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쉼터를 찾아서

<작은 집 이야기> 버지니아 리 버튼 지음

by 여행하는 그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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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여러 집을 거치며 살아왔다. 작은 동네의 가게 딸린 집에서 시작해 처음으로 이사 간 주공 아파트, 외풍이 엄청나게 추웠던 오래된 연립주택, 대학교 때 처음으로 독립해 살기 시작한 조그만 원룸, 불편해서 중간에 옮긴 또 다른 원룸, 또다시 옮긴 조그만 방 2개가 딸린 아파트, 지하철역과 직장에서 가까운 원룸들, 시골 마을 언덕의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리고 별이 보이는 오래된 1동짜리 원룸, 이제 막 신축된 초고층 아파트,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수도권 신도시의 아파트까지. 생각해 보니 참 많은 곳을 살아봤다. 누구는 이사 한 번 다니지 않고 한 집에 산다는데 사람마다 운명처럼 사주에라도 역마살이 있어 이사 총량이 있는 모양이다.


2023년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면서 또 집을 옮기게 되었다. 부동산에 가서 조건들을 이야기하고 스무 군데도 넘는 집들을 돌아봤다. 그리고 집이고 뭐고 다 싫어져버릴 정도로 진이 빠지고 머리까지 아프고, 내 몸 하나 뉘일 집 하나 찾는 게 이렇게나 힘든 일인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집 구하기에 진이 빠져 잠이 든 다음 날 이 그림책을 펼쳐 읽게 되었다. 그림책 <작은 집 이야기>는 사람의 이사 이야기가 아니라 작은 집의 이사 이야기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저 먼 시골 마을에 작은 집이 한 채 있었습니다. 아담하고 아름다운 집이었죠. 튼튼하게 잘 지은 집이었고요. 작은 집을 튼튼하게 지은 사람이 말했어요. "금과 은을 다 주어도 이 작은 집은 절대로 팔지 않겠어. 이 작은 집은 우리 손자의 손자, 그리고 그 손자의 손자가 여기서 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오래도록 남아 있을 거야"

- <작은 집 이야기> 버지니아 리 버튼 지음


그리고 그림책은 이 작은 집이 살던 아름다운 시골 언덕의 시간과 풍경, 시간의 따른 아름다운 사계절의 변화를 보여준다. 봄이 되면 남쪽에서 돌아온 울새가 울고, 개울에서는 꼬마들이 놀고, 여름에는 이파리 무성한 나무들과 하얀 데이지꽃들로 뒤덮이는 언덕과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를 본다. 가을에는 물들어가는 나뭇잎과 가을걷이를 보고 사과를 따는 것도 지켜본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작은 집이 살던 시골 마을은 더 이상 시골 마을이 아니게 된다. 밤에도 도시의 불빛이 꺼지지 않고 사람들은 모두들 바빠 보이고 모두들 허둥대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가 봄이고, 언제가 여름이고, 언제가 가을이고, 언제가 겨울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는 도시, 모두들 흘낏 눈 돌릴 새도 없이 뛰어만 다니느라 거기 작은 집이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는 도시, 밤에는 불빛이 너무 밝아 달도 별도 볼 수가 없는 곳. 그런 곳이 되어버린다. 더 이상 웃지 못하게 된 작은 집은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집 찾기에 지친 나는 이 그림책 속의 '작은 집'이 마치 나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집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집은 나에게 뭘까? 나에게 집은 직장에서의 삶을 off 하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우며 지극히 나다운 나로 돌아가는 곳이다.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며 사회적 가면이나 나 아닌 것들을 모두 벗어던지는 곳이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아름다운 것과 교감하는 곳이다.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몸에게 영양분과 에너지를 채우는 곳이다. 더러움을 씻어내고 말끔한 나로 돌아가는 곳이다. 하루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고요하게 잠들며 죽음과 태어남을 매일매일 경험하는 곳이다. 무엇보다 집은 세상과 연결되는 시간을 멈추고 나 자신과 연결되는 영혼의 쉼터이다.


작은 집이 자신이 원래 살던 데이지꽃 들판과 춤추는 사과나무가 있는 시골로 되돌아와 다시 온 세상이 조용하고 평화롭다고 말하듯이 나에게 집은 바깥세상이 어떠하든 집안에서의 영혼만큼은 조용하고 평화로워지는 곳이다. 창문을 열면 다른 집 벽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시원한 하늘과 나무들이 보였으면 좋겠다. 거실이 있어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풀어헤칠 수 있으면 좋겠다. 방은 청결하고 빛이 잘 들어 불을 켜지 않아도 환하게 생활하고 싶다. 벽지로 떨어지는 빛의 그림자를 따라가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있어도 평화롭게 해를 느낄 수 있는 집이면 좋겠다. 1층이 아니어서 여름에는 문을 활짝 열고 시원한 바람이 통하는 집이면 좋겠다. 주말에는 세탁기의 빨래를 햇볕에 보송하게 말리며 라디오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 다시 집을 보러 간다. 이번엔 꼭 내가 그리는 영혼의 쉼터를 운명처럼 만날 수 있기를 작은 집이 자신의 고향인 지붕 위의 별과 달이 빛나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골로 돌아와 행복한 미소를 지었듯이 나도 행복하게 그 집에서 잠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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