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뮤어 트레일 - Day 6
출발: Forester Pass 앞 어딘가
도착: Charlotte lake junction
총 거리: 17.7 km
누적 거리: 92.34 km
1. 이건 내 휴가다. 굳이 이 여행을 통해서 무언갈 얻어야 할 필요도 없고 이 여행의 의미를 굳이 찾아야 할 이유도 없다. 만약 이 산행이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다 된다면 좋은 일이지만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다. 이건 그냥 휴가이고 내가 힘든 시기를 잘 견뎌온 대가로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다.
2. 편안함과 편리함과 따뜻함이 그립다. 태양은 정말 위대하다. 왜 옛날 사람들이 태양을 신으로 섬기고 숭배했는지 이해가 간다. 해가 나면 너무너무 따뜻해지고 젖은 양말도 마르고. 햇님 최고!
출처: 내 일기장
나는 성취감에 고파서 JMT를 시작했다. 언젠가 나의 친언니와 성취감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언니나 sk나 우리는 왜 자아의 가치를 꼭 성취하는 데서만 찾는가에 대해서 한탄했다. 나는 내가 어떤 일을 (특히 커리어에 있어서) 잘 성취해내면 매우 스스로를 가치 있게 느끼는데 반해, 일을 잘 못해내거나 딱히 성취감을 못 느끼면 나는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느껴지더라. 그건 우리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은 저마다 다양한 면모가 있게 마련이고 한 면모에서 딱히 뛰어나지 않다고 해서 그게 내 스스로의 가치가 마구 떨어지는 건 아닐 텐데도, 정작 나는 성취감이 없으면 스스로가 너무 가치 없게 느껴졌다.
사실 나는 이제 더 이상 치열하게, 생존하듯이, 열심히 성취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 근데 그렇게 안 살면 내가 너무 죄책감이 들고 항상 주눅 들어 있다. 나는 가치가 없다고 느껴져서.
나는 커리어가 잘 안 풀리거나 일을 잘 못해내더라도 나에겐 내가 가치 있게 여기는 다양한 면모가 있다. 난 남 칭찬을 잘하고 마음이 따뜻하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가족과도 별 탈 없이 잘 지낸다. 눈물이 많고 선생님을 존경하며 뭐든 배울 때 원칙을 배우려고 하고 다양한 경험에 나를 노출시켜 나는 꽤 만족스럽게 성장해왔다. 이렇게 보면 내 가치를 높이 평가할만한 면모가 많은데 왜 나는 꼭 성취감을 느껴야만 스스로의 존재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지 모르겠다.
성취감이 없어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난 스스로의 가치를 다른 데에서도 찾는 방법을 좀 알았음 좋겠다.
날이 밝았다. 새벽 6시에 일어나려고 했지만 알람이 울리자마자 끄고 다시 잤다. 아 태양이시어 따땃한 햇볕을 내려주소서. 하지만 그늘이 져서 아직 햇볕이 내 텐트까지 내리질 않아서 정말 추웠다. 도저히 침낭에서 나오질 못하겠더라. 꾸물대다가 겨우 텐트 밖으로 나와서 반쯤 얼은 물로 아침밥을 해 먹고 출발했다. 오늘은 포레스터 패스 (Forester Pass)를 지나는 날이다. 4010미터인 포레스터 패스는 휘트니 산(4420m) 다음으로 JMT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PCT에 휘트니 산은 공식적으로 포함되지 않아서, 사람들은 포레스터 패스가 PCT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곳이라 칭한다.
트레일을 시작하기 전, 인스타로 올해 PCT를 하는 사람들을 팔로우했다. JMT 하이커들은 산에 미리 보급품 (resupply box)을 보내 놓고 찾아가는 형식에 반해, PCT 하이커들은 워낙 장거리다 보니 1주일에 한 번씩 시내로 나간다. 이 사람들이 시내로 나가면 핸드폰이 되니까 1주일치 사진을 왕창 업로드한다. 나는 그걸 보며 어디에 눈이 어느 정도 쌓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PCT 하이커들이 올린 사진 중에 가장 공포스러웠던 사진은 포레스터 패스였다. 포레스터 패스를 가려면 악명 높은 눈 비탈을 지나야 한다. 매우 가파르고 눈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으므로 다들 무섭다고 했다.
한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드디어 포레스터 패스가 눈에 보였다. 오른쪽으로는 반쯤 눈에 덮인 스위치백 (지그재그로 난 길)이 보인다. 저길 내가 가야 하는구나. 이렇게 사진으로 보면 전혀 멀지 않아 보이고 한 20분이면 갈 것 같아 보이지만 난 저 위까지 올라가는데 꼬박 2시간이 걸렸다. 이때 알았다. 휘트니 산에 올라가느라 걸었던 오르막은 오르막이 아니었음을. 경사가 너무 심해서, 걸을 때 아이스 액스를 이용해서 마치 얼음등반 하듯이 올라가야 하는 구간도 있었다. 아이고 무서워라.
한 1/4쯤 올라왔을 때 잠시 쉬며 밑을 내려봤다. 어휴 경사가... 저 밑에 PCT 하이커 4명이 포레스터 패스 쪽으로 왔다. 저기서 다들 사진 찍고 물도 마시고 소변도 보고 다들 마이크로 스파이크 (크램폰 소형) 채우고 올라올 준비를 했다. 얘네들은 독일애들이었는데 게이터 (발목에 눈, 자갈 들어가지 말라고 채우는 것)가 없어서 전부 비닐봉지를 뜯어가지고 임시 게이터를 만들어서 차고 있었다. 짠한 것ㅠㅠ 암튼 나는 그 사람들 구경하며 좀 쉬고 있는데, 생각보다 이들이 너무 빨리 올라오는 거다. 나는 여기까지 오는데 1시간은 걸린 것 같은데 이들은 한 번도 쉬지 않고 척척척 걸어 올라왔다. 박탈감... 쩝
분명히 눈으로 보면 하나도 멀어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내가 막상 걸어가면 걸어도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요상하다.
드디어 악명 높은 눈 비탈이 나왔다. 역시 인스타에서 본 대로 눈이 어마어마하게 쌓여있었다. 여기가 늘 그늘지는 곳이라서 그런가 보다. 혹시 몰라 아이스 액스를 꺼내 들었다. 근데 휘트니 산 갔다 오는 게 훨씬 힘들고 험했어서 그런지 막상 여기를 지나가는데 생각보다 전혀 무섭지 않았다. 일단 휘트니 산에 난 산비탈길은 발 한 개 정도 들어갈 정도로 폭이 좁았는데, 여기는 적어도 양발을 딛고 설 수 있을만한 폭이어서 매우 편안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나는 아이스 액스를 사용할 일이 없었다. 시작부터 휘트니에서 너무 호되게 훈련되었나 보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잖나. 내가 저길 건넌 후에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내 뒤에 독일 애들이 벌써 와서 건너고 있었다. 속도 무엇?
사진 왼쪽 상단에 사람들이 좀 있는데, 저기가 바로 포레스터 패스의 꼭대기다. 다 왔구나!
고개 정상에 다다르는 순간 지금까지 걸어온 광경은 다시 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휘트니 산이 저 멀리 보인다. 너무 멀어서 내가 이틀 전에 저길 갔다 왔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그 사이에 내리막과 오르막도 엄청났구나.
정상에 올라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내 등산복은 여전히 너무나 하얗다. 나는 등산할 때만 머리를 땋는데, 오랫동안 못 감은 머리가 주체가 안되기 때문에 양갈래를 하거나 땋아야 그나마 유지가 가능하다. 여기서 점심으로 또띠아에 스팸을 넣어 먹었고 후식으로 육포와 트윅스를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먹으면서 사진도 찍고 휴식도 좀 취하지만 이내 추워서 빨리 일어나고 싶어 진다. 옷이 땀에 젖어서 분명히 더운데 바람이 한번 휭 불면 오싹하게 추워진다. 그치만 이상하게 햇빛은 또 쨍쨍하고.
여기서도 글래새이딩 (눈 미끄럼틀) 타는 애들이 있었다. 미쳤어? 여기서 글리새이딩 하다가 못 멈추면 저 얼음 호수로 빠질 것 같은데? 난 여기선 차마 글래새이딩을 하지 못했다.
저 앞에 보이는 사람들은 영국 가족인데, 아들 하나 딸 하나랑 넷이서 PCT 하고 있었다. 리스펙... 사실 이 가족은 며칠 전 Crabtree Meadow에서 만난 적이 있다. 이들은 나중에 Bear Creek에서 또 마주치게 된다. 근데 잘 가다가 이 가족의 아빠가 갑자기 막 뛰어서 갔던 길을 돌아오는 거다. 알고 보니 패스 꼭대기에 하이킹 폴 하나를 두고 온 것. 내가 들고나가서 전해줬다. 정상에 있던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안타까워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 그것도 오르막을 다시 올라야 하다니 꺼이꺼이.
해가 떠서 눈이 많이 녹았다. 이제 발이 푹푹 빠진다. 내리막은 숨이 덜 차서 신이 나지만 한편으로는 이만큼 내려가면 이만큼 올라간다는 소리잖아??하는 생각에 마냥 신만 난진 않는다. 아이고 이걸 언제 다시 올라나가 싶다.
산의 고도에 따라 광경이 급하게 달라진다. 얼마 내려왔다고 벌써 눈이 많이 없어졌다. 저 멀리 보이는 낮은 고도의 숲으로 오늘 가야 한다. 와 이렇게 먼데를 오늘 간다고...? 굳이 오늘 안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다음 날 resupply를 받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웬만하면 빨리 가 있고 싶었다. 오늘의 종착지는 샬롯 레이크 (Charlotte Lake)로 가는 길과 키어싸지 패스 (Kearsarge) 로 가는 길이 만나는 길목이다.
위에 적었든이 PCT 하이커들은 1주일에 한번 정도는 하산을 해서 식량도 다시 채워 넣고 샤워도 하고 빨래도 하고 가족에게 전화도 하고 인터넷도 하고 한 1-2일 쉬다가 다시 산으로 돌아온다. 근데 키어싸지 패스 넘어서 가까운 동네까지 가는데만 20킬로가 넘는다. 하루 종일 걸린다.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PCT 하이커들은 전부다 여기서 키어싸지 패스를 넘어서 하산했다. 나중에 코튼볼, 나이트 캡, 스페이스 카우보이, Joe 이 정도만 다시 만나게 된다.
반면 JMT 하이커들은 고작(ㅋㅋㅋㅋ) 3주 남짓 등산하기 때문에 보통 산 중간중간 드물게 있는 캐빈이나 랜치에 미리 식량을 부쳐 놓고, 거기서 보급품을 픽업하는 식으로 resupply를 한다. 리써플라이는 생각보다 비싸다. 미리 택배로 부치는 값도 만만치 않고, 픽업과 보관 비용도 따로 내야 한다. 나는 하루 꼬박 걸어서 하산했다가 다시 올라오는 게 싫고 시간도 많이 걸릴 것 같아서 여기서 첫 번째로 리써플라이를 하기로 했다.
여기는 사실 아무 시설물도 없는 곳인데도 resupply가 가능하다. 그 이유는 어떤 주민이 돈을 받고 내 보급품을 픽업해서 여기까지 등산해 가져다주는 부업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게 창조경제인가요. 시설물이 없는데도 resupply가 가능한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 여기가 유일한 이유는 그나마 하산해서 내려가는 길 겨우 20킬로미터로 좀 짧은 편이기 때문이다. 이게 짧다니... 보통 남향으로 걷는 JMT 하이커들은 여기서 resupply를 하지 않지만, 나처럼 북향으로 걷는 하이커들은 여기가 일주일 정도 되는 지점이기에 여기서 resupply를 종종 한다.
샬롯 레이크 정션에 텐트를 치고 잠이 잠깐 들었다. 그러다 소변보고 싶어서 잠에서 깨서 텐트 밖으로 나왔다.
그때 내 앞에 펼쳐진 광경이다. 헐... 소변은 무슨. 바로 카메라 가지고 나와서 촬칵촬칵 찍기 바빴다. 보니까 어떤 남자애도 텐트 밖으로 나와서 사진 찍었다. 얘는 트레일 이름이 아메바였다. 물에 사는 어떤 아메바가 사람 몸에 들어가면 사람이 죽는 그런 아메바가 있다고 하더라. 자기가 PCT 하는 도중에 호수에서 가끔 수영을 할 때마다 혹시 그런 아메바 있는 거 아니냐고 하도 아메바 얘기를 해서 붙여진 트레일 이름이라고 했다.
이 광경을 마주하고는 지금까지 이 무거운 2킬로짜리 DSLR을 가져온 것이 참으로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 생애 가장 황홀했던 순간 중 하나다.
나중에 찾아보니까 이런 구름을 시에라 웨이브 (Sierra Wave)라고 한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서 종종 보이는 구름이라고 한다. 내가 JMT 끝나고 향수에 젖어서 페이스북 JMT 그룹 페이지에 들어가 봤는데, 내가 찍은 사진을 누가 좀 변형해서 올려놓은 것이다! 아니 뭐지? 자세히 봤더니, 같은 날 요세미티 (내 JMT의 종착역)에서 JMT를 시작한 하이커도 이 구름을 찍은 것이다! 세상에 200 km나 떨어져 있는 JMT 종착점에서 이 구름이 보였다니. 신기했다.
이렇게 6번째 날이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