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고생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것.

존 뮤어 트레일 - Day 9

by Noelles Adventure

2016년 6월 11일 Day 9.



출발: Pinchot Pass 전 어딘가

도착: Mather Pass 지나서 어딘가

총 거리: 25.43 km

누적 거리: 144.04 km






이 날은 내 JMT의 일종의 전환점이었다. 하루에 패스 2개를 넘고 25킬로를 걸을 수 있다는 게 스스로 증명이 된 셈이니까. 약간 자신감도 붙고 실제로 다리도 정말 튼실해져서, 이 날 이후로는 오르막을 막 한 번도 안 쉬고 쑥쑥 올라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 날 개고생을 해야 한다.



PCT 애들이 처음에 얘기해줬는데, 원래 처음 1시간이 힘들고, 그게 지나면 처음 하루가 힘들고, 또 그게 지나고 나면 처음 1주일이 힘들다고요. 그렇지만 그 1주일도 다 지나고 나면 나머지는 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된다고. 난 이 날이 9일째였는데 정말 신기하게 이 날을 이후로 정말이지 걷는 게 덜 힘들었다. 물론 추위와 젖은 텐트 이런 건 힘들었는데 적어도 오르막은 안 힘들었다. 그게 어디야.







996118485BB6A95A3582AE 핀쵸 패스 (Pinchot Pass) 올라가는 길.



지금까지는 하루에 약 16킬로 (약 10마일) 안팎으로만 걸었었는데 이 날은 무려 25킬로나 걸어야 했다. 원래는 이날 아침에 핀쵸 패스 (Pinchot Pass)를 넘고, 그다음 날 넘을 마터 패스 (Mather Pass) 직전에 텐트를 칠 예정이었다. 그러면 약 16킬로 정도가 딱 맞는다. 그런데 이 날은 아침에 핀쵸 패스를 넘고 저녁때 마터 패스까지 넘게 되었다. 도대체 왜? 내 자율의지로 체력이 뒷받침이 돼서 신나게 이 거리를 룰루랄라 걸었으면 참 좋았으련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게 25킬로를 걸어야 했다.


7시 반부터 걸었는데, 아침부터 안개가 아주 자욱하고 눈비가 내리고 난리가 났다. 비를 맞으며 텐트를 걷었다. 텐트는 비에 완전히 젖었지만 별도리 없이 배낭에 쑤셔 넣어야 한다. 이렇게 배낭에 넣으면, 배낭 안에 있는 침낭도 젖게 된다. 침낭이 드라이 백에 들어있어도 거의 10시간을 걷다 보면 젖게 되더라. 으으 너무 싫다. 안 그래도 추운데 젖은 침낭이라니.




99A221485BB6A9572B399B 으~ 보기만 해도 춥다.



오들오들 너무 추웠다. 장갑도 물론 다 젖어서 손이 끊어질 것 같이 시렸다. 부츠랑 양말도 물론 다 젖어서, 걸을 때마다 물이 찍-찍- 왔다. 오르막은 끝이 없고. 나름 내 등산화는 겨울용에 방수도 100프로 되는 고어텍스인데 이런 날씨가 되면 그런 건 상관이 없다. 발이 정말 시렸다. 발가락이 너무 추워서 발가락이 잘려 나갈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끔 진짜 이러다가 내 발가락이 동상 걸려서 나중에 잘라야 하면 어쩌지 하는 별 걱정이 다 들었다. 물론 이 날만 발이 얼어붙은 건 아니지만 이날은 특히 더 추웠다.



993DCE485BB6A96136C133 안개가 끼고 눈이 온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눈 비탈과 오르막을 걷는다. 도대체 패스 꼭대기는 언제쯤 나오는 걸까. 처음엔 눈비로 시작하다가 점점 눈으로 바뀌었다. 일기를 보니까 눈이 와서 세상이 아주 조용하고 고요했다고 써 있다.

그러게요. 생각해보니 그때 정말 고요했던 듯하다. 안개도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는데, 앞에 뭐가 있는 안 보일 정도였다.




99FDAB485BB6A95E300B86 핀쵸 패스에 가까워졌다.



꺄 드디어 패스 꼭대기가 보인다! 저기 패스 꼭대기에 사람들이 좀 있는 게 보였다. 아마 눈이랑 안개가 조금 걷혔나 보다. 이날은 코튼볼하고 나이트캡을 거의 2-3시간마다 만났던 거 같다. 핀쵸 패스 (Pinchot Pass) 꼭대기에 드디어 올라왔을 때는 오전 9시 반 정도였다. 2시간 정도 걸렸다. 바람도 많이 불고 춥고 해서 휴식을 취하기보다는 부지런히 계속 움직이기로 했다. 올라왔으니 이제 또 한참을 내려가야죠. 아자아자 그래도 벌써 오전에 Pass 하나 지났으니 오 잘하고 있는데? 싶으면서 기분이 좋았었다. 물론 Pinchot Pass가 다른 고개들에 비해서 좀 낮기도 했었지만 그래도 뭔가 이제 고개를 좀 빠른 속도로 거뜬히(?) 넘을 수 있게 됐다는 거에 매우 감사하고 행복하고 뿌듯하고 그랬다.



오늘 저녁에 있을 일은 꿈에도 모른 채... 그때는 기분이 좋았었다.




99CCA14D5BB6A96D371F60 핀쵸 패스를 지나 내려가는 길.


내려가는 것도 속도가 많이 빨라졌다. 구름이 정말 엄청나게 빨리 움직였다. 날씨가 5분마다 휙휙 바뀌더라. 그리고 햇빛이 안 나니까 눈이 안 녹아서 오후가 돼도 발이 잘 안 빠져서 나름 좋은 점도 있었다. 하지만 좋은 점이 어디 눈에 보이나요?ㅋㅋ 당장 춥고 발 시리고 안개껴서 무섭고 우박 맞느라 머리 아픈 것만 신경 쓰이지.





99C3E64D5BB6A9703105A5 뒤돌아서 Pinchot Pass에서 내려온 길을 올려다보았다. 크흡 많이 내려왔다. 저 지긋지긋한 눈.




몇 시간이 걸려서 다 내려오고 나서 평지를 좀 걷다가, 곧 마터 패스 (Mather Pass)를 향하는 오르막이 다시 시작됐다. 일기를 보니까 며칠 전에 봤던 아름다운 시에라 웨이브 (Sierra Wave)가 마치 이런 우중충하고 겁나는 날씨의 시작을 알리는 전초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써있다. 햇빛이 조금이라도 나면 점심때나 쉬는 시간에 침낭이랑 텐트를 좀 펴서 말릴 텐데, 도저히 그럴만한 날씨가 아니었다. 하루 종일 눈, 비, 우박이 번갈아가면서 쏟아졌다.



춥고 지치니까 이때 이후로는 저녁때까지 찍은 사진도 없다.





994A234D5BB6A975027763 원래 여기서까지만 가려고 했다.




두둥. 여기가 어디냐면요. 내가 원래 텐트 치려고 계획했던 장소인, 마터 패스 (Mather Pass) 오르기 직전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평지는 온통 눈으로 덮여있고 나머지는 돌이 너무 많거나 아니면 경사가 너무 심해서 도저히 텐트를 칠만한 곳이 없었다. 헐... 이를 어째? 이때 시각은 이미 오후 6시 40분이었다. 여기 텐트칠 자리가 없다 함은 3700 미터인 마터 패스를 오늘 넘어가야 한다는 소리다. 참고로 마터 패스는 포레스터 패스 다음으로 가장 높은 고개이다. 손이며 발이며 꽝꽝 얼었고, 너무 추워서 입술이 파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하루 종일 이미 15km 정도나 걸어와서 지쳤는데. 안 그래도 마터 패스도 가파르고 고도가 높아서 익히 악명이 높은 고개인데. 게다가 고개만 넘는다고 끝이 아니다. 보통 고개를 넘고 적어도 2-3시간은 더 내려가야지만 겨우 평지 비스무리한 게 나오고, 겨우 눈이 없는 맨땅이 나와서 텐트 칠만한 자리가 나온다. 지금 벌써 저녁 6시 반이 넘었는데, 앞으로 최.소.한. 오르막 2시간 + 내리막 2시간을 더 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걸 지금 해야 한다니.



나는 이때 진심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악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왜 내가 이걸 하겠다고 자처해서ㅠㅠ 이렇게 힘들고 무섭고 진짜 이러다가 동상 걸려서 죽을 거 같은 날씨에 이런 걸 해야 하냐고 꺼이꺼이. 근데 뭐 내가 힘이 있나^^ 어차피 여기서 잘 순 없고 빨리 상황을 인식하고 앞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다.



If you're going through hell, keep going.

윈스턴 처칠의 말이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때는 저어엉말 무서웠다. JMT 통 털어서 가장 무섭고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999D1B415BB912DB297937 마터 패스 꼭대기.



좀 더 걸으니 마터 패스 꼭대기가 보였다. 이때 저 꼭대기에 사람이 몇 명이 보였다. 그리고 왼쪽으로 보이는 지그재그 오르막길 (switch back)에도 사람이 몇 명 있었다! 누군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일단 저기에 사람이 있다는 거 자체만으로도 왜 이렇게 위로가 되던지. 내가 저 사람들과 1-2시간 정도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이 날씨에 이런 상황에 울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나 하나가 아닐 거라는 게 꽤 위로가 됐다.



바들바들 떨면서 꽝꽝 얼어있는 트레일 바를 막 깨물어 먹었다. 솔직히 트레일 바와 초코바는 하도 많이 먹어서 단것이 땡기지도 않는데 생존을 위해 아그작아그작 먹고 힘을 내서 오르막을 올랐다. 설탕 부스터여 작동하라!




99F9C34D5BB6A97A06AEE0 안개가 자욱.


나 참나 그렇게 자연을 두려워하고 오돌거리면서 떤 거 치고는 사진 많이도 찍었다. 올라가는 도중에 안개가 더 자욱해졌다. 올라온 길을 되돌아보니 진심 아무것도 안 보였다.








9941BA475BB6A97E011FB9 마터 패스 올라가는 길



이때부터 우박이 또 내리기 시작했던 걸로 기억한다. 우박이 막 엄청 크고 무거운 건 아니었는데, 계속 머리랑 볼을 때려서 아프다. 안 그래도 찬바람을 하루 종일 맞아서 볼이 땡땡하게 아픈데 우박이 내리니 더 아프다. 정말 내가 여기를 빨리 걸어 올라가지 않으면 나는 동상 걸리겠다는 심정으로 걸었다. 퐈이야! 역시 숨도 차고 힘들었지만 아까 먹은 트레일 바가 열일하는지, 아니면 그래도 나름 이제 trail leg가 쪼오오금 생겼는지, 예전 같았으면 한 10번은 쉬어서 갔을법한 오르막을 한 2-3번만 쉬고 계속 걸어 올라갔다.








99E7EE475BB6A98232A44E 마터 패스 정상


꺄! 정확히 2시간 걸려서 저녁 8시 반에 정상에 도착했다. 도착하고 보니 스페이스 카우보이, 코튼볼, 나이트캡이 이제 슬슬 내려가려고 했다. 참고로 이 셋은 휘트니 헛에서 처음 만났었는데 여기서 또 다 같이 만나니 반가웠다. 얘네들은 뭐 날씨가 이래도 별로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난 여기서 또 트레일 바 하나를 먹고 쉬지 않고 바로 내려갔다. 왜냐면 앞서 간 스페이스 카우보이, 코튼볼, 나이트캡이랑 거리가 멀어지면 넘나 넘나 넘나 무서울 거 같았다. 나 두고 멀리 가지 망ㅠㅠ 거의 뛰어 내려가듯이 얘네들 쫓아서 갔다.







9977684E5BB915712C7A49 다른 하이커를 보니 그나마 마음이 누그러짐.


동그라미는 코튼볼하고 나이트캡이다. 벌써 저 멀리 갔다. 내리막을 한참 내려오다 보니까 저 오른쪽 멀리 나무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저기까지 가야 그나마 눈이 없는 곳이 나타난단 얘기다. (근데 막상 내려가 보니 저기는 도저히 경사가 심해서 텐트를 못 치고 저기서 더 내려가서 텐트를 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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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나무들이 점점 가까워지니까 힘이 많이 났다. 일단 마터 패스를 무사히 넘었다는 것에 무서움은 많이 사라졌다. 그리고 먹구름이었던 날씨도 약간 나아지기 시작했다. 앞에 그래도 사람 몇 명이 있으니까 위로가 됐다.



사실 이런 날씨에서는 사람이 몇 명이 있다한들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들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사람이 있다고 해서 대신 내 길을 걸어줄 것도 아니고,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내 짐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갑자기 오두막을 지어 줄 것도 아니고, 갑자기 불을 피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참고로 불은 3000미터 이하에서만 피울 수 있다.) 내 발을 녹여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젖은 텐트와 침낭을 말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상황은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데, 그래도 이런 상황을 나름 잘 걸어 나가는 사람이 나 말고도 있다는 게 위로가 됐다.



사진에 사람은 스페이스 카우보이인데, 내 또래 아들이 있는 나이 많은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PCT 하면서 발목을 한번 접질렸다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발 빠지고 미끄러운 내리막길에서는 속도가 잘 안 난다고 했는데, 정말이었다. 나도 상당히 느린 편인데, 아저씨는 한발 한발 신중하게 디뎌야 했으니까 더 느렸다. 결국 아저씨는 나보다 더 늦게 내려오게 됐다.







990D6B455BB6A99334AC46 글리세이딩




끊임없는 내리막. 평지는 언제쯤 나올까? 무작정 걷고 있는데 글리세이팅 할만한 곳이 나왔다. 하하 그 와중에 글리세이딩도 했다. 이런 거 나오면 그래도 좀 신난다. 근데 문제는 엉덩이가 다 젖어서, 하고 나면 엉덩이가 얼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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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다 내려오니까 구름 걷힌다. 아까 정상에서 봤던 나무숲을 한참 지나 정신없이 내려가다 보니 갑자기 나무 밑에 텐트 한 2-3개가 보였다. 악 난 더 이상은 못가! 여기서 자야겠어! 하는 심정으로, 혹시 어디 평평하게 마른자리 없나를 매의 눈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이때가 아마 밤 10시 쯤 됐을거다.


이때 Joe (옛날 주한미군 아저씨)를 마지막으로 만나게 됐다. 아저씨가 거기서 카우보이 캠프 (텐트 없이 그냥 침낭만 펴 놓고 자는 거. 아저씨 침낭은 방수된다)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아저씨가 일로 와보라며 저 나무 밑에 마른자리가 있다고 알려줬다. 감동ㅠㅠ 아저씨 땡큐베리마치ㅠㅠ 그다음 날 아침 아저씨는 새벽같이 출발해서 그 뒤로는 한 번도 못 보게 됐다.


Joe가 소개해준 자리는 그나마 비바람 하고 눈으로부터 좀 보호가 되는 그런 자리였다. 나무 밑에다가 정신없이 텐트 치고 보니, 주변에 물을 뜰 데가 없었다. 그냥 눈밭. 따뜻하게 물 끓여서 밥 먹고 싶은데. 생각해보니 아까 마터 패스 넘기 전에 물을 정수해다가 2리터 꽉 채워서 담았는데, 그게 남았길래 그걸로 일단 전투식량을 빨리 해 먹었고 대충 이닦았다. 드디어 침낭으로 들어갔다. 그냥 자고 싶었지만 그래도 일기는 써야지 싶어서 썼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잘한 일이다. 아 너무나 고단한 하루였다.



거의 자정이 다 돼서야 아홉번째 날을 마감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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