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 실망의 담금질 후에 도달할 수 있는 곳.

존 뮤어 트레일 - Day 11

by Noelles Adventure

2016년 6월 13일 Day 11.



출발: Bishop Pass Junction Big Pete Meadow 전

도착: Evolution Basin

총 거리: 21.24 km

누적 거리: 184.91 km






원래 3주를 계획하고 왔었는데 오늘이 11일째니까 날짜상으로 따지면 반 정도 왔다. 하지만 거리 상으로는 아직 반을 못 왔다. 마터 패스를 건넌 이후로 점점 trail legs가 생겨서 하루에 13-15 마일 (20-24킬로 정도)은 껌으로 걸을 수 있게 됐다. 처음에는 하루에 12킬로 걷고 나면 뻗었는데. 이 정도 발전했다니 스스로가 뿌듯하고 감격스럽고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아침부터 비가 계속 내리다가 언제부터인가 해가 나기 시작했다. 야호야호! 정말이지 멈춰서 짐 다 풀어놓고 침낭이며 텐트며 (특히 물 찍-찍- 나오는 내 부츠) 바싹 말리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으므로 그냥 젖은 채로 계속 걸었다.





락코와 니나와 다시 만난 길.



오늘도 아름다운 산은 아름다웠다. 더 아름다웠던 건 어제 내게 라이터를 적선해준 락코와 니나가 오늘도 역시 내 트레일 에인절을 해줬기 때문이다. 나는 양말 1켤레는 신고 밤에 잘 때 신는 양말 1켤레만 가지고 갔는데, 밤에 신는 양말이 너무 젖었길래 그거 말린다고 배낭에 옷핀으로 고정시켜 놨었다. 근데 가다가 보니 한 짝이 없어진 거다. 헐... 이러면 밤에 발 동상 걸릴 텐데 어쩌지? 큰일 났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긴 죽어도 싫고 그렇다고 걸을 때 신는 양말은 밤에 신기엔 너무 축축이 젖어있을 거고. 꺼이꺼이. 굉장히 실망해서 걷고 있었는데 한 30분 지났을까 어제 만난 락코와 니나가 빠른 속도로 나를 따라잡았다. 아마 내가 걔네보다 아침 일찍 출발했나 보다.



그들이 날 보더니 "혹시 이거 너 양말이니?" 하면서 내 양말을 들고 온 거다. 세상에 아니 이걸 어떻게 어디서 찾아서 누구 건 줄 알고 이렇게 가져다준 거지? 감동감동. 아니 누가 어떻게 흘리고 간지도 모르는 양말을

이 천사들이 어찌 알고 내게 가져다줬단 말인가! 그들은 어차피 PCT 하이커들은 다 같은 방향으로 걸으니까, 가다가 분명히 양말 잃어버린 사람을 만날 거 같아서 들고 왔다고 한다. 떨어져 있는 양말 하나 내버려 둔다고 해서 자기들이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본인들의 무거운 짐에 누군지도 모르는 양말까지 챙겨서 왔다.



게다가 이 날은 락코의 생일이었다. 진짜 뭐 해줄 것도 없고 너무 고마워서 같이 생일 축하한다고 안아주고 빠이빠이 했다. 이 둘은 속도가 나보다 훨 빨라서 오늘 가는 내내 저~ 멀리 내 앞에 보였다.







오늘 건널 고개는 뮤어 패스 (Muir Pass)라는 고개다. 내가 걷는 트레일이 존 뮤어 (John Muir)라는 사람이 개척한 루트인데, 그 사람 이름을 따서 Muir 고개라고 지었다. 뮤어 패스는 글렌 패스랑 비슷한 높이로 3700미터 정도 된다. 역시나 고도가 높아질수록 눈이 많아지고 나무는 거의 사라진다. 눈에 발이 푹푹 빠졌다. 겨우 말린 부츠랑 양말이 도로 다 젖었다.




헬렌 레이크 (Helen Lake)



이제 고도가 점점 높아지는 게 느껴진다. 나무가 거의 없어지고 점점 눈밭의 세계로. 여기가 아마 Helen Lake 였던 거 같다. 존 뮤어의 딸 이름이 헬렌이라서 딸 이름 따다가 호수에 이름 붙였다고 했다. 책에서는 뮤어 패스 지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있는 호수가 Helen Lake라고 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저 화살표 부분이 뮤어 패스인 줄 알았다. 호우~ 금방 가겠는데? 이런 마음으로 걸었지만 완전 틀렸다. 일단 방향도 저기가 아니었다. 이때부터였을까요. 뮤어 패스 가는 길은 진짜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분명히 저기까지 다서 코너를 샥- 돌면 고개가 나올 거 같은데. 분명히 많이 걸어온 거 같은데. 아무리 가도 뮤어 패스는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이제 trail legs가 생겼다고 우쭐한 나는 여기서 큰 우를 범하게 된다. 지금까지 패스도 많이 지나왔겠다 여기는 훌쩍 넘을 수 있겠지? 하지만 오늘 배운 건 "Don't underestimate the pass"이다. 마치 스타워즈에서 다쓰베이더가 한 말처럼.


이날 일기엔 이렇게 써 있다.

I should never underestimate a pass.
It was long, tiring, and really t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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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끊임없이 이어지는 눈길. 이미 낮이라서 발은 더 푹푹 빠지고, 속도는 더 줄었다. 다행히 햇볕에 춥진 않았지만 점점 지쳐갔다. 완만했던 경사가 점점 가팔라진다! 헐 이제 정말 뮤어 패스에 가까이 왔다는 말인가!? 두근두근 기대를 했다.






여기서 두 시간을 더 가야 했다.


그랬을 리가 없었다. 기대하고 실망하고. 더 한참을 가야 했다. 아이폰에 찍힌 사진 시간을 보면 이 뒤로 오르막을 2시간을 더 올라갔더라고요.














너무 일찍부터 막 "올~ 다 온 거 아냐?"이렇게 김칫국 마시다가 2시간을 더 올라가야 했으니 짜증이 좀 났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넓게 펼쳐진 눈밭이 예쁘긴 정말 예뻤다. 눈이 덮여있으니 더 조용했다. 근데도 짜증이 나는 건 순전히 내 탓이다. 그러길래 누가 기대를 하래. 뮤어 패스를 기대했다가 실망했다가 계속 담금질당했다.







이런 담금질을 한 6번은 했을까? 마음속에선 또다시 "저기만 지나면 뮤어 패스 아냐?"라는 마음이 막 스멀스멀 기어올라왔으나, 또 기대했다가 아니면 너무 실망하고 더 기운 빠질까 봐 이제서야 "아냐 저기가 아니라 더 가야 할 거야" 이런 맘을 먹고 가기로 했다.



머피의 법칙 오예 오예! 저기 꼭대기가 뮤어 패스가 맞았다. 이제 겨우 마음을 내려놓을랑 하니까 패스가 뿅 나타났다. 앞서 있던 락코와 니나가 다 왔으니 힘내라고 응원까지 해줬다. 역시 에인절! 힘을 내서 막판 오르막을 올랐다. 분명히 아까 봤을 땐 이렇게 경사가 심하지 않았는데 왜 가까이 가니 이렇게 심한 거지? 이제 발이 종아리까지가 아니라 무릎 넘어서까지 푹푹 빠진다. 뭔가 피넛버터를 걸어가는 느낌? 걷는 것도 힘든데 뭔가 장애물 달리기 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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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흑 드디어 도착했다. 여기는 Muir Hut이 있는 데다. 휘트니 헛처럼 낙뢰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어서 지어놓은 것이다. 인연이라는 게 신기한 것이 일주일 전 휘트니 헛에서 만났던 코튼볼, 나이트캡, 스페이스 카우보이를 여기서 동시에 다시 만났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뒤돌아 봤다. 내 뒤에 오던 스페이스 카우보이 아저씨도 드디어 뮤어 패스에 등장! 뮤어 헛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박수 쳐 줬다. 원래 아저씨 혼자 걸었는데 오늘 보니 아들이 합류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합류한 건지 모르겠다. 분명히 마터 패스를 지날 때도 아저씨 혼자였는데? 암튼 아들은 요세미티까지 간다고 한다. 아들네 가족들은 이미 요세미티에 가서 놀고 있고, 이 부자는 약 일주일을 같이 걸어가서 요세미티에서 나머지 가족을 만나기로 했단다.



PCT 애들은 마리화나를 많이들 가지고 다닌다. 뮤어 헛에 도착하자마자 마리화나 냄새가 아주 확~ 애들이 추우니까 바깥에서 안 피우고 헛 안에서 아주 마리화나를 대놓고 폈다. 레알 컬쳐 쇼크였다. 사실 처음에는 왤케 애들이 마리화나를 피워대나 이해가 잘 안 갔는데, 워낙 힘들고 고되고 부상도 많고 그러다 보니 약간 스스로의 위로와 휴식을 위해서 피는 거 같았다. 왜 정말 고되고 힘든 하루 보내고 나면 밤에 술 한잔 하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 있잖아요? 사실 난 술을 안 마셔서 술 한잔 하고 싶은 마음이라기보단 콜라 한잔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정확하다. 근데 술은 액체라서 무거우니까 산에 가지고 올 순 없고 그 대체재로 마리화나를 피는 거 같았다.





침낭을 말리자!


정말 다행히 한 30분 정도 햇볕이 아주 쨍쨍해서 저 멀리 구름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빨리 침낭을 말리기로 했다. 침낭을 저기다 널었는데 뭔가 주변에서 지린내가 나는 거다. 뭐지? 내 침낭에 뭐가 묻었나 살펴보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어떤 하이커가 소변을 보고 있었다. 헐 여기가 다들 소변보는 자리였다니. 거기다 내가 침낭을 널었네...?






침낭 외에도 젖은 것들은 일단 대충 꺼내서 말리기로 했다. 저 멀리 있었던 구름이 갑자기 너무 빠른 속도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여서 맘이 급했다. 어차피 구름 끼면 잘 마르지도 않을뿐더러 또 비 올까 봐 전부 말리진 못하고 금방 다시 짐을 챙겼다.



날씨 무엇ㅠ 내게 왜 이런 시련을



아니나 다를까 비와 우박이 곧 떨어지기 시작했다. 따흑 슬펐다. 오전에 해 쨍쨍해서 기분도 너무 좋고 오늘은 드디어 좀 뽀송뽀송하게 잘 수 있겠구나 했는데, 아직도 난 춥고 손 시리고 발 시리고 텐트도 다 안 말랐는데ㅠㅠ



우박 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헛에 있던 사람들의 의견이 둘로 갈렸다. 스페이스 카우보이는 지금 어차피 가봤자 내려가는데 시간도 엄청 오래 걸릴 거고 날씨도 안 좋으니 그냥 뮤어 헛에서 1박을 하겠다고 고집부렸다. 그 아들은 그냥 계속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결국 아빠 말을 들음. 결국 스페이스 카우보이와 그 아들은 뮤어 헛에서 자고 그다음 날 진짜 새벽같이 일어나서 재빠르게 걸어 내려와서는 또 만나게 됐다. 코튼볼과 나이트캡은 그냥 더 늦기 전에 빨리 내려가겠다고 했다. 나도 좀 고민되긴 했지만 코튼볼과 나이트캡을 뒤따라서 내려가기로 했다.





날씨가 안 좋아지니까 빨리 어두워질 걸 대비해서 척척척척 빨리 걷기 시작했다. 비가 오니 장갑이 다 젖어서 손 끝에 감각이 사라졌다. 아 방수되는 걸로 가져올 걸. 발가락은 이미 예전부터 감각이 없었다. 내려오는 길에는 단 한 번도 쉬지 않았다.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빨리 3000미터 밑으로 내려가 마른자리를 찾아 텐트를 치고 싶었다.



역시나 오늘도 물을 건너야 했다. 오모나! 그런데 누군가가 친절하게 징검다리처럼 큰 돌들을 띄엄띄엄 가져다 놨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앞에 코튼볼하고 나이트캡이 신발 안 벗고 그냥 징검다리로 물을 건너길래, 나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신발 신고 건너는데, 녹은 눈 때문에 수심이 높아져서 그런지 중간에 징검다리가 전부 다 잠겨있었다. 헐... 그 자리에서 신발을 벗자니 휘청할 거 같고 그래서 그냥 신발이랑 양말을 물에다 푸우우욱 적시면서 건넜다. 흑흑 결국 오늘도 부츠와 양말은 이렇게 젖은 상태로 끝이 났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드디어 원래 텐트 치려고 생각했던 장소에 도착했다. 때마침 햇빛도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는 녹은 눈 때문에 완전 습지였다. 코튼볼과 나이트캡은 그냥 여기서 잔다고 했다. 나는 쫌만 더 가기로 했다.







한 15분 을 더 갔을 까? 드디어 마른땅을 찾았다. 여기는 흙바닥이 아니라 완전 돌바닥이었다. 그래서 텐트 치는데 폴이 바닥에 고정이 되질 않아서 여기저기서 돌을 주워다가 고정시켰다. 이렇게 텐트 폴이 바닥에 박히지 않는 곳에서는 바람 불면 최악인데 천만 다행히도 이날 밤은 바람이 안 불었다. 바람님 감사합니다. 텐트를 치다 보니 해가 간간이 나서 텐트가 다행히 다 말랐다.



여기서는 PCT 하는 영국인 아저씨 2명을 만났다. 내가 도착해서 너~무 귀찮아서 마이크로 스파이크를 계속 신은 채로 텐트를 쳤는데, 이 영국인 2명이 자꾸 그거 벗으라고 계속 신고 돌바닥 걸으면 닳는다고 훈수를 뒀다. 난 너무 피곤하고 빨리 텐트 치고 빨리 밥해먹고 자고 싶은 마음에 무시하고 계속 마이크로 스파이크를 신은 채로 텐트 쳤다. 결국... 며칠 뒤 내 마이크로 스파이크는 끊어지게 됩니다 하하하 아저씨들 말을 들을 걸!






버너에 불 세기를 유지하려면 저렇게 돌 사이에 두고 하는 게 좋다. 아니면 바람이 정말 찔끔 불어도 불이 너무 많이 죽는다. 그러면 가스도 많이 쓰게 된다. 지붕과 벽의 소중함이란.






원래 총 21일을 계획했었는데 걷다 보니 걸음이 빨라져서 17일 만에 끝내게 됐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날이 끝내기 딱 1주일 전이었던 거다. 그때는 1주일만 남은 건지 몰랐지. 속도가 지금보다도 더 빨라질 걸 몰랐던 거지. 겨우 1주일만 남은 거였는데 그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천천히, 한걸음 한걸음 혹은 한 장면 한 장면을 좀 더 음미하면서 천천히 걸을걸 싶다.



이때는 춥고 축축하고 그러니까 빨리빨리 걸어서 빨리 끝내야겠다 이런 생각이 정말 강했다. 참 웃기지 않나요? 일상에서는 산을 그리워하고 산에 가고 싶어 하고, 막상 산에 가면 빨리 집에 가서 샤워하고 따뜻한 방에서 자고 싶은 아이러니.



오늘도 역시 옛날 사람들은 전쟁을 어떻게 했을까 전쟁에 희생된 일개 사람들은 얼마나 춥고 배고프고 힘들었을까 얼마나 비극적이고 비인간적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걸으면서 길에 쓰러진 나무를 만나거나 물을 건널 때면 어쩜 별거 아니어 보이는 것이 이다지도 일상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나 싶더라. 성벽과 해자 같은 것은 옛날에 생각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거다.


삼국지를 봐도 그냥 제갈량 멋있네 올 똑똑한데? 이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다. 근데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던 거다. 난 분명히 길이 이미 다 나 있는 데를 가는데도 도대체가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고, 저 뒤에 무슨 산이 있는지 지형이 어떤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옛날 장수 같은 사람들은 저런 걸 다 계산해서 식량이랑 무기 같은 거 보급하는 계획도 다 세워야 했다고요? 천재들만 할 수 있는 직업이었던 거 같다.



문명에 대한 감사는 날로 깊어진다. 상수도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발전이고 위대하고 얼마나 큰 편리함을 가져다주는지 모른다. 물 틀면 물이 나오고 따뜻한 물도 나온다는 게 기적이다. 그리고 쭈그려 앉아서 냇물에 세수하다 보면 바가지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 발명품인지 모르겠다. 바닥에 앉을 수 있게 혹은 잘 수 있게 땅을 평평하게 고르는 것도 정말 어마어마한 발전이다. 의자도 정말 엄청난 발명품이고. 방수되는 천도 대박이다. 방수천이 나오기 전에 사람들 어떻게 살았나 존경스럽다. 바람도 진짜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약하게 불어도 불씨가 푹 꺼져버리는데, 이런 상황에서 벽이 있다는 건 진짜 위대한 거였다. 벽, 지붕 이런 것들이 현대의 삶을 얼마나 편리하고 풍요롭고 안락하게 해주는지에 대한 감사함과 이해가 깊어지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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