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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진 Nov 14. 2024

삿포로에 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뒹구는 곳은 눈밭일까 사랑일까


계절이 확연히 바뀔 때는 프로필 사진이나 배경화면을 바꾼다. 여름에는 지나치게 체중이 느는 것을 막아보고자 지향하는 연예인의 사진을 화면으로 설정하거나 녹음이 푸른 풍경으로 핸드폰을 채웠는데, 며칠 새 급격히 추워진 날씨를 체감하니 변화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눈치챘다. 겨울 분위기가 흠뻑 묻어나는 사진을 고르면 되겠거니 했지만, 비율이 알맞고 해상도가 흐리지 않으며, 나의 마음에도 꼭 드는 것을 고르는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Pinterest에서 내려받은 사진은 하나씩 앨범에 쌓여갔는데, 나중에 그것들을 한데 모아보니 어쩌면 전부 연인들을 담은 것들이었다. 그들 중 최종적으로 마음에 꼭 든 것은 하얀 눈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뛰어노는 연인의 모습.

겨울이 오면 왠지 자신이 없다. 여름의 에어컨 바람으로도 으슬으슬한, 애초부터 손발이 차고 추위를 많이 타게 되는 나에게 겨울은 두려울 정도로 추운 계절이기 때문이다. 작년쯤부터 눈 내리는 것을 조금씩 좋아하게 되었지만, 아직은 바라보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정도이고 눈싸움이나 눈사람 만들기를 위해서는 덧대어 입는 옷차림처럼 단단한 마음의 중무장이 필요한 수준이다. 그런데 눈밭에서 팔을 활짝 벌린 채 엉켜 있는 이름 모를 연인의 사진을 보았을 때, 그들의 행복함이 나한테까지 전해진 것처럼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뜨거운 햇살과 초록의 생기로 열기 넘치던 여름에는 누군가의 빈자리가 그리 느껴지지 않았지만, 겨울은 조금 달랐다. 늘 추위가 힘에 부쳤던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몇 도의 따뜻함이 더 필요했다. 심지어 최근의 겨울은 점점 더 얼어붙는 추세였다. 그런데도 눈밭을 뒹구는 사진 속 그들이 좋아 보였는데, 아마 그들도 추위를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거다. 동그란 코끝과 양 볼이 발그레할 때까지 뛰어놀 수 있는 건 바로 사랑의 힘이지 않았을까 싶다. 고작 사진 한 장에 너무 많은 의미를 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서로의 목도리를 빈틈없이 매어주고, 몸을 녹이려 포장마차에서 어묵 국물을 나눠 마시고, 꽁꽁 언 서로의 손에 자신의 입김을 불어주는 것. 혹독한 겨울 추위에 진절머리내면서도 또 눈이 내리는 날엔 다시 손을 잡고 문밖으로 나설 마음을 먹게 하는 것이 사랑의 장면이지 않을까.

눈을 좋아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서 삿포로 여행을 가고 싶다는 로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꼭 한 번은 펑펑 내리는 눈을 우산 속에 숨지 않고 맞고 싶었는데, ‘눈과 얼음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진 삿포로가 제격일 것 같았다. 물론 혼자 갈 생각은 없고, 둘이 되었을 때 말이다. 오타루의 새하얀 설원에서 우리의 발자국을 남기고, 동그랗게 눈을 뭉쳐 던지다가 힘이 빠졌을 때 그대로 눈 위에 드러눕기.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다 벌떡 일어나서 영화 러브레터의 명장면 ‘오겡끼데스까’를 냅다 흉내 내고, 마지막에는 너를 닮은 눈사람 하나, 나를 닮은 눈사람 하나를 사이좋게 만들기. 그리고 빨개진 귀와 따가워진 손을 비비며 갓 나온 수프 카레를 후루룩 떠먹기. 기미가 없는 일에까지 상상이 넘치는 나는 벌써 계획을 다 세웠다. 다시 한번 미소가 스민다.


부쩍 기온이 떨어지더니 어제가 입동이었다고 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정말로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다행인 건 미리 목도리와 장갑, 핫팩을 구비해 놓았다. 무사히 겨울을 보내기 위한 나만의 준비를,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곧 칼바람은 불겠지만, 혹시 모르게 더해질 온기를 기대하며, 맞잡게 될 손을 기대하며 겨울을 기다린다. 나는 과연 삿포로에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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