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뮤어 트레일 - Day 12
출발: Evolution Basin
도착: Muir Trail Ranch
거리: 24.78 km
누적 거리: 209.69 km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해가 났다. 너무나 신이 났다. 지금껏 마를 겨를이 없었던 텐트와 침낭 등을 다 말리고 가고 싶어서 늑장을 부렸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반작용이 존재하죠. 아침에 늦게 떠난 반작용으로 이따가 건너야 하는 악명 높은 에볼루션 크릭 (Evolution Creek)을 건널 때 위험해졌다. 그치만 태양신님이 나오셨으니 일단 만끽하기에 바빴다. 이 전날 뮤어 패스에서 머물기로 했던 스페이스 카우보이와 그의 아들은 꽤 이른 아침에 내 앞을 지나갔다. 곧이어 코튼볼과 나이트캡이 지나가면서 인사를 했다. 이 날도 역시 코튼볼, 나이트캡, 스페이스 카우보이와 그 아들내미와 계속 flip flop 하면서 걸었다.
에볼루션 베이신 (Evolution Basin) 호수는 물이 참 깨끗하고 예뻤다. 저렇게 물에 반짝반짝 햇살이 반사되는 걸 순한글로 윤슬이라고 한다. 어쩜 단어도 이쁘다. 보통 PCT 하이커들은 새벽같이 일어나서 걷는데, 그 전날 여기에 텐트 쳤던 영국 아저씨 2명 (일기를 보니 이름이 챨스와 싸이먼)도 나처럼 꽤 늦게 출발했다.
물을 건널 때 신발 다 벗고 건너기가 너무 춥고 귀찮으니까, 혹시 쓰러진 큰 나무가 있으면 그 나무를 밟고 건너간다. 근데 문제는 나무가 둥글잖아요? 그래서 균형을 잃으면 그냥 물속으로 풍덩이다. 귀차니즘이 발동한 나는 어떤 냇물을 건너는데 쓰러진 나무를 밟고 건너기로 했다. 근데 나무가 쪼금 얇아서 균형 잡는 게 좀 불안하긴 했다. 게다가 가방도 무거우니 더 균형 잡는데 힘들다.
우려하던 사태가 현실로 일어났다. 통나무 밟고 올라서서 한 두 발짝 걸었는데 결국 균형을 잃고 나무에서 떨어졌다. 천만다행인 건 물 한가운데 빠진 게 아니라, 물이 시작되는 얕은 지점에서 떨어져서 바지만 다 젖고 배낭 겉에만 젖었고 나머지는 다 무사했다 어휴. 부상당하지 않은 걸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고 그냥 신발 벗고 물을 건넜다. 다만 떨어지면서 나뭇가지에 허벅지를 쫙 긁혔다. 바지가 안 찢어졌길래 괜찮은 줄 알았는데 밤에 옷 갈아입을 때 보니까 무슨 곰이 할퀸 거처럼 핏자국이 쫙 나 있었다. 이 상처로 다니엘라한테 곰한테 할퀴었다고 장난을 쳤다. 진짠 줄 알더라고요?ㅋㅋ
통나무에서 떨어진 건 둘째 치고, 이 날 최고 큰 고비가 Evolution Creek이라는 곳을 건너는 거였다. 이 강은 깊고 유속이 빠르기로 워낙 유명하다. 내가 갔던 때처럼 눈이 녹는 시기에는 더 물이 불어나기 때문에
눈이 녹기 전에 새벽같이 후딱 건너거나, 아니면 한 시간을 좀 더 상류로 가서 물을 좀 더 쉽게 건너는 방법이 있다. 분명히 책에서 여기가 악명 높은 곳이므로 무조건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안전하다고 했다.
나는 아침에 늦게 출발해서 새벽에 물이 그나마 적을 때 건너는 건 이미 선택지에 없었다. 한 시간을 더 걸어서 좀 더 안전하게 건널까 아님 그냥 일단 부딪쳐볼까 고민하다가, 에이 물이 많아봤자 얼마나 많겠어하고 그냥 원래 계획했던 길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그건 경기도 오산이었다 뜨아...
혹시 "히말라야 몸개그"라는 영상을 본 적이 있는가? 다큐멘터리에 나온 장면으로, K2 등산을 하다가 다리에 물을 묻히지 않고 물을 건너려고 사람들이 점프해서 건너는 장면이다. 그치만 가방 무게 때문에 마음대로 되지 않고 결국엔 물에 넘어져서 쫄딱 다 젖게 되는 영상이다. 사람들은 이걸 보고 몸개그라고 하하하 웃었지만 난 절대로 웃을 수 없었다. 산에서, 특히 고산지대에서, 온몸과 배낭이 저렇게 물에 적셔지는 것은 동상 혹은 심하면 동사와 직결되기 때문에 내가 저런 상황이었으면 난 두려움에 (그리고 추위에) 부들부들 떨었을 거다.
JMT를 하면서 모든 물을 건널 때 당연히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했지만, 이번엔 차원이 다르다. 헐 진심 깊어도 너무 깊었다. 사실 깊어봤자 허리까지 오는 건 아니고 골반 바로 밑까지 오는 깊이인데, 문제는 물이 너어어무 빠르고 가방이 있으니까 훨씬 힘들 거다. 히말라야 몸개그에서는 넘어지면 몸이 젖는 것만이 문제였지만, 여기서는 넘어지면 정말 아마득하게 떠내려간다. 이 강의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아마 떠내려가다 죽겠지...? 내가 친구 아버님이 장맛비에 개천에서 떠내려가시는 바람에 돌아가신 일도 있었기에, 이렇게 깊고 빠른 물에 떠내려가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안다. 그래서 절대로 넘어지면 안 된다.
내가 도착했을 때, 글렌 패스 (Glen Pass) 지날 때 만났던 영국 가족 (아들, 딸하고 부모하고 넷이서 같이 PCT 하는 가족)들이 여길 건너고 있었다. 아들, 딸이 거의 초딩?정도 나잇 대여서 물을 혼자 못 건너니까 아빠가 애들 한 명씩 들쳐 업고 이 물을 건넜다. 나도 좀 업어주라... 아저씨는 애들 다 업어서 건너고 마지막으로 아저씨 짐 가지고 건너고 있다. 아저씨를 따라서 그나마 수심이 얕아 보이는 곳으로 나도 도전하기로 했다.
정말 너무너무 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고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 건너야 한다. 심호흡을 하고 정신 똑바로 차리자!하면서 건너기 시작했다. 한 반쯤 왔을까 갑자기 누가 나타나서 모세처럼 물을 쫙 갈라줬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발 누가 나타나서 물을 잠깐만 딱 멈춰줬음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현실을 회피하는 거죠. 정말 무서웠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일단 한 발을 떼서 앞으로 디뎌야 하는데, 발을 떼는 순간 엄청나게 휘청거렸다. 하이킹 폴로 지탱하고 있지만 폴이 부러질 정도로 유속이 셌다. 게다가 가방 무겁지, 바닥에 돌 미끄럽지. 와 진짜 이러다가 휩쓸려 내려가겠다 생각이 들었다. 그치만 현실에선 모세의 기적은 없다. 결국 이 물을 건너야 하는 건 나고 이걸 견디지 않으면 휩쓸려 내려가는 것도 나다. 다 내 책임이다.
내가 한가운데에서 얼어붙어 이렇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자 이미 강을 다 건넌 하이커 (크레일 네임은 곤)가 다시 강가로 와서 할 수 있다고 응원해주면서 내 쪽으로 물살을 가르며 저벅저벅 들어왔다. 그 사람은 내 배낭을 들어줬고 드디어 나는 발을 뗄 수 있었다. 정말로 의지가 많이 됐던 하이커였다. 흑흑 다시금 감사의 인사를 표한다.
다 건너니까 코튼볼하고 나이트캡이 있었다. 얘네들은 한 시간 걸려서 상류 쪽에서 물 건너왔다고 한다. 똑똑한 것 들. 난 물 건넌 김에 바지도 말릴 겸 점심 먹었다. 써머 소세지, 육포, 트레일 믹스를 먹었다. 다 먹고 났는데 코튼볼하고 나이트캡이 앞으로 남은 식량을 점검하고 있었는데, 간식거리가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나는 식량을 너무 과대평가해서 음식이 남아돌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내가 실제로 먹은 양은 내가 싸가지고 온 양의 절반 정도밖에 안됐다. 그치만 이 귀한 음식을 버리긴 뭐하니까 무겁게 계속 들고 다녔다. 내가 만든 트레일 믹스를 두 봉지를 가지고 왔지만 아직 한 봉지도 반이나 남았기 때문에, 나는 코튼볼과 나이트캡에게 한 봉지를 통째로 줬다. 이 트레일 믹스는 내가 생각해도 진짜 최고급이다. 하와이안 허니 로스트 마카다미아 넛 (땅콩 항공의 그 넛), 아몬드 초콜렛, 말린 망고, 말린 파인애플, 솔티드 캐슈, 피스타치오, 브라질리언 넛, 엠 앤 엠스가 들어있는 진심 너무나 맛있는 트레일 믹스다. 난 땅콩 같은 건 취급하지 않았다. 코튼볼과 나이트캡은 감사 인사를 하고 떠났다.
일기를 보니 물을 건너고 나서는 계속 내리막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넘나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참 신기한 것이 아주 힘들거나 아주 무섭거나 아주 예브거나 아주 감격스러운 일이 아니면 잘 기억이 안난다. 그냥 좀 멋있네 아 기분이 좋네 하는 정도의 순간들은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이미 4년이나 지나서 그런건지...
원래 예정은 하루에 16킬로미터인데 trail leg가 생겨서 이제 하루에 24킬로미터 정도는 기본으로 걷게 됐다. 계획에 비해서 하루에 1.5배를 더 걷는 셈이다. 이 때문에 내가 예정했던 것에 일정에 비해서 2일이나 일정이 앞당겨지게 됐다. 좀 뿌듯했다.
앉아서 쉬는 동안 괜히 찍어봤다. 의미 없음.
내가 한 JMT는 총 4개의 국립공원(+주립공원)을 지나게 되는데, 세 번째 공원인 존 뮤어 시에라 포레스트 공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날은 Muir Trail Ranch (MTR) 라는데 주변에다가 텐트를 쳤다. MTR은 별게 아니고 그냥 존 뮤어 트레일 하이커 resupply (보급품) 받아주는 곳이다. 내가 갔던 6월은 아직 겨울 시즌이었는데, MTR이 6월 초에 문을 열겠다고 했지만 내가 출발했던 6월 6일에 마지막으로 확인해 봤을 때에도 문을 못 열었다. 눈이 너무 많아서. PCT 하이커들의 얘기를 들으니 MTR이 문을 열겠다고 예정한 날짜가 내일인 6월 15일이기는 했는데, 중간에 눈이 오면 더 미뤄질 수도 있다고 했다. 게다가 원래 내가 픽업하겠다고 도착 예정을 17일로 해놨는데, 걷다 보니 속도가 빨라져서 바로 내일 15일에 픽업하게 생겼다. 인터넷도 안되고 도대체 언제 문을 여는지 알지도 못하고 설사 열었더라도 내 resupply를 미리 픽업해다 놨을지 알지도 못하겠고 불안한 마음을 안고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