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이 그리울 때
모든 아이들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근 며칠 아이가 아팠다. 열감기에 가래가 끓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밥 먹고 나면 신이 나서 펄펄 뛰던 아이가 뛰지 않는다.
계속 안아달라고 팔을 벌린다. 몸이 힘든 것이다.
약을 주면 평소에는 몸부림을 치며 안 먹겠다고 도망가더니
오늘은 체념하고 입을 벌린다. 쓴 게 약인 줄 아나보다.
집에 와서도 계속 안아달라 하더니
잘 시간이 돼도 더 놀겠다고 아우성을 치던 놈이
집의 모든 불을 끄고 먼저 자자고 한다.
감기가 독하긴 독한 모양이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엄마라는 존재가 아이에게 이렇게 비중이 큰 줄 몰랐다.
나의 엄마는 늘 밖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일찌감치 체념했던 것 같다.
너무 어릴 때라 기억나지 않지만, 그 체념의 과정이 나에게 외로웠을 것 같다.
아이는 즐거워도, 슬퍼도, 아파도 엄마를 먼저 찾는다.
적어도 아이가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엄마에게 독립하기 전 까지는
엄마라는 사람이 아이에겐 우주만큼 넓고 큰 것 같다.
대학생 때 보육원에 봉사를 다녔다.
우리는 가기 전에 큰 마트에 들러 과자 꾸러미를 잔뜩 샀다.
도착하면 봉사자분이 3~5세 아이들이 가득 찬 방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아이들은 작은 둥지에 앉은 새 처럼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봉사자들이 한 명씩 바닥에 앉자마자 아이들이 달려와 안긴다.
한꺼번에 여러 명을 안고 있으면 좋겠지만, 품의 여력이 크지 않아서 한 명만 안을 수 있다.
안기는 데 성공한 아이는 이제 나머지 아이들을 경계한다.
"야 내가 먼저 앉았어! 오지 마! 저리 가!"
아이는 내 품을 파고든다. 처음 본 낯선 여자의 품.
마치 내 품을 벗어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꽈악 안긴다.
봉사자들에게 주어진 50분의 시간 동안 아이는 1초의 시간도 아까워라 폭 안긴다.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엄마가 아니란 것쯤은 진작에 안다.
사람의 품이, 사람의 온기가 너무도 그리운 것이다.
아이는 내 품에서 자는 건 아니지만 눈을 감고 온전히 품을 느낀다.
안기기에 실패한 아이들은 화도 내지 않고 다시 창 밖을 멍하니 본다.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상할 자신이 없어졌다.
우리가 사 온 과자는 구석에 아무렇게나 내팽겨져있다.
아무도 과자를 먹지 않았다.
과자나 멋진 장난감이 아니라
포근하고 따신 품을 원하는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외롭지 않게, 누군가를 멍하니 기다리지 않게
모두가 품 속에서 따듯하기를 기도한다.
나 또한 언제든 품을 내어줄 수 있는 어미가 되도록 더 노력해야겠다.
모든 부모가 공감하겠지만
때로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아이가 부모를 사랑한다.
부모가 안아준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들이 안아주는 것인데.
어떨 때는 마냥 강한 힘을 가지고 싶다가도
어떨 때는 한없이 약해져 나 조차도 안아줄 수 없다.
우리의 변화하는 성장이 결국 불안의 근원일까.
끝내 계속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
아이를 안고 안고, 나의 온기가 사라지기 직전까지 또 안고
그렇게 우리는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