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 와인샵
내가 와인을 자주 구매하는 곳에서 연락이 왔다. 비오니에(Viognier)라는 품종의 화이트 와인이 들어왔는데 내가 아주 만족해할 것 같다고 한다. 한 병을 사다가 마셔보니 가격 대비 너무 훌륭하다. 내가 매일 마실 수도 있을 것 같다. 당장 한 박스를 주문했다. 가격은 병당 3만 원 이하다.
일단 비오니에라는 와인 품종의 느낌이 거의 없다. 비오니에는 좀 어려운 품종이어서 아무 와인샵에서나 볼 수 있는 놈이 아니다. 프랑스 북부론(Rhone)에서 최고급 비오니에로 콩 드리우(Condrieu)라는 와인을 만든다. 비싼 것은 어린 와인이 30만 원도 한다. 그런데 이 놈이 만족감이 최고다. 비오니에인데 샤도네이(Chardonnay) 같기도 하고 산도라는 면에서는 샹세르(Sancerre) 같은 느낌도 강하다. 여하간 아무 때나 뽕 따서 마셔도 아무 불만이 없다.
와인 생활이 이미 20년이 넘은 나를 만족시키니 진짜 좋은 와인이다.
한 박스의 와인 쇼핑을 마친 좋은 기분으로 성수동을 산책하는데 못 봤던 와인가게가 보인다. 그런데 그 와인가게 쇼윈도에 이 와인이 놓여있다. 뭐지 하는 생각으로 가게로 들어갔다. 손님은 한 명도 없는데 가게는 아주 깔끔하다. 이 와인에 대해 물어보니 자신이 최근에 마신 와인 중에 최고여서 모셔 놨다고 한다. 오랜만에 와인 스타일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가게 이름은 달팽이 영어로는 Slow wine 와인이다.
마침 저녁에는 뜻하지 않게 삼겹살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다. 갖고 있는 와인은 오늘 한 박스 실어 놓은 비오니에이니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 와인샵을 온 김에 나의 저녁 계획을 이야기하고 와인 추천을 부탁했다.
비오니에로 나의 와인 취향을 파악하신 사장님이 생각에 잠기시더니 묻는다.
카베르네 쇼비뇽은 못 드시죠?
좀 훅 들어온 질문이지만 그냥 쉽게 답한다. 네 좀 그렇죠.. 좀
카쇼를 좀 쉽게 만드는 집도 있는데... 그냥 패스하고요.. 이 놈 드세요하며 한 병을 건네는데 이탈리아다.
몬테풀치아노 다부르쪼...
근데 이 놈이 연식이 2011년 산이다. 동네 와인샵에서 11년이나 묵은 와인을 팔다니.
제가 오래된 와인을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11년 묵은 몬테풀치아노면 아무런 안주 없이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가격은 8만 원 아래...
결제를 하려는데 지갑을 안 갖고 왔다. 제로 페이로 결제를 하려는데 전화가 온다. 기자다. 배달 플랫폼에 대해 취재를 하고 싶단다. 밖으로 나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십 분 여가 흐른 것 같다. 이야기를 마치고 가게로 다시 들어와서 사과를 했다.
답변이 너무 우아하다. 달팽이잖아요. 그 정도 시간으로는 멀리 못 가요. 그냥 대충 여기 있어요. 하신다.
계산을 하고 포장을 하시면서 그냥 종이봉투에 넣어 들고가라 한다. 힙하게 종이봉투에 와인을 들고 성수동을 돌아 다니면 멋진 오후가 될 것 같다고 말이다.
2020년 산 프랑스의 어린 비오니에가 2011년 산 이탈리아의 중후한 몬테풀치아노를 만나서 둘이 같이 서있다.
나의 책상 위에서 말이다.
#와인, #비오니에, #몬테풀치아노, #와인샵 달팽이, #슬로우와인, #성수동달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