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뮤어 트레일 - Day 4
휘트니 산 정상 왕복하는 날
출발: Guitar lake
도착: Crabtree Meadow
총 거리: 휘트니 왕복 15.13 km + 4.35 km
누적 거리: 57.58 km
새벽에 출발하는 이유는 해가 뜨면 눈이 녹아서 발이 푹푹 빠지고 눈 비탈에서 미끄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대한 일찍 출발해서 일찍 돌아와야 한다. 밤늦게까지 잠이 잘 안 와서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만하니까 새벽 1시 반이 됐다. 이제 일어나서 나가야 하는데 가야 되는 데를 옹알거렸지만 너무 추우니까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거의 2시가 다 돼서 일어났다. 한 손에는 하이킹 폴, 다른 한 손에는 아이스 액스를 들고, 옷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껴 입고, 목에는 반다나를 두르고, 머리에는 모자와 헤드라이트를 눌러썼다. 간단하게 물, 트레일 바, 트레일 믹스, 양말 한 켤레를 전부 다를 배낭에 챙기고 새벽 2시 반에나 출발했다. 부츠에는 마이크로 스파이크 (크램폰보다 가벼운 종류)를 신발에 끼우고 걷는다. 밤새 영하로 떨어지기 때문에 쌓인 눈들이 전부 얼음처럼 꽝꽝 얼어있어서 마이크로 스파이크 없이는 계속 미끄러진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깜깜한 밤이었다. 저 앞에 헤드라이트 불빛이 몇 개 보일 뿐이다. 뒤 돌아보니 내 뒤에도 저렇게 불빛을 비추며 같이 휘트니 산으로 가고 있었다. PCT 하이커인 롤러코스터와 동시에 출발했는데 자기는 오르막을 기가 막히게 천천히 올라간다고 했지만, 결과는 내가 더 느렸다. 조금 느린 게 아니라 한.참. 느렸다. 이때를 기점으로 롤러코스터는 다시 내려올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서서히 동이 뜨기 시작하니 사방이 보이게 됐다. 아 감사해라. 태양신님 섬기겠습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산비탈 경사는 더 심해지고 눈도 더 많아진다. 앞에 난 발자국을 따라가는데 이 부분이 잘 얼어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만 바위 주변은 대체로 덜 얼어있거나 구멍이 나 있는 경우가 있어서 발이 쑥 빠지거나 비탈에서 미끄러질 수가 있다. 내가 걷는 내내 한 생각은 뭐였을까? 지금 여기서 한 걸음 잘못 디디면 나는 죽는다였다.
그러다가 앞 뒤 하이커들 모두가 식겁할만한 바위가 트레일을 떠억하니 막고 있었다. 내 앞에 PCT 하이커가 한 3명 있었는데, 맨 앞에 있는 하이커가 약간 패닉했는지 한참 동안 바위를 건너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길막을 하고 있었다. 결국엔 뒤돌아서 나오더라 (진심 100% 이해 갔다). 그래서 그 뒤에 조로록 기다리던 나를 포함한 하이커들은 뒷걸음질을 쳐서 비켜줄 공간이 있는 곳까지 나왔다. 패닉했던 PCT 하이커는 결국 휘트니는 가지 못하고 내려갔다. 내 앞에 나머지 2명은 커플이었는데 PCT 하면서 맺어진 유럽-미국 커플이었다. 여자애는 코튼볼 (Cotton ball 화장솜), 남자애는 나이트 캡 (Night cap 밤에 자기 전에 한 잔 하는 술)이었다. 이 커플들과는 앞으로 거의 매일 만나게 된다.
걷다 보면 사진을 찍을까 말까 자주 고민하게 된다. 사진을 찍어서 이 무시무시한 눈 비탈을 기록으로 남겨 놓고 싶지만, 서 있는 것도 무서운데 하이킹 폴을 잠시 떼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퍼를 열고 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는 게 여간 무서운 게 아니다. 그리고 사진을 찍으면 찍을수록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에 이른 아침까지 하산해야 하는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 그래서 최대한 사진은 자제하면서 올라갔다.
근데 정말 가도 가도 너무 멀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저길까 싶으면 더 가야 하고, 거기에 도착하면 또 저 멀리 보이는 저길까 싶고 엉엉엉. 눈 비탈이니까 속도도 느리고 너무 춥고 손 시리고 바람 불어서 볼 땡땡 때리고 졸려 죽겠고 배고프고 발 시려 죽겠고. 언제 끝나냐... 눈밭을 계속 걷다 보니까 신발이 방수인데도 발이 다 젖었다.
원래 목표는 해 뜨는 시간 즈음에 도착하는 게 목표였는데, 가까워질수록 1킬로미터를 가는 데 한 시간이 족히 넘게 걸리는 바람에 해 뜨고 나서 두 시간이 더 지나서 정상에 도착했다. 도착은 오전 7시 20분이었다. 8 km를 걷는데 5시간 남짓 걸렸다. 고도는 3300미터에서 시작해서 4200까지 올라왔다. 휘트니는 미국에서 (알래스카 제외) 가장 높은 산이다.
여기가 정상에 오르기 직전 마지막 경사로이다. 정말 까마득한 높이였고 까마득한 거리였다. 이 사진은 사실 내려오면서 찍은 거다. 올라갈 때는 너무 힘들어서 사진 찍을 겨를이 없었다.
다 올라오니 경치를 볼 여력은 별로 없었고 너무 춥고 배고파서 일단 휘트니 헛 (hut)에 들어갔다. 여기는 벼락이 칠 때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작은 대피소인데 지붕과 벽이 있다. 지붕과 벽이 있는 게 얼마나 크나큰 행복감을 주는지. 인류 최대 발명품은 지붕과 벽이다. 들어가 보니 아까 바위에서 마주친 코튼볼과 나이트 캡 (유럽+미국 커플), 그리고 스페이스 카우보이 (Space cowboy인데 나이 거의 50대 다 돼가는 아저씨고 앞으로도 계속 만나게 됨), 그리고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코튼볼하고 나이트캡은 아예 버너랑 핫초코를 가져와서 핫초코 끓여 마셨다. 추위와 산에서 꽃피는 참사랑. 나도 한입만... 이때는 아직 안 친해져서 차마 한입만이라고 못했다. 정말 부러웠을 따름이었다. 나도 한입만...
일단 얼은 발을 녹이느라 양말 벗고 새 양말로 갈아 신었는데도 너무 추워서 다들 밖에 나가서 사진도 찍고 구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사진에 보이는 발이 내 발이다. 저 샴페인은 론 파인 쪽에서 바로 올라온 사람들이 가지고 왔다. 난 술을 잘 안 하는데 샴페인 권해서 한모금 했다. 이 사람들은 당일치기 등산으로 휘트니만 올라갔다가 다시 론 파인으로 내려갈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꾀죄죄한 나와 PCT 하이커들을 매우 신기해했다. 만약 내가 더 남쪽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여기서 바로 시작했다면 이 사람들처럼 론 파인에서 휘트니로 곧장 올라와서 JMT를 시작했을 거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나가서 구경도 좀 하고 사진도 찍어야지. 저 머얼리 나 보이는 길을 따라가면 론파인이 나온다. 내가 저기서 차 타고 남쪽으로 50킬로를 더 가서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4일 동안 걸어온 거다.
고쟁이핏 제대로다. 저 발목 감싸는 거는 게이터 (gaiters)라고 하는데, 저걸 신으면 걸을 때 눈, 자갈, 모래 같은 것들이 양말이나 신발에 들어가는 걸 막아줘서 산에 갈 때 아주 유용하다. 방수가 되는 게이터도 있지만 무게를 줄이기 위해 그냥 천으로 된 걸 샀다. 나는 화려하게 보라색에 표범무늬를 선택했다. 근데 진짜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은가 봐. 한 일주일 뒤에 똑같은 게이터 한 여자분을 만났다. 아 사진이라도 찍어둘 걸.
이제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춥기도 정말 추웠고 보통 오전 10시부터 눈이 녹기 시작하니까 낼름낼름 내려가야 했다. 휘트니 정상에서 약 1시간을 보내고 오전 8시 30분에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부지런히 내려가도 정오쯤 다 내려갈 텐데.
아까 올라갈 때는 해가 아직 안 떠서 안 보였는데 내려가는 길에 보니까 뙇! 론 파인 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저길로 올라온 거였다. 와우 대단하네요. 저렇게 지그재그로 나 있는 길을 스위치백 (switch back)이라고 한다. 일자로 올라가면 너무 경사가 급하고 힘드니까 지그재그로 가는 거다. 근데 한밤중에 올라가면 길이 잘 안보이기 때문에 각자 알아서 눈 비탈에서 지그재그 하느라 길이 여러 개 나 있었다.
내가 정녕 이 길을 다시 되돌아 가야 하다니.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제 너무 잠이 쏟아지는 거다. 왜 밤새고 나서 한 오전 10시까지 멀쩡하다가 딱 점심 먹고 나면 정말 어떻게 손 쓸 수 없이 쏟아지는 잠 있잖아요? 딱 그런 잠이 오더라. 눈 비탈은 조오오오온나 무서운데 그 와중에 잠은 또 오는 환장한 노릇. 한발 한발 신중하게 더뎌도 모자랄 판에 졸린 게 말이 안 되지만서도 졸렸다. 게다가 해가 뜨고 나니 눈이 금세 녹아서 미끄럽기까지!
경사를 보면 알겠지만 여기서 헛디뎌 굴렀다간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근데도 잠이 와서 환장). 내가 아까 한 손에 아이스 액스를 챙겼다고 했는데, 이런 데서 미끄러지면 아이스 액스를 눈 비탈에 콱 찍어가지고 스스로 미끄러지는 것을 멈춰야 한다. 어이없다. 미끄러지는 와중에 아이스 액스로 내 한 몸 내가 살려야 한다니. 이것도 잘못 찍으면 손이나 발이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이런 건 어떻게 배우냐고? 유튜브로 배웠다. 유튜브에 막 아저씨가 눈 비탈에서 일부러 넘어지면서 스스로 아이스 액스를 콱 찍어서 대롱대롱 매달려서 더 이상 미끄러지는 걸 방지하는 그런 연습 영상이 나온다. 그런 거 보고 배웠다. 당시 내가 사는 곳은 평원이라 산이 하나도 없어서 연습할 데가 없고 바로 실전에 투입됐다.
눈 비탈길이 거의 끝나간다. 쫌만 힘내! 눈떠! 졸면 안 돼! 저 오른쪽에 드디어 출발했던 Guitar Lake가 보인다. 위에서 보니까 진짜 기타 모양처럼 생겼다. 아까 올라올 때는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구경하면서 내려가니까 좀 재밌긴 했다. 한참을 졸려하면서 내려가는데 저어기 앞에 뭔가가 보인다. 그것은!!!!
헐 미끄럼틀? 천재 아냐? 와우! 나도 저런 광경을 보면서 눈 미끄럼틀을 탈 수 있다 이거지? 갑자기 걸음이 빨라졌다. 영어로는 glissading 한다고 하더라. 이런 경치를 보며 무료 (썰매 없는) 눈썰매를 탈 수 있다는 거지? 앞에 PCT 애들 두 명이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얘네들 하는 거 보니까 내려가다가 속도가 붙거나 방향이 틀어져서 바위로 돌진하게 될 경우, 아이스 액스를 콱 찍어가지고 방향을 틀거나 멈췄다. 꺄! 내가 유튜브로 공부한 그 아이스 액스 사용법을 드디어 실전에 써볼 수 있다니! 꺄르륵 거리며 미끄럼틀 타고 내려왔다. (그 뒤 엉덩이가 다 젖어서 축축...) 드디어 아이스 액스로 미끄럼을 멈추는 법을 실전에 써먹어 봤다. 근데 반전은 휘트니 갔다 온 이후로 눈 비탈에서 좀 자신감이 붙었는지 그 뒤로는 아무리 가파른 눈 비탈이어도 아이스 액스를 거의 안 쓰게 됐다. 아이스 액스는 그저 내 배낭에 붙은 장식품으로 전락.
다 내려오고 나니까 오후 12시 30분이었다. 어휴 넘나 힘들었다. 진짜 너무 힘들었다. 나는 낮잠 좀 자고 세수도 하고 그냥 쉬려고 했는데 롤러코스터는 텐트 걷어서 그날 오후에 바로 떠나더라. 대단쓰... 그걸 보고 나도 아주 약간 자극을 받아서 아주 쪼그만 더 걷자 해서 텐트 걷고 주섬주섬 짐을 다 챙겨서 전전날 묵었던 Crabtree Meadow까지만 가기로 했다.
이렇게 넷째 날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