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뮤어 트레일 - Day 13
출발: Muir Trail Ranch
도착: Bear Creek 지나서 어딘가
거리: 20.12 km
누적 거리: 229.81 km
역시 사람이 기대하는 것이 있으면 아침에 빨리 일어나게 된다. 춥고 비올 때는 아 내일도 춥겠지 아 내일도 미저러블 하겠지 하는 생각에 아침에 일어나기가 싫다. 실제로 오지게 춥기도 하고. 하지만 이 날은 내 리써플라이를 받는 날이므로 아침에 벌떡 일어났다. 동기부여가 뿜뿜. 정말 다행히도 MTR가 문을 열었다! 게다가 내가 보내 놓은 resupply 박스도 잘 와 있었다. 휴~
MTR에서 이런 간단한 하이커 용품들을 판다. 나는 선크림이 다 떨어져서 선크림 작은 거 하나 사고 라이터도 새로 하나 샀다. 그 외에 밴드, 진통제, 선글라스, 치약, 랜턴, 장갑, 양말, 배터리, 물통, 벌레 퇴치제 등을 팔았다.
MTR에는 재활용 박스가 여러 개 있다. 하이커들이 쓰다가 안 쓰는 물건들, 안 먹는 음식들을 서로 나눠가지거나 교환할 수 있게 돼 있다. 지난 편에도 썼듯이 음식을 너무 많이 가지고 왔고, 또 너무 많이 부쳤더라. 지난 일주일 동안 들고 다닌 음식도 다 못 먹었는데 나는 여기서 두 번째 resupply를 한다. 음식이 넘쳐난다. 정말 아깝지만 눈물을 머금고 내 음식의 거의 절반을 여기에 기부하기로 했다. 무게라도 덜어야지. 그래서 MTR 재활용 박스에 남은 스트링 치즈, 남은 트레일 믹스, 등등을 옮겨 담았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나이트캡이 와서 내가 기부한 스트링 치즈를 만지작 거리더니, 먹고 싶은데 치즈라서 왠지 오래돼서 상했을 까 봐 고민을 하더라. 내가 방금 리써플라이 박스에서 꺼내놓은 거라고 안심하고 먹으라고 했다. 나이트캡이 그렇게 환하게 웃는 거 처음 봤다. 진짜 세상을 다 가진 미소. 그리고 나이트캡과 코튼볼이 거의 5분 꽉 채워서 내가 그 전날 줬던 트레일 믹스를 극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비싼 것들만 들어있거든요. 내가 봐도 비싸고 최상급인 재료들만 넣었으니까 훗. 나름 맛있게 먹어주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원래 여름에 오면 (한 7-8월) 여기서 돈 내고 샤워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는 겨울 (6월)이라서 샤워장이 아직 문을 안 열었다. 내 머리는 진짜 쪄들어 갔다. (빗을 가져가지도 않았지만) 손으로도 빗질이 안된다. 어우 머리 감고 싶다. 13일 동안 머리를 못 감은 거다. 이렇게 길게까지 못 씻고 땀 내고 살았던 적이 없었다. 심지어 몽골에 갔을 때도 1주일에 한 번은 시내에 나가서 샤워를 할 수 있었고, 페루나 파타고니아에서 했던 하이킹들도 끽해야 6일이었기 때문에, 1주일 넘도록 못 씻어 본 건 처음이었다. 몇몇 하이커들은 드라이 샴푸 (베이비파우더 같은 거)를 가지고 다니면서 머리에 뿌리는 식으로 관리를 하는데, 무게를 1그램이라도 줄여야 했던 나는 그런 건 가져올 생각도 안 했다.
여기도 산 깊숙한 곳이기 때문에 핸드폰은 당연히 안 터진다. 유일하게 되는 것은 인터넷인데, 이것도 위성으로 연결해서 쓴다.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느리고 비싸다. 15분에 10불ㅋㅋ 속도 때문에 페이스북이나 업로드, 다운로드하지 말라고 써 있다. 메일 온리!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이메일도 없었을 텐데 나는 괜히 인터넷을 하고 싶었다. 어휴 결국 10불 내고 인터넷 했다.
어차피 속도가 느려서 페북 이런 건 접속도 안된다. 그냥 가족들하고 친구들한테 나 잘 있다 이멜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resupply를 하기로 한 곳에도 이메일 보내서 내가 예정보다 좀 더 빨리 도착할 거 같다고 이메일을 보냈다.
다시 무겁게 채운 배낭을 메고 출발했다. 일기를 보니 MTR 지나자마자 오르막의 연속이라고 한다. 오르막 뒤에 오르막 뒤에 끝없는 오르막이었단다. 근데 난 이제 기억이 안 난다 쩝... 역시 여행기는 다녀오자마자 썼어야 했다. 게으름뱅이의 댓가지 뭐.
이날은 꺄 날씨가 넘 좋았다. 비가 안 오고 해가 나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코튼볼, 나이트캡이랑 같이 점심을 먹었다. 이들은 낚시 바늘을 들고 다녔는데, 이런 호수에서 낚시를 해서 물고기를 잡아먹는다고 했다. 헐! 그게 가능하단 말이야? 물었더니 가능은 한데 잘 안 잡힌다고 했다. 그래서 먹을 게 많이 없었다고... 낚시해서 먹을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을뿐더러, 물고기가 잡히지 않을 때를 대비한 플랜 B가 없다는 것도 신기했다. 역시 사람 사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서로 flip-flop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치지만 혹시 앞으로 못 만나게 될 경우를 대비해 같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서로 이메일 주소도 교환했다. 내가 스티커로 가려서 잘 안 보이지만 나이트캡은 PCT를 시작한 이후로 면도를 안 해서 (보통 다들 안 한다) 수염이 매우 덥수룩하다. 이들의 옷은 대체로 무채색인데, 나는 한국인답게 빨강 파랑 아주 형광색으로 입고 다녔다 하하. 그랬던 이유가 있다. 바로 세일하는 것으로만 샀기 때문. 남들이 잘 안 사는 색깔만 세일하기 때문에 고를 것도 없이 그냥 싼 거 샀더니 저렇게 화려한 복장으로 산을 다녔다.
오늘도 어김없이 패스를 하나 지난다. 오늘 지날 패스는 셀덴 패스 (Selden Pass)이다. 오르막을 많이 올라와서 이제 나무가 좀 덜 보이고 눈이 많이 보인다. 고도가 아주 높은 곳은 아닌 데다 이제 체력단련이 좀 돼서 그런지 아주 힘들진 않았다.
벌써 Selden Pass 꼭대기까지 왔다. 이제 뭐 그동안 사진도 많이 찍었겠다 점점 사진 찍는 빈도가 적어진다. 코튼볼하고 나이트캡이 곧 뒤따라 왔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둘은 먼저 출발했다. 나는 좀 더 쉬다가 가기로 했지만, 곧 날씨가 좀 꾸물거리고 추워져서 나도 결국 오래 쉬진 못하고 금방 출발했다.
오늘은 물 안 건너나 했더니 경기도 오산입니다. 오늘도 텐트 치기 전에 물을 건너야 했다. 건너고 나서 다리에 물기 말리면서 찍은 사진이다.
이 전 날 내가 다른 국립공원으로 지나왔다고 했는데, 이 국립공원은 파크레인져 (공원 관리원)이 일을 열심히 하는지 아니면 재정이 빵빵한지 몰라도 여기저기 이렇게 텐트 치기 수월하게 만들어놨다. 보통 물에 접근이 용이한 곳, 나무가 주변에 많아서 바람으로부터 보호가 좀 되는 곳, 땅이 평평한 곳, 바닥이 축축하지 않은 곳
이 4박자가 잘 맞아야 텐트 치기가 좋은데, 이런 데를 기가 막히게 찾아서 지도에 표시해놨더라. 게다가 3000미터 이하는 불을 피울 수 있는데 불 피우기 쉬우라고 저렇게 돌도 모아놨다. 힝 감동ㅠ-ㅠ
난 내가 가지고 다니던 지도 중에 지나온 부분을 태워서 킨들로 썼다.
갈수록 걷는 속도가 붙으면서 여행 중-후반에는 별로 여행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래서 최대한 사진 하고 일기를 보면서 기억해내려고 하는데도 잘 기억이 안 난다. 오히려 초반에 진짜 죽을 거 같이 힘들고 숨차고 너무너무 하기 싫고 포기하고 싶고 그랬던 것만 기억난다. 아름다운 광경들도 초반은 기억이 잘 나고 갔던 길도 되게 생생하다. 근데 중-후반은 여길 내가 갔었나 싶을 정도로 기억이 별로 없다.
내가 너무 빨리 걸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트레일이 이제 쉬워져서 그랬을까? 아니면 빨리 끝내고 문명으로 돌아가서 샤워하고 따뜻한 방에서 자고 싶어서 그랬을까? 난 왜 평소에 산을 그리워하고, 막상 산에 가면 다시 집을 그리워하는 걸까? 내가 지금과 여기에 집중을 못해서 그랬던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