 안 될까?'

고양이는 실눈을 뜨고 이쪽을 몇 번 흘깃거리며 듣는 척을 하더니 이내 다시 잠의 세계로 건너가 버렸다.




주변의 식당을 검색해 봤지만 딱히 먹고 싶은 것이 없어 근처 편의점에 가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편의점이 있다. 참치김밥과 빵, 그리고 자몽주스를 골라 계산대로 갔다. 그런데 점원이 난감한 얼굴로 '김밥 유통기한이 오늘 아침 7시까지라 바코드 계산이 안된다며 다른 것을 골라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아있는 것들은 모두 고기가 들어간 것들. 그래서 점원에게 부탁을 드렸다. 친절한 점원 분은 그 김밥을 폐기로 등록하고 공짜로 주시며 대신 비밀로 해달라고 말했다.

'제가 여기 주민도 아니고, 이 사실을 이야기할 사람도 없어서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기쁘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편의점을 나왔다.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비록 식당 문은 닫았지만 자연은 언제든 열려있으니 다행이다. 맛있는 음식 대신 멋진 풍경을 얻었으니 감사하다. 다음에 또 이 올레길을 걸을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시간이 머무는 책방과 국수창고, 그리고 아름다운 바닷길. 다음에 다시 만나자.






# 신풍신천 바다목장길 - 몸에 새긴 풍경의 순간들

신흥포구를 지나 계속 길을 걷는다. 걷다 보면 한적하던 길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신풍신천 바다목장길 때문이다. 이곳은 겨울 제주의 특산물인 귤피를 말리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내가 갔을 때는 아직 귤피는 없고 초원만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래도 아름답다. 가슴이 뻥 뚫린다. 바다와 파도, 드넓은 목장초지가 어우러져 특별한 풍경을 자랑한다. 그곳에 앉아 한동안 넋을 놓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또 빛나는 순간을 하나 수집했다. 걸으며 수집한 순간들은 그대로 몸에 기록되어 평생을 함께 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것이 계기가 되어 불현듯 저장된 있던 그 기억이 되살아나 나도 모르게 미소 지을 때가 있다. 이곳의 풍경도 나에게 그런 경험을 선사해 주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이 순간이 애틋하면서 감사해진다.





# 내가 사랑했던 의자들에 대하여

신풍신천 바다목장길을 몸에 새기고, 다시 길을 나선다. 길을 걷다 보면 해신사라는 곳을 지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이번 여행길에서 가장 최고의 의자를 만났다. 최고의 의자란 길을 걷다 잠시 쉴 수 있는 의자 중 가장 편안하고 위치가 좋아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 있는 의자를 말한다. 그 의자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이 너무나 좋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기분이라면 과장일까.

어쨌든 그곳에서 나는 인생 최고의 의자를 만났다. 폭신폭신하고 아늑한 의자와 눈앞의 바다, 귤빛 햇살에 부서지는 먼지들, 파도에 넘실대는 선체들, 하늘에 넘실대는 구름들, 따뜻한 공기. 그리고 아주 어여쁜 고양이와 눈 마주친 10초간의 조우.

여행 중에 내가 쉬었던 그리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의자들 사진만 모아 따로 수집해보고 싶다. 그리고 그 사진들에 작은 이야기를 같이 기록해 전시회를 해보고 싶다. 그곳은 어디이고, 그곳에서 나는 어떤 풍경을 봤으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전시명은 <내가 사랑했던 의자들에 대하여>





# 소금막 해변 - 제주에서 행복해지는 10가지 방법

달콤했던 의자의 시간을 뒤로하고 소금막 해변으로 향했다. '시간이 머무는 책방'에서 얻은 보물지도에 의하면 '해 뜰 때 이곳에서 하는 또라클럽 아침운동'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어떤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이 보물지도에는 제주에서 행복해지는 10가지 방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일출 감상하기

2. 맑은 날 해변 카페에서 멍 때리기

3. 제주의 아름다운 숲 거닐기

4. SOUL FOOD 먹기

5. 소금막해변에 해 뜰 때 가서 또라클럽 아침운동 참가하기

6. 한라산 정상에 올라가 보기

7. 해안도로 스쿠터, 자전거 드라이빙

8. 제철에 핫스폿 가기

9. 해변에서 캠핑하기

10. 시간이 머무는 책방에서 '시간 멈춤' 경험하기


소금막 해변은 이름처럼 소금 같은 부드러운 모래가 펼쳐진 조그마한 해변이었다. 마치 영화 <안경>의 한 장면처럼 사람들이 모여 아침 체조를 할 것 같은 곳이다. 나중에 이 근처에 숙소를 잡고 나도 참여해 봐야지. 이곳에 또 와야 할 좋은 핑계가 생겼다.




소금막해변, 그리고 표선해수욕장을 거쳐 표선올레 안내소이자 3코스의 종점, 4코스의 시작점에 도착했다. 마지막 저녁 식사는 표선 칼국수의 보말죽을 먹으려고 했으나 이미 주문시간이 마감되어 당케올레국수에서 보말죽을 먹었다. 너무 맛있어서 입천장이 데는지도  모르고 폭풍흡입했다. 같이 나온 김치와 무장아찌도 일품. 제주에 오면 꼭 먹어줘야 하는 나의 두 번째 소울 푸드 보말죽. 아직 안 드셔 보셨다면 한번 드셔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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