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주방엔 OOO가 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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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를 처음 시작할 때 가장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아마 "소금 한 꼬집 넣으세요" 혹은 "소금을 적정량 넣으세요"라는 말이었다. 계량되지 않는 양을 넣으라고? 나는 요리의 요자도 모르다가 미국에서 엄마 아빠 없이 살려니 생존 요리를 시작했다. 헌데 레서피마다 "조금" 혹은 "약간"을 넣으라는데, 이게 사람마다 다 다를 텐데 도대체 이 레서피 주인이 생각하는 조금과 나의 조금이 판이하게 다르면 어떡하라고? 레서피에서 이렇게 무책임하게 알려줘도 돼? 미국 레서피에도 꼬집 (pinch) 넣어라 아니면 소량 (smidgen) 넣어라 이런 얘기가 나오는데, 이 역시 매우 애매한 양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렇게 꼬집과 소량을 재는 계량스푼 (measuring spoon)이 있었다! 큰 술 (table spoon), 작은 술 (tea spoon) 등의 계량스푼은 여기저기 자주 쓰이니까 신기하진 않은데, 이렇게 "꼬집"의 양을 재 주는 계량스푼이 있다니!? 이 작은 계량스푼은 다음과 같은 양을 재 준다.
Dash: 약간 1/8 tsp
Pinch: 꼬집 1/16 tsp
Smidgen: 소량 1/32 tsp
전 세계 공용인 줄은 모르겠고 레서피 주인마다 꼬집의 양이 위와 같진 않겠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가 한 꼬집인지는 알 수 있다. 사실 이걸 사게 된 건 빵을 만들기 시작하면서이다. 빵 레서피북에서 이스트를 1/16 티스푼 (tsp)인 한 꼬집을 넣으라고 하는데 내가 가진 가장 작은 계량스푼은 1/4 tsp이라 아마존을 뒤적뒤적하니 이걸 팔더라. 이렇게 나의 주방에는 또 뭐가 늘어간다.
집에서 팝콘을 만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나는, 집에서 팝콘을 만들 수 있는 줄도 몰랐다. 그냥 슈퍼에서 파는 전자렌지 돌려 먹는 것 혹은 영화관에서 파는 것이 팝콘이었다. 근데 남편이랑 데이트하던 시절, 집에서 영화를 보는데 자기가 팝콘을 만들어 오겠다는 거다. 알고 보니 그냥 옥수수 알갱이 말린 것을 사서, 냄비나 팬에 넣고, 기름 좀 두르고, 뚜껑 덮으면 알아서 퐝퐝 팝콘이 터지더라. 중간에 냄비를 좀 흔들어 주고. 팝콘 터지는 소리가 잦아들 즈음 (터지고 한 3초 동안 아무 터지는 소리가 안 나면) 불 끄고 쉐낏쉐낏 좀 해주고, 소금 뿌리면 끝이다. 이렇게 간단할 수가? 왜 이렇게 간단한 것을 전자렌지 돌려 먹도록 파는 걸까?
미국에선 이렇게 팝콘을 집에서 다들 튀겨 먹는지 팝콘 전용 냄비 (popcorn popper)도 있다. 세상에. 별의별 게 다 있다. 편리하게 저 냄비 자체를 가스렌지 위에 바로 올릴 수 있다. 그리고 옥수수 알갱이가 터지기 시작하면 냄비를 잡고 흔드는 게 아니라, 저 손잡이를 돌리면 된다. 이미 터져서 팝콘이 된 알갱이들은 위로 보내고 아직 안 터진 알갱이들이 바닥으로 갈 수 있도록.
이건 결혼 선물로 받은 건데 사실 딱 한 번 쓰고 넣어 뒀다. 그 이유는 설거지 하기가 매우 귀찮아서... 뭔가 집에서 분위기 내고 영화를 보려면 장난감처럼 갖고 있는 건 좋지만, 역시 내가 내 돈 주고 사지는 않을 물건. 그냥 집에서 냄비 쓰는 것이 가장 편하다.
미국에서는 손님에게 5시에 오라고 하면 5시 정각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처음에 난 이걸 몰랐다가 뻘쭘한 일이 있었다, 우리 과에서 신입 교수 왔다고 학장님 집에서 파티를 했는데, 5시에 시작한다 해서 나는 동방예의지국의 딸답게 5분 일찍 도착했다. 4시 55분에 문을 두드렸는데 다른 교수들은 아무도 안 온 거다. 다섯 시에 오겠지 했는데, 5시 15분이 돼서야 한 두 명씩 오기 시작했고, 6시쯤 돼야 전부 다 모였다. 아우 나 혼자 학장님이랑 사모님이랑 할 얘기도 별로 없고 너무 뻘쭘...
나중에 보니 이렇게 사람들이 보통 15분에서 30분 (사람 많은 파티면 더 늦게 오기도 한다) 정도 늦게 오는 게 관례더라. 집주인은 먼저 온 사람들에게 다과를 제공한다. 그니까 보통 손님을 초대하면 다 같이 땡 모여어 땡 앉아서 바로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에피타이저를 내 오고 한 30분정도 다른 손님들 다 올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 오면 그때 식사를 시작한다. 그래서 그런지 손님 초대할 때, 저녁만 준비하면 안 된다. 에피타이저를 따로 준비해야 한다.
보통 미국 사람 집에 초대를 받으면 나쵸에 치즈 딥, 피타 칩에 아티쵸크 딥, 프렛젤 등 과자류를 많이 내 온다. 이거 먹으면 저녁 맛 없어지는 거 아니에요? 우리나라에서는 밥 먹기 전에 과자 못 먹게 하는데, 여기서는 과자 먹으라고 주는 게 이상하다. 꼭 과자만 주는 건 아니다. 작게 자른 당근, 브로콜리, 샐러리 등등 야채와 그에 곁들일 소스도 흔한 에피타이저다.
아무튼 사진에 보이는 건 에피타이저 서빙 접시 (appetizer dish)다. 나쵸나 과자류를 담고, 맨 가운 데에는 찍어 먹을 수 있는 소스나 딥을 넣는다. 이것 역시 결혼 선물로 받은 건데, 쓸 일이 별로 없었다. 우리 집은 과자 같은 걸 에피타이저로 내 오질 않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식으로 과일을 보통 준다. 아니면 당근, 방울토마토 등을 주는데, 딱히 소스를 찍어먹지 않아서 저 접시를 쓸 일이 없다. 쩝... 아쉽다.
박사 때 살이 찌길래 좀 건강하게 먹어보려고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에 완죠니 걸 크러시 여자 교수님이 한 분 있었는데, 그분은 아예 오피스에 올리브 오일을 병 째로 갖다 놓고 샐러드에 뿌려 드시는 걸 봤다. 오 멋있는데? 나도 그렇게 해볼까 했는데, 올리브 오일만 뿌리면 맛이 없잖아요...? 안 그래도 샐러든데 드레싱이라도 좀 맛있어야지. 그래서 포기.
그치만 샐러드에 드레싱을 뿌려가지고 도시락을 싸면, 점심, 저녁때 즈음엔 채소들이 다 흐물흐물 숨이 죽어 있고 맛이 없어진다. 그래서 집에 있는 제일 작은 락앤락에 담아봤는데, 그래도 락앤락이 너무 클뿐더러 뚜껑 주변에 자꾸 묻고 흘려서 관리가 어려웠다. 혹시나 나 같은 사람이 있을까 폭풍 검색! 도시락 용 샐러드 드레싱 용기 (dressing-to-go)를 파는 거다!? 세상엔 정말 별게 다 있다.
아주 조그만 실리콘으로 된 병인데 다 분리가 돼서 세척하기도 매우 매우 편하고, 용기 양도 딱 적당해서 1-2끼어치를 담기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 샌다ㅠㅠ 뚜껑 주변도 지저분해지지 않고. 샐러드를 도시락 싸가지고 다닐 거면 이거 진짜 최고!
보통 쉐이커라고 하면 단백질 혹은 칵테일 쉐이커를 떠올리는데, 둘 다 안 먹는 나는 가장 먼저 샐러드 드레싱 쉐이커 (Salad dressing shaker)를 떠올린다. 말 그대로 집에서 샐러드 드레싱을 만들 때 쓰는 쉐이커이다. 여기에 재료를 넣고 흔들흔들~하면 드레싱이 완성된다. 주둥이가 디자인이 잘 돼 있어서 여기저기 흐르지 않고 아주 깔끔하게 드레싱을 따라낼 수 있다. 안 쓸 때나 흔들 때는 뚜껑을 닫으면 끝! 한 번에 왕창 만들어 놓고 냉장고에 뒀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쓴다. 매우 유용!
남편이 만드는 샐러드 드레싱 (사진에 있는 드레싱)이 지인짜 맛있는데, 올리브 오일 대신에 플래스 시드 오일 (flax seed oil)을 넣고, 발사믹 식초 (balsamic vinegar) 대신에 레드 와인 식초 (red wine vinegar)를 넣는다. 그리고 오레가노 (oregano), 양파 가루 (onioin powder), 마늘 가루 (garlic powder), 소금, 후추를 넣고 쉐낏쉐낏하면 된다. 정확한 양을 알려달라고 했는데 자기 감대로 한다고 모른단다.
우리 집엔 없어도 딱히 크게 지장이 없고 다른 것들로 대체 가능하지만, 있으면 정말 편한 것들이 많다. 이래서 맥시멀 리스트. 그중 하나가 이 샐러드 보울과 스푼 세트 (salad bowl)다. 결혼한다고 하니 직장 동료가 이 세트를 사준 건데, 내가 받은 결혼 선물 중에 제일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다. 이걸 받기 전에는 그냥 믹싱 볼 (mixing bowl)에다가 샐러드 만들어 먹었는데, 우리 집에 있는 유리로 된 믹싱 볼은 무겁고 부피도 너무 커서 쓸 때마다 조금 불편했다. 샐러드 보울을 새로 살 정도로 불편한 건 아니지만, 귀찮은 날에는 아예 샐러드를 안 만들어 먹기도 했다. 설거지할 때도 힘들고.
이걸 선물 받고 나서는 샐러드 만드는 게 두렵지 않다! 저건 유리인데도 정말 가볍다. 널찍해서 샐러드 섞기 최고다. 참고로 나는 집에서 배추를 소금에 절일 때 저걸 사용한다. 집에 대야가 없어서... 배추 한 포기 정도 들어가지만 어차피 내가 김장하는 건 아니고 그때그때 먹을 겉절이 하는 거니까 딱 좋다.
남편이 어디선가 와인 오프너 (wine opener)를 선물 받아가지고 왔는데 아주 애지중지한다. 처음에 이거 선물 받았다고 자랑을 자랑을 하면서 박스 채로 아주 고이 모셔뒀다. 그치만 술을 안 먹는 나는 뭐 그냥 와인 오프너구먼 하고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근데 나중에 남편이 이걸로 와인 따는 걸 봤는데, 내가 알던 그 와인 따는 방식이 아닌 거다? 오잉? 게다가 코르크를 감싸고 있는 호일을 따 주는 호일 커터 (foil cutter)까지 있다. 와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와인 오프너는 주방용품계의 샤넬이라는 르 크루제 (Le Cruset) 출신이다. 우리 집에 있는 유일한 르 크루제 제품이다. 이 럭셔리한 와인 오프너를 브런치에 올리면서 링크를 걸려고 검색을 했는데 츠암나 무슨 가 $100이나 해? 우리 집에 있는 에어프라이어보다 비싸다. 이거야말로 진심 선물 받지 않으면 절대 내 돈으로 사지 않을 물건이다.
집을 샀는데 라기보다는 모기지를 왕창 끼고 집이라는 거대한 부채를 얻었는데, 제일 맘에 드는 게 주방이다. 아일랜드가 아주 크고 여기저기 수납공간이 많아서 대만족이다. 수납공간 중에서 특히 마음에 드는 건 사진처럼 자투리 공간을 이용한 양념 선반 (Spice drawer)이다. 손잡이를 잡고 드르륵 당기면 저렇게 3층짜리 양념용 선반이 나온다. 보통 찬장에 양념을 두게 마련인데, 그러면 뒤에 있는 양념들이 잘 안 보여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쉽게 알 수 없다. 이런 식의 양념 선반은 양쪽 면이 뚫려 있으니 어디에 무슨 양념이 있는지 매우 쉽게 알 수 있다.
이건 아마 한국에도 있는 것 같아서 딱히 신기하지 않을 수 있다. 박사 때도 그렇고 지금도 오피스에 공용 네스프레소 머신이 있다. 집에 우유 거품기 (Aeroccino)가 있어서, 스스로 라떼를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팬데믹이 시작된 후, 학교에서 오피스에 나오지 말라고 해서 집에만 있으니 에스프레소를 마실 방법이 없었다. 가끔 동네 커피샵에 미리 전화 주문을 하고 가서 픽업하는 식으로 라떼를 마셨는데, 돈도 많이 들고 귀찮기도 하고.
그러다 친한 언니와 통화를 하다가 네스프레소같은 머신 없이도 에스프레소를 내려 먹을 수 있는 간단한 제품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이름은 에어로프레스 (Aeropress). 이 언니는 내 생일을 맞아 에어로프레스를 우리 집으로 보내줬다 으헝헝 감동. 원리는 에스프레소를 만드는 원리와 동일하다. 고온, 고압을 이용해서 커피가루에 물을 관통시키는 것. 보통 집에서는 고압을 만들어내기 힘든데, 에어로프레스는 주사기 같은 실린더 안의 공기를 이용해서 압력을 만들어 낸다. 세척도 매우 편리하고 금방 만들 수 있어서 대만족이다. 에스프레소의 농도 자체는 카페에서 사 먹는 농도보다는 옅지만, 내겐 충분하다.
참고로 왼쪽 사진에 보이는 알레그로 무 카페인 커피 (Allegro decaf coffee)는 스위스 워터 방식 (Swiss Water Process)으로 카페인이 제거된 커피다. 대부분의 무 카페인 커피는 화학약품을 써서 카페인을 제거하는데, 아무리 많이 제거해도 약 1/4의 카페인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화학약품 때문에 편두통이 생긴다는 사람도 있고. 그리하여 편두통 예방 다이어트 (HYH diet, 나중에 더 자세히 쓰겠다)에서는 무 카페인 커피도 먹으면 안 된다. 단! 스위스 워터 방식으로 만들어진 무 카페인 커피는 화학약품을 쓰지 않고, 99% 카페인이 제거되므로 마실 수 있다. 아마존을 찾아보면 스위스 워터 방식으로 카페인이 제거된 커피 종류가 많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저 알레그로 커피인데 정말 향이 좋고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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