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뮤어 트레일 - Day 8
2016년 6월 10일 Day 8.
출발: Arrowhead Lake
도착: Pinchot Pass 전 어딘가
총 거리: 14.97 km
누적 거리: 118.61 km
태양에 대한 간절함이 드디어 시작됐다.
일기 중 발췌
I know I would like to give up and just go to Hawaii but keep this in mind. This great journey will bring great rewards in the form of
1. achievement
2. confidence
3. experience
4. great legs
5. being appreciative of civilization.
지금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그냥 하와이에 가서 딩가딩가 놀고 싶지만 그래도 명심했음 좋겠다. 이 엄청난 여정이 내게 엄청난 보상을 가져다줄 것이다. 성취감, 자신감, 경험, 튼튼한 다리, 그리고 문명에 대한 감사함이라는 보상을 가져다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사슴이 보였다. 역시 온갖 군데가 다 축축했다. 거의 매일 아침 새벽이슬에 텐트는 늘 젖어 있는데, 이날은 처음으로 날씨가 좀 꾸리꾸리 하고 구름이 껴서 더더욱 텐트 주변과 침낭이 젖었다. 꽤 추웠다. 늘 아침마다 고민했던 것 같다. 맘 같아서는 해 다 뜰 때까지 기다렸다가 텐트랑 침낭이랑 옷가지를 좀 바싹 말리고 나서 배낭에 쑤셔 넣고 싶지만, 그때까지 기다리면 출발이 늦어지므로 보통은 젖은 것들을 배낭에 쑤셔 넣는다. 으으~ 찜찜해.
이 날은 건널 고개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00 미터를 내려갔다가 다시 1200 미터를 올라가야 했다. 아마 고개 넘는 날은 더 많이 오르락내리락했겠네? 고개를 안 넘었더니 사진을 찍은 게 별로 없다.
엄훠엄훠! 어떤 천사가 여기다 다리를 지어놨다. 오마이갓 땡큐베리마치ㅠㅠ 산행을 시작하고 8일 만에 처음으로 문명을 만났다. 신발 안 벗어도 되고 한 30분 걸려서 건널 것을 그냥 저벅저벅 걸어서 건널 수 있었다. 그렇다. 역시 문명은 위대한 것이다. 다리 하나로 이렇게 나의 하루가 편리해지다 정말 감동적이었다.
자연에 있다 보면 자연의 아름다움도 느끼지만 문명에 대한 위대함과 감사함도 생긴다. 장기간 하이킹을 시작하기 전에는 북한산 성벽이나 만리장성을 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애개 저렇게 높지도 않은 게 무슨 성벽 역할을 한다고? 너무 허술해 보이고 높지도 않은데 저게 뭐 대단하다고? 하지만 산을 타다 보면 트레일에 큰 나무가 하나 넘어져 있어도 건너는 데 한참 애를 먹는다. 일단 무거운 배낭을 벗어 반대쪽으로 던지고 (던지기도 힘듦), 넘어진 나무에 폴짝 상체를 얹고 나무를 타듯이 다리를 올려서 나무 위에 올라간다. 나무 위에 올라가면 내려가는 것도 일이다. 최대한 대롱대롱 매달려서 바닥과의 거리를 최소화하고 뛰어내린다. 근데 생각해보세요. 그 옛날 그 무거운 창이든 칼이든 대포를 들고 저 쓰러진 나무보다도 더 높은 돌벽을 만난다고. 그럼 정말이지 적이 막아질 수밖에 없겠더라. 그 당시 산 중턱에 벽을 짓는다는 건 어마어마한 발명품이었을 거다. 벽 이외에 인류의 가장 큰 발명품은 지붕, 벽, 의자다 (내 의견).
점심 먹을 때 코튼볼하고 나이트캡을 다시 만났다. 이들은 PCT 하면서 사귀게 된 사이인데 이미 1000킬로미터가량을 같이 걸어왔다. 둘 다 넘 스윗하고 귀여웠다. 앞으로 이 커플과는 거의 매일 하루에 여러 번씩 만나게 된다. 서로 일어나는 시간, 걷는 속도, 점심 먹는 시간과 장소가 다르기 때문에, 어떨 때는 내가 먼저 걷고 또 어떨 때는 그들이 먼저 걸었다. 이를 flip-flop한다고 한다. 나는 코튼볼, 나이트캡, 스페이스 카우보이와 flip-flop을 많이 했다.
보통은 점심을 먹으며 쉬는 시간에 배낭을 탈탈 털어서 젖은 것들을 햇빛에 바싹 말린다. 대부분의 PCT 하이커들도 이렇게 한다. 정말 다행히 햇빛이 나서 침낭과 텐트를 말릴 수 있었다. 보송보송해진 양말과 신발을 신으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예전에도 썼지만 hiking existential moment는 여전히 매일 들었다. Hiking existential moment란 "도대체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왜 한다고 했지? 내가 지금 이걸 즐기고는 있는 건가?" 하는 하이킹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순간을 말한다. 걷는 내내 도대체 내가 뭘 위해서 이걸 하고 있지?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이지 하산하는 길이 옆에 있었다면 나는 8일째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다. 그래서 말인데 PCT 하이커들이 참 대단하다. 1주일에 한 번씩 하산을 하면 얼마다 다시 산으로 돌아가기가 싫을까? 나라면 한번 하산하고 나면 다시 돌아가질 않을 것 같은데.
오늘 계획했던 장소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이날 텐트 치기 좀 전에 Joe (옛날에 주한 미군이었던 아저씨)를 두 번째로 만났다. Joe는 키어싸지 패스를 내려가서 타운에서 아예 1박을 하고 다시 올라온 거였다. 근데 나랑 같은 곳에서 만나다니 속도 무엇...? 그동안 나는 이틀을 죙일 걸었는데. 아저씨는 여기서 더 가서 텐트를 친다고 했다.
산에서 내려오고 나서 아저씨랑 페북 친구를 맺었는데 결국 PCT 완주했다. 아저씨 페북 사진 보니까 PCT 사진 전과 동일 인물인지 못 알아보겠더라. 산에서의 아저씨는 완전 홀쭉하고 수염 덥수룩하고 그랬는데, 그 전 사진들은 다 전래 덩치 크고 건장해 보이고 깔끔해서 매치가 안됐다. 뭐 나도 그랬겠지.
이날 내가 텐트 친 장소는 내일 건널 Pinchot Pass 직전이다. 아무래도 고도가 다기 높아지다 보니 여기저기 눈밭이다. 나머지는 눈이 녹은 자리라 무슨 습지처럼 축축했다. 그나마 겨우 마른땅을 찾았는데 경사가 좀 져서 자는 내내 마치 서서 자는 느낌이었다. 웃기지 않나요? 하루 종일 진짜 키가 줄어들 것 같이 무거운 배낭 메고 하루 종일 오르막을 걸었는데, 고작 조그만 경사 때문에 잠을 설친다는 게. 나참나 전 전생에 공주였나 봐.
텐트 친 자리 앞에 이렇게 고요한 웅덩이가 있었다. 물 자체가 깨끗하진 않았다. 아마 눈이 많이 녹아서 급 생긴 웅덩이인가 보다. 지도에도 호수라고 표시가 안 돼 있었다. 바람도 잔잔해서 호수에 산이 다 거울처럼 비쳤다.
밥 먹고 텐트 안에서 해지는 걸 보면서 찍어봤다. 참으로 고요했는데 그게 폭풍전야였다. 이때 봤던 그 해가 당분간 마지막 해였으리라 그때는 몰랐다. 앞으로 어떤 날씨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그때는 정말 몰랐다. 앞으로 일주일 가량 내 부츠, 양말, 텐트, 침낭, 옷은 마를 날이 없었다. 따흑.
이렇게 8일째가 끝났다.
이거는 JMT 고도 그래프인데, 동그라미 친 부분이 지금까지 온 길이다. 나는 북향을 선택했기 때문에, 고도 그래프의 맨 오른쪽에서 시작해서 왼쪽으로 전진하는 식이다. 분명히 8일 동안 꽤 걸었다고 (누적 거리가 약 118킬로미터) 생각했는데, 저 그래프를 보니 이제 겨우 한 1/3 왔다. 갈 길이 멀다.
확대해보면 뾰족뾰족한 것이 내가 건넜던 고개 (pass)들이다. 높이는 피트로 표시가 돼 있는데 대충 환산하자면 10,000 피트 = 3000 미터 정도로 보면 된다. 보다시피 가장 높은 곳이 휘트니 산이고, 그다음이 포레스터 패스다. 이날 텐트를 친 곳은 아마 12,000 피트 (3600미터) 정도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