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에서 로망을 이루는 시간
벌써 고남에서 셋째 날을 맞았다. 이 날 나는 아침부터 조금 흥분(?) 한 상태였다. 아침부터 내 소소한 로망 중 하나를 이룰 수 있게 된 까닭이었다.
예전부터 난 바다를 보면서, (식당이 아닌 그냥 모래사장 위에서 혹은 큰 바위에 앉아서), 뭔가를 먹어보고 싶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바다를 보면서 먹는 그런 식사가 아니라, 정말 바다 가까운 곳에서 (어쩌면 갈매기 옆자리도 괜찮을 듯싶었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먹는 상상을 꽤 했다.
그런데 둘째 날 저녁, 셋째 날 아침이 샌드위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다를 보면서, 바다 앞에 앉아서 먹는 샌드위치라. 그 전날부터 뭔가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과한 기대 탓인지 난 셋째 날 아침에 7시도 되기 전에 눈을 뜨게 되었고, 내 예상보다 좀 더 빠르게 소소한 로망을 이룰 수 있었다. 바다를 보며 대만식 딸기잼 샌드위치를 먹다니. 퇴사하기 전의 나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평소의 나라면 회사 가기 싫은 마음을 억누르며 씻고 지옥버스-지옥철에 몸을 욱여넣고 귀에는 이어폰을 껴넣었을테지. 이 나라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 음악과 함께 회사로 향할 테지.
지금이 몇 시인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아침 식사, 그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아침 식사, 유튜브가 없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정말 갈매기들의 울음소리만 가득한 그런 아침 식사.
참 좋았다. 하지만 현실과 로망은 살짝 차이가 있었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내가 식사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내게 이런 사진을 보내왔다.
여유롭고 운치 있어 보일 것 같다는 내 예상과 다르게 나는 제법 옹졸한 자세와 거북목을 하고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저런 모습을 하고 샌드위치를 먹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난 저 때 로망을 이루는 중이었다는 것을...
이 날 아침은 이렇게 기분 좋게 시작했다.
그리고 이 날은 대망의 자망과 통발 설치 작업이 있는 날이었다. 언젠가 생생정보통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한 번쯤 이런 바다에 자망과 통발을 던져보고 싶었는데, 내가 그걸 눈으로 보게 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사실 이 작업은 꽤 위험한 작업이어서 실제로 내가 던지는 작업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 작업은 어떤 외국인 노동자가 진행했다. 언젠가 그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농어촌에서도 외국인력이 없으면 농사도 못 짓고, 고기도 못 잡는다는 그런 이야기. 농어업 현장에서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없이는 일이 굴러가기가 어렵다고 했다. 내가 일하던 회사에서는 그런 일을 눈으로 확인할 기회는 없었기 때문에 그 기사는 그냥 활자로만 남아 있었다.
막상 어딘가 먼 나라에서 왔다는 외국인 노동자. (그의 이름과 나라를 들었었는데 이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를 보니 그 기사가 활자에서 실제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는 이 먼 나라까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왔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나 스스로가 방해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이 작업을 할 수도 없으면서 틈이 나면 인증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나는 그의 일터에서, 그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자망과 통발을 던지는 작업 외에는 열심히 일을 도왔다. 뭔가를 치우는 일을 할 때도 빼지 않았다. 사실 그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난 하루 이틀 체험이어도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평생의 일과인데 내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아직 점심 먹을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점심은 중국집에 가게 되었는데, 사실 영 내키지가 않았다. 뭔가 어업을 한 다음에는 국밥이 땡겼다. 간짜장 같은 메뉴는 너무 기름지기만 하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이 날 먹은 간짜장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 간짜장을 먹으면서 오래 전 기억이 떠올랐다.
난 몇 년 전, 맛있는 간짜장을 먹고 싶어서 한참 검색을 하고 동네마다 리뷰가 좋은 중국집을 방문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때 나와 함께 했던 회사 동료가 한 명 있다. 리뷰를 보면 정말 맛있을 거 같은데도 생각보다 맛이 없는 간짜장들이 많았다. 그때 내 회사 동료가 이런 말을 했다.
"근데, 진짜 세상에 우리가 상상했던 맛있는 간짜장이라는 게 존재할까? 아니면 이게 사실은 정말 맛있는 간짜장인 건 아닐까? 우리가 상상한 맛있는 간짜장은 그냥 상상 속의 유니콘이 아닐까?"
그 뒤로 우리는 잠시 간짜장 원정을 중단했다. 그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갈 정도로 이 간짜장은 너무 맛있었다.
다만, 내가 한 가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정말 간짜장이 맛있었는지 육체노동 후에 먹는 간짜장이 맛있는 것인지의 여부이다.
왜,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랑 등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맛집이라고 추천하는 곳은 진짜 맛집이 아닐 수도 있다는 소리가 있지 않은가. 등산과 자전거 후에는 맛없는 음식이 없다고.
아침에서부터 점심까지, 그 이유가 뭐가 되었든 나에게는 행운과 로망이 적절히 녹아 든 식사였다. 그리고 마지막 저녁. 또 하나 남은 로망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지역 막걸리'를 마시는 것. 식사 도중 누군가가 "여기 가경주 막걸리 있는데?" 라고 외쳤다.
난 그 지역의 막걸리를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재빠르게 잔을 내밀었다. 근데 한참 보니까 뭔가 이상한 게 있다.
"이거 가경주가 아니라 경주인데요?"
투비컨티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