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뮤어 트레일 종주기 - Day 2
출발: PCT 735.25 mile 지점
도착: Crabtree Meadow (PCT 755 mile 지점)
총 거리: 22.13 km
누적 거리: 33.80 km
존 뮤어 트레일은 국립공원 3 군데를 지나간다. 나는 원래 시작점보다 50 km 남쪽인 데쓰밸리 (Death Valley)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총 국립공원 4 군데를 지나가게 됐다. 이 날 입성한 곳은 세콰이어 (Sequoia), 킹스 캐년 (Kings Canyon) 국립공원이다. 들어가는 입구에 이정표가 있는데 고도가 약 3450미터이다. 이 전날부터 계속 오르막에 오르막을 거듭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앞으로도 오르막만 남았다.
헥헥대며 오르막을 걷고 걸어 Rock Creek에 도착했다. 만약 이 전날 계획대로 걸었다면, 여기가 이날의 목표지점이었을 거다. 그치만 이전날 좀 많이 걸은 덕에 Rock Creek에는 점심때 즈음 도착하게 됐다. Creek은 말 그대로 물이 흐르는 개울을 뜻한다.
사진을 보니 이때 생각이 난다. 발톱을 보면 벗겨진 매니큐어가 발려 있는데 이건 2월에 한국에 갔을 때 받고 온 것을 귀찮아서 지우지 않고 6월이 된 이때까지 내버려 뒀다. 좀 지우고라도 갈걸. 그치만 젤 네일이라 내 힘으로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살롱에 가는 건 귀찮...
이런 냇물은 밖에서 보면 되게 별거 아니어 보인다. 깊지도 않고 넓지도 않다. 그치만 이게 킬러다. 전년도 9월부터 겨우내 쌓였던 얼음과 눈이 녹은 물이라서 정말 발이 찢어지는 느낌이 들도록 차갑다. 이런 차가움을 처음 느껴본 곳은 몽골이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몽골 돈보스코 청소년센터에 자원봉사를 하러 갔었다. 대낮에는 땡볕 때문에 땀을 한 바가지 흘릴 정도로 덥지만 수돗가에 가서 물로 세수 한번 하면 땀이 쏙 들어간다. 이때 얼음장 같다는 게 뭔지 처음으로 실감했다. 손을 씻는 데에도 비누가 씻겨질 때까지 손을 물에 대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2주 동안 게르에서 지냈는데 이곳에는 따뜻한 물도 없고 샤워장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에 다른 자원봉사자들은 이 수돗가에서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용기를 얻어 나도 기름기에 먼지가 덕지덕지 낀 머리를 감아보겠다고 도전했는데, 내 생에 머리를 그렇게 빨리 감아본 적이 없었다. 감고 나니 두드러기가 난 것처럼 온 두피가 빨갛게 됐다. 한번 도전해 보고는 그냥 2주 내내 씻는 건 포기했다. 심지어 이때도 생리해서 정말 찜찜했다 어흑
JMT에 워낙 시냇물이 많기도 하고 눈까지 녹아서 물이 더 불어나, 없었던 곳에 물줄기가 흐르는 경우도 많았다. 물을 건너는 건 생각보다 힘들고 귀찮다. 사람들마다 산에서 물을 건널 때는 신발을 신고 건너는 것이 낫냐 벗고 건너는 것이 낫냐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 신발을 벗고 건너면 물아래 바위나 돌이 상당히 미끄럽기 때문에 자칫 넘어지면 더 큰 일 (침낭이 젖는다든가)이 나기 때문에 좀 위험하다. 그치만 신발을 신고 걸으면 물에 푸욱 적셔진 무거운 부츠를 신고 하루 종일 걸어야 한다. 나는 예전부터 부츠가 젖는 것을 매우매우 싫어해서 물을 건널 때마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었다. 나는 산에서는 부츠가 젖으면 큰일 난다는 주의다. 밤에 벗어놓고 말리면 될 것 같지만, 절대 안 마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젖은 부츠가 밤새 마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마르지 않는 부츠를 신고 하루 종일 눈밭을 걸으면 발에 감각이 없어진다. 발가락만 감각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발바닥에도 감각이 없어진다. 진짜 이러다가 동상 걸려서 발가락 잘라야 하는 거 아니야?하는 걱정이 하루에도 대여섯 번은 들었다. 내가 왜 사서 이런 고생을...
그리고 물을 건너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가방 내려놓고, 앉아서 양말 벗고, 게이터 벗고, 신발 끈 묶어서 목에다 걸고, 물 건너고 (그것도 균형을 잘 잡아야 하므로 천천히), 발에 물기 닦고, 양말 신고, 신발 신고, 게이터 신고, 다시 가방 챙기고. 이러면 벌써 15분이 후딱 가 있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대체로 하이커들은 물을 건너고 나서 점심을 먹거나 낮잠을 잔다. 햇볕이 좋으면 그때를 이용해서 젖은 부츠나 텐트 등을 바싹 말린다. 그래서 물가에서는 사람을 꽤 자주 만났다.
물 건너에는 이미 점심을 먹고 있는 PCT 하이커들과 만났다. 여기서 Cookie monster, Jet fighter, Bacon, Exsy라는 네 명의 PCT 하이커를 만났다. 산에서는 트레일 네임 (trail name)이라고 별명을 부른다. 보통은 누군가가 옆에서 별명을 지어주는 데 나는 끝까지 트레일 네임이 없어서 좀 속상했다. 베이컨은 너무 베이컨을 먹고 싶어 해서 베이컨인가?물었더니 케빈 베이컨을 닮아서 붙은 별명이란다. 베이컨은 매우 친절했다. 그의 친구인 Exsy라는 애는 알고 보니 내가 가려는 새 직장 근처에 사는 애였다. 근데 거기가 도시라기 보담은 거의 시골이라서 걔가 나보고 왜 직장을 도대체 거기로 잡았냐며 갸우뚱했다. 아니 나 고용해주겠다는데 어디든 가야죠 안 가겠어요? 베이컨하고 Exsy랑은 나중에 다시 마주치게 된다. 나머지는 다시 본 적이 없다.
나도 물을 건넌 김에 점심 먹었다. PCT 하이커들은 이미 1000 km 가량을 걸어오면서 같이 많이 친해져 있어서 내가 쉽게 대화에 끼질 못하겠더라. 게다가 내 옷이 너어무 깨끗한 데다가 걷는 속도가 너무 느리니까 도대체 너는 어디서 왔냐 뭐하냐 묻더라. 나는 겨우(!) JMT 하러 온 거라고 그랬더니 약간 "뭐 그런 짧은 걸 하러왔어"하는 식으로 비웃어서 좀 창피하기도 했고 속상했다. 안 그래도 속도도 안 나고 힘들어 죽겠는데 더 위축됐다. (그러나 사이다 반전이 있다. 한 일주일 뒤에?) 위축이 됐던 또 하나의 이유는 내가 Exsy를 만났을 때 악수를 청했는데 (미국에서는 보통 서로 통성명하며 악수하는 것이 흔하다), Exsy가 약간 훗 비웃으면서 산에서는 feast bump를 한다고 했다. 왜냐면 손이 늘 더럽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거 모르고 촌쓰럽게 악수하려고 했다.
걷다 보니 휘트니 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롸 내가 이틀 내에 저길 가야 한다니. 저기까지 언제 가지? Rock creek을 지나고 나서부터는 무조건 오르막이다. 진짜 자비 없는 오르막이었다. 끝이 없는 오르막이었다. 게다가 완전 땡볕에 햇빛 쨍쨍에 모기 작렬. 모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내가 아마존 정글에서 1주일 동안 서바이벌 캠핑을 했는데, 거기보다 모기가 많았다. 분명히 나는 걸어가면서 움직이고 있는데도 모기가 하도 많이 쫓아와서 귀에서 앵앵 소리가 계속 들린다. 숨이 차고 정말 너무 쉬고 싶은데 모기가 진짜 끈질기게 따라와서 차마 쉴 수도 없었다.
계속 "이 길을 대신 걸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 삶은 그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고 그 누구도 이 길을 나 대신 걸어줄 수 없다"를 되뇌었다. 하산하려면 되돌아 가거나 아니면 앞으로 일주일은 걸어야 바깥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 안 했지, 진심으로 하산하는 길이 옆에 있었다면 난 포기하고 내려왔을 거다. "내가 왜 이걸 한다고 했지? 뭘 위해서? 내가 누군가에게 왜 내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데? 내가 과연 이런 하이킹을 좋아하기는 하는 걸까" 의구심이 들었다. 이 생각이 드는 걸 어떤 하이커가 hiking existential moment이라고 했다. 하이커들 모두 언젠가는 이런 순간이 있나 보다. 왜 이렇게 힘든 일을 뭘 위해서 하겠다고 한 건지. 문제는 난 이런 생각에 하루에도 수십 번 들었다. 한편으로는 지금 비가 안 와서 참 다행이고 낮엔 좀 덥지만 날씨가 좋아서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진짜 끊임없는 오르막길 끝에 갑자기 모기가 사라졌다. 휴 이를 틈타 이제 좀 쉬어 볼까? 했더니 눈밭이 시작됐다. 이때 너어어무 힘들어서 사진 찍은 게 아무것도 없다. 도무지 걸어도 속도가 안 나고 아무리 걸어도 종착지에 가까워지질 않았다. 가끔 악몽을 꾸면 누군가가 쫓아와서 내가 도망가야 하는데 다리가 돌덩이처럼 무거워서 도대체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는 그런 꿈만 같았다. 나는 용을 쓴다고 쓰고 있는데 정작 뒤 돌아보면 고작 몇 걸음 걸었을 뿐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오르막을 오르다가 저 위에 아까 점심때 만난 PCT 하이커 몇 명이 쉬고 있었다. 그들은 Rock Creek에서 점심 먹고 낮잠까지 자고 나보다 훨씬 늦게 출발했지만 워낙 trail leg가 있으니 아주 슉슉 나를 지나쳐 갔다. 걔들을 보고 왠지 힘이 나서 영차영차 그네들이 있는 곳까지 갔는데, 저보고 어떤 맛을 좋아하냐고 하더라. 읭? 내가 영어를 잘못 들었나 싶어서 뭐라고?했더니 옆에 쌓여있는 눈을 한 움큼 코펠에 푸더니 그 위에 레모네이드 파우더를 뿌려줬다. 꺄! 산에서 이런 천연 빙수를! 정말 맛있어서 허겁지겁 먹었다. 사진 찍어둘 걸 아쉽지만 너무 힘들어서 그럴 여력이 절대 없었다. 그들이 소중한 레모네이드 파우더를 선사해주셔서 매우 감사했다.
이날의 종착점인 Crabtree Meadow에 다 와갈 때 즈음 이미 해는 저물고 있어서 상당히 추웠다. 고도도 높아졌고. Crabtree Meadow가 코 앞이었는데 그 바로 앞에 시냇물이 콸콸 흐르고 있었다. 아 여기서 또 신발을 벗고 물을 건너야 하다니. 믿고 싶지 않았다. PCT 하이커들 중에 나와 유일하게 속도가 비슷한 하이커인 Blue와 이 냇물 앞에서 한숨을 쉬며 밍기적 거렸다. 저게 얼마나 차가운 지 알거든. 그치만 어쩌겠냐 건너야지. 꾸역꾸역 건너고 나니 먼저 도착해있던 PCT 하이커들이 박수를 쳐줬다. 나에게 쳐준 건 아니고 그들과 함께 걸어온 Blue에게 쳐 준거다.
이틀째도 이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