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중 모체와 태아는 탯줄로 연결되어 있다.
탯줄을 통해 아이는 엄마의 몸에서 양분을 얻어 자라난다.
아이가 태어나고 탯줄은 잘라진다. 끊어진다.
엄마의 몸과 아이의 몸이 분리된다.
분명 그것이 사실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탯줄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신기하게도 아이와 물리적으로 거리가 멀어지면
내 몸 어딘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
지갑이나 휴대폰을 잃어버렸을 때의 심장 통증보다 상위 단계라고 할까.
당연히 부모니까 아이를 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데 그 말은 조금 부족하다.
표현하기 어렵지만
정말 내 창자 하나를 집에 두고 온 느낌이다.
어릴 때 친구가 말했다.
"너 남자 거기를 때리면 왜 아픈 줄 알아?"
"왜?"
"왜냐하면 그 기관은 원래 내장기관인데, 어떤 설계에 의해서 밖에 나와있기 때문이야.
너 내장을 발로 차면 아프겠어 안 아프겠어?"
"아프겠... 지?"
"그래. 그러니까 조심해."
의학적 지식은 없었지만 그의 설명은 나의 빠른 이해를 도왔다.
연약한 존재는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를 낳고 그의 말이 떠올랐다.
아이도 원래는 내 내장에 있던 생물이라서 그렇게 소중한가.
아이가 다치면 가슴이 찢어지고 화가 나고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넋이 나가서
어떻게든 아기에게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게 본능인지 뭔지 모르겠다.
아이가 세 돌 되었을 때
외출하려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아기가 후다닥 뛰어들어 탔다.
나도 서둘러 유모차를 밀고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순간 문이 황급히 닫혔다.
그것은 저절로 닫힌 게 아니라 누군가 안에서 문 닫힘 버튼을 여러 번 눌렀을 때의 속도이다.
아이가 혼자 탔는데 왜 문을 닫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멘붕이 왔다.
닫힌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몸이 굳어버렸다.
휴대폰으로 경비실에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서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상황을 설명하자 남편은 "에이씨. 나 지금 회식하는데 뭐하는 짓이야."라고 했다.
내가 쓸데없는 전화를 했구나 자책했다.
숨이 막히고 식은땀이 줄줄줄 났다.
아이는 어느 층으로 간 걸까?
나는 지금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나? 위로 가야 하나, 아래로 가야 하나?
순간 비상계단이 보였다.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면 또다시 단절되는 것 같아 두려워서
계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계단에 들어서서 위로 뛰어야 할지, 아래로 뛰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내 아이의 울음소리였다.
아니, 내 아이의 소리여야만 했다.
소리를 쫓아 무작정 달렸다.
청력에 부스터가 있다면 최대치로 올리고 싶었다.
뛰면 뛸수록 아이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내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층의 비상구를 열었다.
눈앞에 아이가 있었다.
한 집에서 밖이 너무 시끄러우니까 나와 보신 것 같았다.
그 집의 현관은 열려있고, 아이는 울면서도 그 아주머니 옷 깃을 잡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끌고 있었다.
아이는 날 보고 울음을 뚝 그쳤다.
"아기 어머니세요? 아니 아기가 왜..."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분은 나에게 더 많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허옇게 뜬 내 얼굴을 보고 믿어주신 것 같았다.
나는 아이를 들쳐 안고 다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층수 안내판을 보니 내가 15층을 뛰어 올라왔다는 걸 알았다.
아이는 그날 이후로 먼저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는다.
아이가 청소년기가 되고, 성인이 되면 독립해야 하고
해외도 나갈 수 있고, 장가도 갈 것이다.
보내줄 때 쿨하게 보내주는 부모가 좋은 부모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탯줄은 또한 남아 있을 테지만 말이다.
의사 선생님이 일차로 탯줄을 끊어 주셨지만
제2의 탯줄은 엄마와 아기가 차근차근 분리해 나가는 것 같다.
서로가 깊이 교감하고, 정신적인 양분을 충분히 흡수했을 때에
탯줄은 그 아이의 뿌리가 되어 미래를 지탱한다.
이러나저러나 엄마는 참 아이에게 줄 게 많지만,
그 시간을 가능케 하는 것 또한 아이가 엄마에게 주는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