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룰라의 뜻부터 시작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가위바위보로 선발되긴 했어도 난 우리 조의 이장(조장)이었다. 처음에는 이장이라는 이름이 좀 웃겼는데, 어렸을 때부터 감투를 좋아했던 탓인가? 나머지 조원들이 내게 '이장님'이라고 부르는 게 싫지 않았다. 아니, 사실 기분이 꽤 좋았다.
처음에는 60년대생 1명, 70년대생 1명, 80년대생 1명, 90년대생 1명, 총 4명으로 구성된 우리 조에 내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게 웬걸? 난 어느새 조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내가 B2B 영업을 한 경력이 몇 년 있는데, 확실히 영업을 좀 하다 와서 그런지 넉살이 많이 좋아졌나 보다.) 조원분들은 모두 무척 유쾌한 분들이었고, 내가 어떤 드립을 쳐도 껄껄대며 웃어주셨다.
게다가 세 어르신들(?)은 어디에 있든 나를 부를 때 꼭 '이장님!'이라고 했다.
"이장님, 저쪽 조가 오늘 저녁에 수박을 사 온다는데 저희는 참외를 좀 사볼까요?"
"이장님, 자유시간에는 뭘 할까요?"
"이장님, 제가 이장님이 알려준 MBTI를 해봤는데, 그 무슨 경영자였나, 그게 나왔는데 그건 뭔가요? 전 어떤 사람인가요?"
내가 혹시나 하고 MBTI 링크를 공유했었는데, 모두 다 MBTI 검사까지 마친 것을 보니 웃음이 났다. 60년대생 한 분은 자신의 MBTI가 경영자(ESTJ)라고 했고, 70년대생 한 분은 호기심 많은 예술가(ISFP)라고 했다. 두 분 다 알파벳이 아닌 '경영자', '예술가'와 같은 이름으로 MBTI를 외워온 것도 내 입장에선 약간 색다른 포인트였다.
눈이 잘 안 보일 때도 있었는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MBTI를 검사했다면서 약간은 뿌듯해하시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특히, 60년대생 경영자 조원을 보고 있자면, 자연스럽게 우리 아빠가 생각났다. 가끔 내 사회 초년생 시절의 부장님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경영자 아버님은 은퇴 후 삶에 대한 고민을 나름 많이 하신 분 같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나도 은퇴를 앞두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마 내가 백수여서 더 그런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르지. 퇴사한 다음 다시 취업도 못한 상태인데, 괜히 내 은퇴 후 삶이 걱정되기도 했다.
경영자 아버님은 은퇴 후 귀어를 생각하시며 부부가 함께 이 프로그램을 신청한 분이셨는데, 아내분은 애석하게도 다른 조에 배정을 받았다.
나 : "아버지, 근데 사모님이랑 다른 조 된 거 아쉽지 않아요?"
경영자 아버님 : "아뇨?"
나는 어느 정도 필터링을 하긴 했지만, 경영자 아버님과 얘기할 때 일부러 신조어를 쓴 적이 꽤 있다. 그는 MZ들이 쓰는 말을 배우고 싶어 했는데, 그런 그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그랬다.
경영자 아버님 : "가만 보면 우리 이장님은 참 센스가 있는 것 같아. 우리 조 이름이 6789인 거 참 괜찮은 것 같아."
나 : "오, 제가 그 6789 얘기했던 거 듣고 있었어요? 못 들으신 줄 알았는데?"
(참고로, 60년대생 1명, 70년대생 1명, 80년대생 1명, 90년대생 1명으로 구성된 조라는 뜻)
경영자 아버님 : "다 듣고 있죠. 혹시 근데 그 탈룰라(?) 룰라(?)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버님은 왠지 모르게 내가 하는 말들이나 사진의 포즈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고,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런 것들을 다 배워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가 조 이름을 6789로 지은 것도 요즘 느낌이 난다며 굉장히 흡족해하셨고, 내가 쓰는 단어 중 모르는 것들이 있으면 배우려고 하셨다. 난 이런 멋진 어른을 좀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었다. 내가 남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이상한 훈계도 편견도 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하는 그런 어른. 참 오랜만이었다.
"탈룰라가 뭐예요?"
그의 질문에 난 탈룰라의 기원이 된 썰매 이름 짤까지 보여드리며 (혹시 탈룰라를 모르신다면 아래 참고)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을 놀리게 되었을 때 쓰는 말이라는 설명을 드렸다.
https://www.youtube.com/shorts/7edFr6CxeZ8
그 뒤에 아버님은 "이장님, 방금 제가 혹시 이장님한테 탈룰라 한 건 가요?" 라며 청출어람(?)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셨다.
멋있는 것을 보면 '힙하다'라고 하면 된다고 말씀드린 이후에는, "이장님 사진이 참 힙해요!" 라고도 해주셨다. 이런 말만 배우신 게 아니라 카톡에서 사진 모아 보내기, 노션 무료 인강 듣는 방법 같은 생산적인 것들도 메모해 가셨다. 그 모습이 난 참 멋있어 보였다.
둘째 날 저녁. 잠깐 주어진 자유시간. (이미 아버님은 많은 단어를 배우신 상태였다.)
아버님이 말했다.
"이장님, 우리 자유시간에 다 같이 힙한 곳에 갈까요?"
아버님이 얼마 전 사모님과 안면도 영목항 전망대에 갔었는데, 그곳이 참 괜찮다는 것이었다. 우리 조원 모두가 흔쾌히 찬성했고, 함께 전망대로 향했다. 막상 전망대로 향하게 되자 아버님은 굉장히 불안해 보였다.
"아, 이거 이렇게 다들 기대하는데... 만약에 내 눈에만 멋진 거면 이거 좀 민망한데."
특히 제일 어린 나의 취향을 맞출 수 있을 것인지 굉장히 초조해하셨다. 난 넉살 좋게 이렇게 말했다. "아, 아버님 센스가 보통이 아닌데 당연히 멋있겠지. 아, 그리고 별로면 또 어때. 우리 같은 조원인데. 안 그래요?"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아버님은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전망대는 참 좋았다. 일단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무료로 개방한 상태였고, 바다가 잘 보이고 하늘도 아름다웠다. 타이밍이 좋아서인지 노을이 살짝살짝 보이려고 하는 게 더 매력적이었다. 큰 통유리창에는 나에게 힘을 주는 문구들이 하나씩 적혀 있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은 '예쁜 척하고 있네. 안 그래도 예쁜 게.'라는 문구.
여기서 재미있었던 것 하나.
우린 그곳에서 다른 조를 마주쳤는데, 바로 아버님의 아내분, 즉 사모님이 계신 조였다. 두 분은 "어, 뭐야." 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내가 '예쁜 척하고 있네. 안 그래도 예쁜 게.' 앞에서 한창 인증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아버님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아버님 : "요즘엔 그렇게 사진 찍는 게 유행이에요?"
나 : "그건 아닌데, 그냥 제 스타일이에요. 오, 근데 이 문구 찍어서 사모님한테 보내는 거 어때요?"
아버님 : "에이, 됐어요."
나 : "아, 사모님이 보시면 좋아하실 것 같은데. 보내세요~!!"
아버님은 못 이기는 척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그러더니 내게 이런 부탁을 했다. "그럼 이거 보낼 테니까 몰래 와이프한테 가볼 수 있어요? 내가 이 카톡 보낼 때 반응이 어떤지 궁금해가지고."
썸 타는 사이도 아닌 몇십 년 차 아내의 반응이 궁금하다는 것이 참 귀엽지 않은가? 난 그의 미션을 받들어 몰래 사모님 뒤쪽으로 이동했다. 근데 문제는, 사모님이 도무지 핸드폰 자체에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 몇 분이 지났다.
난 참지 못하고 사모님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그 아버님이... 무슨 메시지 보내셨다고 꼭 확인해 달라고 하시던데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던데?" 내 말을 듣고 사모님은 카톡을 열더니 박장대소하셨다. "아니 이걸 저 사람이 보냈단 말이야? 참나."
참나,라고 했지만 분명 무척 재밌고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살짝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네. 아버님이 저 문구 보자마자 찍어서 보내고 싶다고 하셨어요."
난 미션을 완료하고 다시 아버님에게 왔다. 아버님은 무척 궁금한 표정으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이 뭐래요?" 나는 대답했다. "사모님이 엄청 좋아하셨어요. 웃고 행복해하셨어요. 앞으로 저런 거 더 자주 보내세요."
아버님은 "이장님 덕분에 점수 땄네. MZ들은 역시 다르다니까."라고 한 마디 하셨다.
난 내가 이렇게 어른들이랑 잘 지낼 줄 몰랐다. 회사를 다니면서 어른이란 어른에게는 다 질려버린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난 사람을 참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아직 사람에 대한 애정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이라는 것. 여기에서 다시 알았다.
투비컨티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