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과 크리스마스
카톡카톡. 성탄절이 오면 한국 친구들에게서 카톡이 온다. 서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하며 인사를 나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 신자이든, 불교 신자든, 무신교이든 성탄절을 맞이하면 서로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한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카드 만들기를 수업시간에 했고, 크리스마스 씰을 학교에서 팔았다. 학교, 레스토랑, 호텔 로비, 공연장, 공원, 광장 등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예쁘게 꾸며져 있고 그 위에 별도 달린다. 집에서도 종교와 상관없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는 집도 있다.
미국에서 와서도 난 그냥 친구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했다. 유럽이나 남미에서 온 대부분의 친구들은 그걸 전혀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은 성당은 안 나가지만 어쨌든 본인을 기독교 신자로 인식하니까 그랬을까. 내가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인 맷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했더니 I don't celebrate Christmas라고 했다. 왜냐면 유대교에서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지 않으니까. 유대인들에게는 그 날이 딱히 의미가 없으니까 늘 크리스마스 때면 그냥 중국집에서 뭘 시켜 먹었다고 했다. 참고로 중국집에서 먹는 이유는 크리스마스 같은 미국의 대명절에 문을 여는 식당은 거의 없는데, 유일하게 열었다 하면 중국집이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제 미국에서 유대인들이 크리스마스 날 중국음식을 시켜 먹는 것이 거의 전통처럼 자리 잡았다고 한다.
맷의 반응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 크리스마스를 이렇게 종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구나. 미국에서 비기독교인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건, 마치 비 불교 신자에게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거라고. 미국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종교적인 색채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근데 재밌는 건 맷을 포함해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지 않는 다른 유대인 친구들도 어릴 때 다 선물을 받았다고 한다. 뭔가 남들 다 크리스마스날 선물 받는데, 자기만 안 받으면 속상할까 봐 부모님이 준 걸까?
우리나라에선 크리스마스가 "겨울에 예쁘고 아기자기한 걸 많이 꾸밀 수 있고 선물을 주고받는 공휴일"의 의미가 강하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종교적인 의미가 없지 않지만, 상대방이 기독교 신자이든 아니든과 상관없이 그 누구에게도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에서도 선물 주고받는 공휴일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종교적인 의미가 상당히 크다.
미국에서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 줄여서 PC라 하기도 함)를 따지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하지 않는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상대방의 성별, 인종, 나이, 종교 등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프로파일링 하지 않는 자세를 뜻한다 (이건 사전적 정의는 아니고, 내 언어로 표현한 정치적 올바름). 미국에서 아시안을 보고 중국사람이라고 묻는 건 나의 피부색을 바탕으로 내가 중국인일 것이라고 프로파일링 했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아시아인 = 중국인이라는 일종의 디폴트 값이 있는 거다. 이런 사회적으로 보편한 디폴트를 함부로 가정하지 말자는 자세가 바로 정치적 올바름이다.
사족인데, 내가 결혼할 때 우리 과 남교수의 아내 되는 분이 나를 위해 파티를 열어줬다. 우리 과 남교수의 아내들을 모두 불렀는데, 돌아가면서 내게 결혼생활에 대한 조언을 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조언은 시댁의 명절이나 생일 때 카드를 보내는 건 여자 몫이라고 했다. 남자들은 이런 거 잘 까먹고 신경을 안 쓴다면서, 내가 교수든 말든 이런 내 몫이라고 했다. 이분들은 평생 미국 시골에서 아주 전통적인 마인드로 자라온 사람들이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세상에 내가 교수까지 돼서 이런 말을 내가 듣고 살아야 하나. 아무튼 이런 조언도 정치적 올바름에 어긋난다. 남자는 생일 카드를 잘 안 챙기는 것이 디폴트이므로, 여자가 챙겨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내게 강요한 거니까.
다시 돌아가서, 메리 크리스마스가 정치적 올바름에 어긋나는 이유는 상대방이 기독교 신자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기독교에서 숭배하는 예수 (christ)가 탄생한 날을 축하한다! 는 말을 하는 게 무례하다. 상대방이 유대교를 믿는 사람일 수도 있고 무슬림일 수도 있고 종교가 없는 사람일 수도 있는데, 그들을 디폴트로 기독교 신자로 치부했기 때문에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이 자동적으로 나오는 거라고. 정치적 올바름을 따지는 사람들은 이런 연유에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하지 않고 즐거운 연말 보내세요 (Happy Holidays)라고 얘기한다.
나도 맷의 반응을 겪고 나서는 상대방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확실치 않을 때는 무조건 Happy Holidays라고 한다. 내가 박사를 했던 곳은 미국 중부 중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도시였는데, 거기선 쇼핑을 가거나 장 보러 가면 점원들이 Happy Holidays라고 하지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하지 않았다. 재밌는 건 지금 내가 사는 시골은 전형적인 미국 중부의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분위기인데, 여기서는 그냥 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한다. 그리고 나보고 중국인이냐는 질문은 박사 하던 도시에선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지만, 여기선 이미 여러 번 들었다.
정치적 올바름을 신경 쓰느냐 안 쓰느냐는 정치색과도 연관이 매우 깊다. 공화당 지지자들은 대체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선호하고, Happy Holidays라는 말을 들으면 되려 기분 나빠하기도 한다. 이런 걸 잘 아는 트럼프는 선거 유세할 때 "내가 대통령이 되면 Happy Holidays라는 말을 아예 없애겠다"라고 맹세한 적도 있다. 이 기사를 보면 메리 크리스마스를 선호하는 사람은 대체로 미국 중부에 사는 60대 이상 남자 공화당 지지자들이고, Happy Holidays를 선호하는 사람은 북동부 (뉴욕 보스톤 등지)에 사는 젊은 2-30대 여성들이라고 한다.
위 지도에서도 보이듯이 공화당이 우세인 지역인 중부나 남부에서는 메리 크리스마스를 선호하고, 민주당이 우세한 서부나 북동부는 Happy Holidays를 더 선호한다.
또 재미난 것은 크리스마스 트리 꼭대기에 올라가는 별 장식 (tree topper)이다. 나도 미국에 와서 알게 된 건데, 트리 꼭대기 별 장식은 동방박사들이 관찰한 베들레헴의 별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별 장식도 종교적인 의미가 있다 보니까, 진보적인 동네에선 몰이나 식당 등 공공장소에 있는 트리에 별을 달지 않기 시작했다. 사소한 디테일이지만 정치적 올바름을 신경 쓰는 사람들에겐 이것 역시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참고로 미국식 크리스마스 카드 쓰는 법은 여기에!
https://brunch.co.kr/@ilovemypinktutu/61
모두 즐거운 연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