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가 할만한 일을 알려주세요
사람이 뭔가에 익숙해지려면 21일 정도는 지나야 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태안 고남면에 (약간) 익숙해지는 데에는 채 3일도 걸리지 않았다. 시간으로 따지면 태안에 온 지 72시간이 되지 않았을 그 짧은 시간. 이곳의 숙소, 바다 바람, 새벽이 되면 저절로 떠지는 눈, 내가 우리 조의 이장이라는 사실, 우리 조의 귀여운 아버님, 노을 풍경. 이런 것들에 난 익숙해졌다.
나만 이곳에 익숙해졌다면 주변 사람들이 뭔가 생경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나름대로 모든 참여자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이곳에 적응을 한 것 같았다. 심지어 하루 이틀 사이에 이곳에서의 루틴이 생긴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들은 저녁이 되면 산책을 하기도 하고, 아침에 러닝을 하기도 했다.
단 며칠 사이에 이곳에 익숙해진 나와 참가자들. 그래서 그런지 난 그들과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무 명으로 구성된 작은 마을.
난 이 마을에서 조원들에게 운영진의 안내사항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 외에 주요하게 맡은 역할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바로 MZ가 할만한 것들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https://brunch.co.kr/@ilovesummer/139) 내 룸메는 나보다 10살쯤 어렸다. 내 입장에서 그녀와 내가 비슷한 나잇대로 묶이는 것이 조금 미안할 정도였지만, 어른들 눈에는 그 친구나 나나 그게 그거였던 것 같다. 그냥 우리는 둘 다 하나였다. MZ.
우리 조원들은 나를 꼬박꼬박 이장님이라고 불렀지만, 나와 다른 조에 있는 분들은 나를 "MZ" 혹은 "MZ들!"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내가 뭔가 MZ 스러운 것들을 전파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다.
어쨌든 난 고남면에 하루하루 빠르게 적응했다. 뙤약볕에서 뭔가를 하고 있노라면, 도대체 이 시간이 언제 끝나나 싶다가도 정신을 차려보면 노을이 지고 있는. 그러던 어느 날, 우리에게는 갑작스럽게 자유시간이 생겼다. 그것도 몇 시간이나.
지금까지 쭉 자유롭게 살았으면서, 막상 이런 곳에서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다가 자유시간이 생기니까 이 시간을 어떻게 잘 쓸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는데,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솔직히 딱 하나밖에 없었다.
'카페!'
스테이가경주 주변에는 걸어서 갈만한 카페나 마트가 없었고, 내 입장에서는 달달한 무언가가 무척 그리운 시점이었다. 그런 시점에 자유시간 = 카페다. 솔직히 회사 다닐 때는 하루에 두 번도 가던 카페였다. 이른바 수혈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나를 정말로 마을 이장 정도로 생각해 주시고 리스펙을 보여주시는 우리 조 아버님은 내게 물었다.
경영자 아버님 : 이장님, 우리 자유시간인데 뭐 할까요?
나 : 제가 카페를 하나 찾아봤는데, 여기 한 번 가보는 거 어때요?
내 제안이라면 늘 흔쾌히 OK를 외치던 아버님이 이번만큼은 조금 표정이 애매했다. 왜일까!
나 : 카페 별로 세요?
경영자 아버님 : 난 사실 카페를... 왜 가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거기 가면 뭐가 좋아요? MZ들은 요즘 카페를 많이 간다면서요?
나 : 네, 아버지 이런 거 다 배우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카페 가셔야죠. 가봅시다!
아버님을 비롯한 우리 조원들의 일부는 마지못해(?) 카페로 따라나섰다. 내가 처음 카페에 가자고 제안했으니 커피는 내가 대접했다.
내가 계산을 하자,
"아니, 이장님이 이걸 사버리면 어떡해. 이러면 내가 커피 한 잔 대접하러 또 카페에 올 수밖에 없는데... 근데 검색을 해보니까 요즘엔 다들 1일 1 카페라는 걸 한다면서요?"
아버님, 제가 노린 게 그거였어요. 제가 커피를 사면 나중에 제가 카페 가자고 할 때 거절 못하시겠죠!,라는 속 마음은 숨긴 채 카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남겼다.
아버님을 비롯한 다른 조원들은 이 광경을 무척 신기하게 지켜봤고, 그러다 아버님은 포즈를 내게 핸드폰으로 인물모드 사진을 찍는 방법까지 배워가셨다.
"이장님, 이거 카페 생각보다 재미있는데요? 1일 1 카페인가 뭔가 그거 해도 되겠는데요?"
아버님 말대로 우리는 그 뒤로 거의 1일 1 카페를 했다.
경영자 아버님 : 근데 이장님, 사람들은 왜 카페에 이렇게 자주 오는 거예요? 이렇게 비싼데, 정말 사람들이 하루에 한 번은 카페에 가나? 요즘 사람들이 커피를 그렇게 좋아하나요?
나 : 근데, 커피만 마시려고 여기에 오는 건 아닐 거예요. 여기 오면 얘기도 하고 예쁜 것도 보고 좋잖아요.
아버님은 머리를 끄덕였다. 요즘 카페의 본질이 음료가 아닌 공간 자체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신 듯, 본인이 살아온 이야기를 이것저것 해주셨다. 미국으로 이민 가서 어디에서 사셨는지, 미국에 있으면서도 한국이 참 그리웠던 날들, 자랑스럽게 자란 아들. 앞으로 살고 싶은 로망 가득한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뭐 이런 얘기들.
카페의 본질에 충실하게 우린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장님, 맨날 이장님만 카페 찾으시고, 미안해서 내가 장소 추천 한 번 해보려고." 하시며 꽃지해수욕장을 추천해 주신 우리 아버님.
꽃지해수욕장 노을이 그렇게 죽여준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꽃지해수욕장에 가면 두 개의 큰 바위(?) 혹은 작은 섬(?) 사이에 해가 떨어지는 게 그게 그렇게 멋있단다. 우린 꽃지해수욕장으로 갔고, 노을은 말씀해 주신 대로 멋있었다.
근데 왜인지 아버님은 무척 불안해 보였다.
나 : 아버님, 왜요?
경영자 아버님 : 아니, 원래 바위 사이로 해가 떨어지는데... 이게 왜 이러지? 해가 저기로 떨어지면 안 되는데... 내가 가자고 해서 조원들 다 데리고 온 건데... 이게 이렇게 떨어지면 안 되는데
나를 비롯한 모든 조원들은 노을에 무척 무척 만족했는데, 우리에게 훨씬 더 멋진 풍경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아버님은 짧은 시간에 무척 큰 스트레스를 받은 듯 보였다.
"아... 이거 안 되는데..." 하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혹시 어디에선가 바위 사이로 지는 노을을 볼 수 있는 장소가 있는지 동분서주였다.
내 눈에는 멋있기만 했는데...
꽃지해수욕장에 다녀온 이후 아버님은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고, 우린 최고였다는 말을 반복했다.
나 : 아버님, 근데 진짜 노을 이뻤는데... 그리고 안 예쁘면 또 어때요. 우리가 같이 본 게 중요하지!
경영자 아버님 : 이장님, 근데 이 사진 어때요?
노을을 보고 있는 내 뒷모습 사진.
나 : "이거 언제 찍으셨어요?"
경영자 아버님 : "보여주려던 노을도 못 보여줬는데, 그래도 이장님 사진 몇 장은 건지게 해야 될 거 같아서 분위기 있어 보이길래..."
우리에게 예쁜 풍경을 꼭 보여주고 싶었던 아버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웃음이 터졌다.
나 : "사진 최곤데요?"
경영자 아버님 : "그래도 이걸로라도 밥값 했으니까 다행이네."
시간이 며칠 더 흐르자 아버님은 1일 1 카페에 완전히 적응을 하신 눈치였다. 그리고 반대로 카페를 추천하기까지 하셨는데, 마지막으로 아버님이 추천해 줬던 나문재 카페 사진과 함께... 이만 아디오스.. 투비컨티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