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일 이름이 존맛탱(JMT)이라니 참을 수가 없네.

존 뮤어 트레일 - Day 10

by Noelles Adventure

2016년 6월 12일 Day 10.



출발: Mather Pass 지나서 어딘가 (Palisade Lake)

도착: Bishop Pass Junction 지나서 Big Pete Meadow 전 어딘가

총 거리: 19.63 km

누적 거리: 163.67 km






내 페이스북에 브런치를 시작한다고 글을 올렸더니 나랑 한국에서 석사를 같이 했던 오빠가 댓글을 달았다.

"눈팅만 하고 가는데, 트레일 이름이 존맛탱(JMT)이라니 참을 수가 없네." 하하하 너무 웃겨서 이걸 제목으로 달아봤다. (참고로 JMT는 존 뮤어 트레일의 약자이다.) 그 오빠를 포함해 많은 이로부터 마음이 따뜻해지는 메시지를 많이 받았는데, 그분들에게 이 편을 통해 내가 (개)고생 끝에 그래도 빛을 보고 잘 살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






밤새 눈이 내렸고, 쉴 새 없이 천둥과 번개가 쳤다. 텐트는 방음이 하나도 안되니까 천둥이 칠 때마다 마치 내 텐트 바로 위에서 천둥이 치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마치 콘서트에서 자리를 잘못 잡아 스피커 바로 앞에 섰을 때 정도의 큰 소리였다. 번개가 칠 때마다 그 칠흑 같은 텐트 안이 번쩍하고 환하게 켜졌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저 멀리 떨어진 빛 한줄기가 이렇게 내 텐트를 이토록 훤하게 만들다니!



그날 밤 진짜 텐트 밖은 오만 소리와 빛과 어지러울 정도로 혼란스러웠을 거다. 이상하게도 텐트 안은 너무나 안정적이고 편안하고 심적으로 고요했다. 날씨는 분명 추웠지만 이상하게 별로 춥지가 않았고 이상하게 고요함과 아늑함이 들었다. 밖에서 천둥 번개가 쳐도 나는 아주 온전히 오롯이 안전하게 있는 느낌. 행복했던 밤이다.



아침이 밝았다. 이 전날 하도 오래 걸어서 아예 늦잠을 잤다. 분명 오전 9시쯤 됐는데도 텐트 안이 뭔가 어두웠다. 아 텐트가 눈에 파묻혔구나. 이 경험은 파타고니아에서도 했는데, 늦은 아침에도 불구하고 마치 새벽녘인 듯 텐트 안이 어두워서 어리둥절했는데, 눈이 텐트 위에 너무 많이 쌓여서 어둑어둑했던 거다. 세상에 밤새 눈이 얼마나 온 거지? 일단 텐트가 젖지 않도록 (이미 젖었지만) 손으로 벽을 툭툭 쳐서 눈을 전부 떨궈냈다.




991AC2335BC7F3F504F7EE 눈 속에 파묻힌 내 텐트




눈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이 왔다. 나와보니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다들 새벽같이 출발했나 보다. 그래서 Joe (옛 주한미군) 아저씨는 앞으로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세상이 정말 조용했다. 눈은 어쩜 이렇게 아름답게 소복이, 가만히 쌓여있을까.



한쪽에는 아직 먹구름이 있었지만 바른 쪽 하늘은 완전 해가 쨍쨍했다. 눈이 햇살에 반사돼서 반짝반짝 빛났다. 정말 반짝반짝. 눈꽃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나는 박사를 아주 추운 곳에서 했는데, 여기는 10월부터 5월까지 눈이 내리는 곳이었다. 1월에는 영하 30도 밑으로 떨어지는 게 대수롭지 않아서, 가끔 영하 10도가 되면 다들 따뜻하다고 신이 나서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다닐 정도로, 겨울이 참 춥다. 눈을 5년 동안 하도 많이 봐 와서, 난 눈에 전혀 감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선 눈이 정말 예쁘더라. 분명히 박사 하면서 눈꽃을 많이 봤는데 여기서 보는 눈꽃은 훨씬 예뻐 보였다.




뭐야 이렇게 예뻐도 되는 거야?



굉장히 클리쉐 같지만, 고생 끝에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선물해준 자연에 감사했다. 어제 그렇게 무서워했던 자연인데 또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고생했다고 나름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이게 병 주고 약주 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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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 옆에 코펠이며 하이킹 폴 같은걸 놔두고 잤는데 일어나 보니 완전 눈에 덮여 버렸다. 혹시라도 라이터 같은 거 두고 갈까 봐 눈을 죄다 헤쳐서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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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동이 트고 나서도 눈이 왔던 것 같다. PCT 하이커들은 부지런해서 새벽같이 일어나서 산행을 시작한다. 아마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Joe도 새벽에 출발했을 텐데, 이미 그들의 발자국은 눈에 덮여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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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늑장 부리다가 천천히 출발했다. 이미 눈이 녹아서 벌써 시냇물 같은 게 생겨있었다. 그 전전날부터 텐트, 침낭, 슬리핑 패드, 신발은 계속 젖어있었는데 오늘도 역시 젖은 채로 배낭에 쑤셔 넣고 젖은 신발 신고 걷기 시작했다. 황홀한 풍경을 보고 걸으니 계속 기분이 좋았다. 밤에도 포근하게 잤고, 일어나니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이 있고, 이 속을 내가 걸어간다니! 아 행복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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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오전 내내 오락가락했다. 해가 갑자기 쨍 하니 나다가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서 우박을 쏟아부었다가

다시 해가 쨍하게 나다가를 오전 내내 반복했다. 구름하고 안개는 참 빨리 움직였다. 날씨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는 말이 꼭 들어맞았다. 사진은 해가 뜰 때만 찍어서 그런지 구름 낀 사진은 하나도 없네ㅋㅋ







995104445BC7F7791A67BC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산을 거울처럼 비추는 게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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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걸어온 길을 되돌아봤다. 처음으로 벌써 이만큼이나 걸어온 것이 아쉽기 시작했다. 아 저기가 저렇게 포근하고 예뻤는데, 이미 멀리 와버렸다. 이제 아마 다시는 (혹은 당분간은) 저길 가지 못할 텐데 아쉬움이 들었다. 며칠 동안 눈과 비가 많이 온 데다가 고도가 내려가니 땅이 많이 젖었다. 부츠가 마를 겨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날은 계속 기분이 몽글몽글한 것이 뭔가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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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거의 하루 종일 내리막이어서 걷기는 편했다. 하지만 오전을 끝으로 먹구름들이 더 몰려와서 오후부터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 와이... 내가 입었던 레인자켓은 PCT 애들이 강추하던 100% 방수되는 자켓이었다. 근데 걸으면서 계속 팔부분이 쓸리고 어깨 부분은 배낭 스트랩에 쓸리다 보니까 6시간 넘게 내내 내리는 비에 물이 다 스며들었다. 덕분에 내 옷이랑 속옷까지 홀딱 다 젖었다. 꺼이꺼이 이러다 밤에 저체온증 걸리거나 동상 걸리면 어쩌지 또 걱정하기 시작했다. 침낭도 이미 좀 젖어 있는데 어쩌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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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서 나는 점심 먹을 타이밍을 좀 놓쳤다. 아직도 이 부분은 생생히 기억난다. 왜냐면 코튼볼하고 나이트캡이 넘 부러웠거든요ㅋㅋ 중간에 딱 20분 정도 비가 멈춘 적이 있었다. 그때 걷다가 코튼볼하고 나이트캡을 또 만났는데, 걔네는 점심 먹는다고 나무 밑에 앉았다. 나도 그때 같이 앉았어야 하는데ㅠㅠ 왜 그랬을까 그냥 더 걷다가 좀 이따 먹어야지 했는데, 진심 비가 주구장창 끊이질 않고 왔다. 그래서 결국 한 시간 뒤엔가 비에 젖은 또띠아, 비에 젖은 참치, 비에 젖은 스트링 치즈를 추위에 오돌오돌 떨면서 먹었다. 먹고 있는데 코튼볼하고 나이트캡이 지나가며 인사를 했는데 아 그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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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내리막을 걸었다. 분명히 이 전날 오버해서 25킬로나 걸었는데, 이날 전혀 피곤하지가 않았다. 그냥 추웠을 뿐.



비를 쫄딱 맞으며 겨우겨우 텐트를 쳤다. 이렇게 장기간 하이킹을 하다 보면 트레일 엔젤들을 만나게 마련인데, 이날 나는 첫 번째 트레일 엔젤을 만났다. 트레일 엔젤은 하이킹 도중 힘든 일이나 막막한 상황이 됐을 때 (갑자기) 나타나서 도움을 주는 다른 하이커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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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해 먹으려고 버너에 불을 붙이려는데 라이터가 안 켜진다. 이게 뭐야? 라이터 분명히 새로 사 왔는데? 왜 어떻게 벌써 라이터가 다 떨어진 거지? 심지어 내 버너에는 이그나이터 (불 저절로 붙여지는 거)가 있는데 사실 첫날부터 작동을 안 했다. 분명히 집에서 테스트했을 때는 됐는데 거짓말처럼 첫날부터 작동을 안 했다. 그치만 내겐 라이터가 있으니까! 훗! 하면서 나의 철저한 준비성을 스스로 기특해했다. 근데 이날 라이터가 더 이상 불이 안 붙더라. 사실 육포나 트레일 믹스가 많이 있어서 굶을 걱정은 없었지만, 하루 종일 비 맞고 추워서 나름 따뜻한 전투식량을 해 먹고 싶었는데. 망연자실.



그때 진짜 기적같이 그동안 걸으면서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었던 커플 (니나랑 락코)이 지나갔다. 난 헐레벌떡 걔네들 붙잡고 혹시 너네 여분 라이터 있니? 물어보니까 자기들 마침 여분이 있다면서 나에게 하나를 적선해주시고 갔다. 라이터 주면서 밥은 충분히 있냐고 다른 거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보는 천사들 흑흑 ㅠㅠ 그다음 날에도 이 커플은 내게 큰 도움을 준다. 나의 에인절!



어쩜 타이밍도 참. 지금껏 flip flop해 오던 하이커를 만난 것도 아니고, 딱 망연자실해하고 있는 그 순간 누군가 나타나서 도움을 주다니. 이런 걸 트레일 엔젤이라고 하는구나.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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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히 받은 라이터로 밥 먹는데 사슴 가족 (무려 7마리)이 내 텐트 주변에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좋아서 사진 찍고 그랬는데 갑자기 7마리가 죄다 몰려드니까 좀 무서웠다. 그리고 지금 내가 사는 집 뒤에는 숲이 있는데, 거기는 거의 사슴 가족의 탁아소다. 6월인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아기 사슴이 엄마 사슴과 우리 집 뒤로 왔다. 보아하니 그날 태어난 것처럼 아기 사슴은 작고 마르고 휘청댔다. 그 뒤로 거의 매일 오후 아기 사슴과 엄마 사슴이 왔다. 아기 사슴이 엄마 젖을 먹는 것도 봤다. 우와 신기해. 그러다 아기 사슴이 약간 어린이급?으로 크자, 엄마 사슴은 우리 집 뒤 숲을 탁아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엄마 사슴은 아기 사슴을 우리 집 뒤에 똑같은 장소에 앉혀놓고 (그것도 잘 안 보이는 곳에), 본인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한 2-3시간이 지나면 엄마 사슴이 다시 와서 아기 사슴을 데리고 또 어디론가 사라진다. 귀여운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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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JMT를 한지 오래 지났기 때문에 모든 하루하루가 뿅 기억이 나는 건 아니다. 사진 보고 일기 써 놓은 거 보면 나름 그때 기억이 난다. 내가 가져갔던 일기장은 Rite in the Rain이라는 브랜드 (홍보 아님)인데, 물에 젖어도 찢어지거나 손상되지 않는 종이로 만들어졌다.



이 날 일기에 쓴 내용은 이번 글에 다 적었다. 대부분의 내용은 내 태양을 돌려달라! 비 와서 다 젖었다 넘 싫다 넘 춥다 이런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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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제발 해가 나서 옷가지와 텐트를 말릴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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