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뮤어 트레일 - Day 7
출발: Charlotte Lake Junction
도착: Arrowhead Lake
총 거리: 10.3 km
누적 거리: 102.64 km
이제 산에 온 지 꼭 일주일이 되었다. 얼추 짜 놓은 일정과 맞게 걸었다. 이 전날 텐트 친 샬롯 레이크 (Charlotte Lake) 길목에서 미리 내가 부쳐놓은 보급품을 받고, 한 반나절 정도 처음으로 휴식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렇다! 오늘은 첫 번째 리써플라이 (resupply 보급품)을 받는 날이다. 보급품은 미리 산 중간에 먹을 것 등을 택배로 부쳐놓고 산 위에서 찾는 거다 (자세한 건 여기).
맨 밑부분을 보면 회색으로 칠해진 6월 9-10일은 플랜 B였고, 결국은 까만색으로 써진 6월 9일 일정을 실행했다.
내 보급품을 가져다주기로 한 사람과 11시에 내가 텐트 친 장소 (샬롯 레이크 길목)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오랜만에 느긋하게 늦잠 자고 일어나서 밥해먹고 따땃한 햇살 받으면서 이 사람을 기다리는데 12시가 돼도 안 오는 거다. 전화는 당연히 안 터지고 이를 어쩌나. 내가 날짜를 잘못 알았나. 내가 시간을 잘못 적었나. 내가 길목을 잘못 알아듣고 엉뚱한 데서 기다리고 있나 발동동하고 있었다.
근데 사람은 참 간사하다. 이런 핑곗거리가 생기니까 막 하산하고 싶어 졌다. 맘 속으로 딱 2시까지만 기다려보고 그때도 안 오면 그냥 내려가야겠다. 식량을 충전해야 하니까~라고 핑계를 대 놓고 아예 그냥 포기할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냥 장난으로 든 생각이 아니라 진지하게 다 때려치우고 내려가서 따뜻한 샤워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자고 그러고 싶었다. 매일 오르막 헉헉 대면서 몇 번을 쉬어가면서 거북이 속도로 올라가고, 배낭은 너무 무거워서 어깨가 내려앉을 것 같고, 매일 몇 번이나 얼음장 같은 찬 물길을 맨발로 걸어야 하고, 밤에는 영하까지 떨어지는 기온에 오돌오돌 떨면서 잠도 설쳐야 하고... 정말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이 사람이 안나타나서 차라리 내가 그만둘 수 있게 좋은 핑계거리가 생겼으면하고 소망했다.
이날 일기에는 이렇게 써있다.
Why am I doing this?
내가 도대체 이걸 왜 하고 있지?
이 사람은 결국 1시에 왔다. 결국 나는 등산을 계속하게 된다. 막상 이 사람이 내 보급품 들고 길에 딱 나타나니까 되게 반가웠다. 식량을 곰통에 채워 넣고 나니까 다시 배낭 무게가ㅠㅠ 꺼이꺼이
다시 무거워진 배낭을 메고 거진 2시가 다 돼서 하이킹을 시작했다. 역시나 오르막이다. 위에서 보니 샬롯 레이크가 나름 아름다웠다. 샬롯 레이크는 옆에서 캠핑해도 좋다고 하던데 아직은 겨울이라 눈이 너무 많아서 아무도 가지 않았다. 낮이 돼서 출발하니까 눈이 이미 슬러시가 되어 있었다. 발이 푹푹 빠져서 진이 쫙 빠지고 속도도 안 나고 식량도 다시 채워놨으니 배낭은 무겁고 짜증이 확 났다. 다들 1주일 지나면 trail leg가 생긴다고 했는데 왜 나는 안 생기는 거지? 광광
이제나 저제나 오늘도 눈길과 오르막의 향연이다. 오늘 넘을 고개는 글렌 패스 (Glen Pass)라는 고개다. 이 고개는 내가 가장 좋아라 했던 고개다. 글렌 패스는 일단 예쁘다. 진짜 예쁘다. 그리고 JMT 하기 몇 년 전, 파타고니아 남부에서 하이킹하면서 봤던 그 풍경이랑 글렌 패스랑 광경이 많이 비슷했다. 그래서 뭔가 더 친근감이 갔다. 글렌 패스는 한 3600미터가량 되는데, 가는 길이 전형적인 알파인 풍경이었다. 얼음이 잔뜩 떠 있는 에메랄드 빛 호수와 그늘이 지는 모든 경사로에 회색빛으로 쌓여 있는 눈. 그리고 드럽게 힘든 오르막.
앞에 하이커들이 지나간 길이 보인다. 내가 지금 저길 올라가야 한다는 거지? 저 끝에가 혹시 고개 꼭대기는 아닐까 이걸로 오르막 끝은 아닐까 내심 기대한다. 문제는 이런 기대를 한 6번을 하고 6번을 실망해야 7번째 정도에 진짜 고개가 나온다. 기대를 하고 꾸역꾸역 오르막을 올라갔는데도 여기가 고개가 아니라는 실망과, 여기까지도 힘들었는데 앞으로 더 오르막을 걸어야 한다는 좌절감에 나를 6번 정도는 담금질해야 고개를 넘을 수 있다.
오르막 경사는 거의 포레스터 패스 급으로 가팔랐는데 푹푹 빠지는 눈 때문에 훨씬 에너지 소모가 컸다. 그치만 가는 내내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 이어졌다. 그래 이런 식으로라도 위로를 받아야지 흑흑.
저기만 넘으면 끝일 거라는 기대를 했다가 실망을 하는 담금질을 반복하다 보면 기대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내 또 기대를 하고 만다. 아니 걷다 보면 언젠가는 고개 꼭대기에 다다른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도 왜 자꾸 기대를 하고 실망하는 걸까.
꺄! 몇 번의 기대와 실망 끝에 결국 글렌 패스에 도달했다. 파노라마처럼 탁 트인 광경이 정말 정말 아름다웠다.
보는데 활홀했다. 난 여기서 DSLR로 열심히 사진을 찍고 그 뒤로 한 3일 동안은 디카를 꺼내지 않았다. 사실 가방 내려놓고 주섬주섬 디카 꺼내서 사진 찍고 이러면 시간이 꽤 걸려서 웬만한 걸 마주하지 않는 이상 안 꺼내게 되더라. 대신 주머니에 늘 있는 아이폰으로는 사진을 계속 찍었다.
사진 오른쪽으로 나무들하고 호수 여러 개 있는 곳이 이제 내려갈 곳이다. 자 이제 내려가 볼까요?
내려가는 곳이 이렇다. 어이없어ㅋㅋ 다행인 것은 이미 휘트니에서 눈 비탈에게 호되게 단련이 돼서 그런지 막상 걷기 시작하니까 막 엄청 무섭진 않았다. 역시 사람의 적응의 동물인가 봐. 이제 아이스 액스는 쓸 생각도 안 했고 그냥 하이킹 폴로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치만 방심하다가는 녹은 눈 때문에 발이 쭉 미끄러지거나 푹 빠지면 혈압이 확 상승한다. 혈압이 상승한다는 걸 어떻게 아냐면 손끝, 발끝까지 피가 갑자기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마치 위험한 상황에 맞닥드렸을 때 (예를 들면 운전하고 가다가 사고가 날 뻔했다든지) 몸에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반사적인 반응이랑 비슷하다.
한참 뒤 드디어 아까 글렌 패스에서 저 멀리 보이던 호수에 도달했다. 아마 이름이 래 레이크 (Rae Lake)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 옆에 봉우리가 우뚝 솓아있는데 페인티드 레이디 (Painted Lady)라고 한다. 자세히 보면 층층이 색깔이 다르다. 실제로 보면 예뻤는데 사진상으로는 잘 안 보이네.
Tranquil 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호수였다. 호수 중간에 돌섬 같은 것도 있고, 물도 까만 것이 되게 깊어 보였다. 게다가 상당히 컸다. 가도가도 계속 래 레이크 옆을 따라 걷고 있었다. 여기 주변에 텐트 칠만한 자리가 꽤 많았는데, 이날은 늦게 시작했으므로 조금만 더 가기로 했다.
이날 잠은 Arrowhead Lake 옆에서 자기로 했다. 좀 얕은 호수인데 주변에 사슴이 참 많았다. 정말 평화롭고 고요했다. 물가 바로 옆에 텐트를 치면 밤새 텐트 안에 수증기가 많이 차서 침낭 같은 게 젖게 되고 텐트 안팎으로 서리가 많이 낀다. 그래서 물가에서 어느 정도는 떨어진 곳에 텐트를 치고 싶었지만 이 구간은 죄~다 호수 여서도 대체 멀리다가 텐트 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산에서 일주일이 지나갔다. 솔직히 만약 하산하는 길이 20킬로미터가 아니가 바로 옆에 있었다면 난 그냥 내려왔을 것 같다. 정말 초반에는 힘들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