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려도 그리운 맛
외가는 충북 청주에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있던 친가와 달리. 친가에서는 일 년에도 몇 번씩 제사를 지냈다. 어렴풋이 얼굴을 기억하는 증조할머니부터 그 위로 몇 대를 더 거친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한 제사를 때마다 지냈다. 아빠는 집안의 장남이었고, 장남과 결혼한 엄마는 맏며느리가 되어, 둘은 명절이면 항상 서울집부터 향했다. 전날 미리 도착하여 장을 보고, 제사음식을 준비하고, 당일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국과 밥을 새로 짓고, 제사를 올리는 순이었다. 차례가 끝나면 차린 음식들로 아침 식사를 했고, 엄마는 식구 수대로 어마어마한 상차림을 치웠다. 그러고 나면 점심때가 또 찾아왔고, 점심을 먹은 뒤에는 과일이나 한 접시 깎아 먹자는 이야기가 돌았다. 돌림판처럼 돌고 도는 그릇들 사이에서 외갓집은 까맣게 잊혀갔다.
어쩌다 부랴부랴 외갓집을 가는 날에는 늦은 우리를 타박하기라도 하듯, 애가 타는 마음을 일부러 모른 척하는 듯이 길은 자꾸만 막혔다. 차멀미를 심하게 하는 엄마는 청주 작은 집에 도착할 무렵에 거의 쓰러져 있었다. 주물로 된 사자 문고리를 열어젖히면, 끼익 문 긁히는 소리가 마당에 울렸고, 할아버지는 ‘미희 왔냐?’면서 신발 뒤축을 구겨 신은 채 뛰어나왔다. 조용한 시골의 두 노인은 문소리가 들릴 때마다 혹시 자식일까 싶은 마음에 자꾸만 뜀박질을 했고, 할아버지가 당신의 자식들을 위해 직접 지은 옛날 시골집은 몹시 추웠다. 점심때에 출발한 우리는 다 늦은 저녁과 밤 사이에 도착했지만, 싸늘한 공기의 거실에는 저녁상이 그대로였다.
“할머니 우리 저녁 안 먹어도 돼. 멀미해서 생각 없어.”
“조금만 떠 봐, 물김치 같이 해서 먹어봐.”
“아이참, 안 먹는다니까. 진짜 조금만 먹는다.”
한바탕 멀미로 뒤집어진 속에 전이며 나물이며 찌개의 꽉 찬 저녁상은 도통 끌리지 않았다. 밥이고 나발이고 그저 따뜻한 전기장판 위에 드러눕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는데, 세상 모든 할머니가 그렇다고 하지 않는가. 식사를 못 했다는 말은 할머니들의 밥 사랑을 딸깍 누르는 버튼이라고.
외할머니의 밥상은 단출할 때도, 풍요로울 때도 있었는데, 언제나 나박물김치만큼은 상 한 귀퉁이에 변함없이 자리를 지켰다. 동치미만큼 상큼하지도 않고 배추김치처럼 매콤한 맛도 아닌, 옅은 붉은색에 얄팍하게 썬 무와 몇 가닥의 열무 조각이 동동 떠 있는 나박물김치. ‘어떻게 매번 나박김치가 올라오나’ 생각할 정도로 자주 보였지만, 첫 숟갈은 꼭 물김치로 향했다. 시원한 국물을 들이켜면 울렁이던 속은 조금씩 조용해졌는데, 차가운 방바닥에 앉은 것도 잊은 채 언제까지도 계속 떠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때는 물려서, 밍밍한 국물이 싫었던 나박김치를 못 보게 된 건 할머니가 아프기 시작하면서였다. 젊은 시절, 까랑까랑한 목소리를 외치셨다던 할머니는 자꾸만 어려지는 병에 걸렸다. 이모들은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너희 할머니가 젊었을 때 얼마나 똑 부러졌는지 알고 있냐?’고 말한다. 명절 때마다 이제 오나 저제 오나 서울 간 셋째 딸을 기다리며 저녁상을 차려 놓았던 할머니. 느글거리는 속을 달래 줄 시원한 나박물김치를 담그던 할머니. 깨작거리는 손주들에게 밥 한술이라도 먹이려 하던 할머니는 이제 자식들이 가져온 음식을 오물오물 받아 드실 뿐이다. 왜 그렇게 물김치를 늘 상 담그셨는지, 그건 마땅한 반찬이 없던 배고픈 시절의 구슬픈 습관이었는지, 가끔 볼 수 있는 셋째 딸이 그마저도 속앓이하며 오는 것이 애틋했기 때문인지 묻고 싶지만 할머니는 대답이 없고, 나는 차마 그것을 물을 수 없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가끔 그 물김치가 먹고 싶다. 서울 할머니의 불고기와 마찬가지로 시골 할머니의 나박물김치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투박하고 묵직한 사랑이 들어간 할머니들의 음식이 먹고 싶다.
# 후일담 : 글을 쓴 뒤로부터 며칠 뒤, 부모님 결혼기념일을 맞아 식사를 하는데 마침 나박물김치가 반찬으로 나왔다. 맛을 보니 기다렸던 그 맛이라 한 그릇을 더 받아먹기도 하고, 엄마아빠한테 이 나박물김치가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리고선 다음날 아빠가 바로 나박물김치를 만들어주었다. 고맙지만 맛은 역시 할머니 것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