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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히니 Sep 12. 2024

가오리를 100번 죽인 날

가오리야 미안해

 

가오리 100번 살인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태안 고남면에서의 어촌 생활이 계속되던 어느 날, 누군가가 나를 <공주님>이라고 불렀다. 메타인지가 제대로 안 된 것인지, 난 스스로를 털털하다고 자부하고 있었기에 이 말을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우리 공주님은 이런 거 잘 못하시지 않으세요?"

 "네? 공주님이요? 제가 왜요?"

 "공주님 맞으시잖아요. 집에서 청소, 빨래 이런 거 잘 안 해보셨죠? 편식도 꽤 하시고... 완전 공주님 맞잖아요."


 내가 진짜 공주면 이런 말 듣는 게 상관없었지만, 공주도 아닌데 공주 소리 듣는 것만큼 억울한 것도 없었다. 나름대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데 공주님이라니... 특히 날 공주님이라고 부른 사람은 나랑 나이도 비슷했다. 어른들이 장난으로 지나가듯 하는 말이 아닌 꽤나 진심이 들어간 말일 수 있다. 그래서 난 찬찬히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듣게 되었는지 분석해 보았다.


 첫 번째, 실제로 집에서 청소랑 빨래를 잘 안 해본 것은 맞았다. 그래서 고남면에서도 단체로 뭔가를 먹고 뒷정리를 할 때 살짝 헤맨 것은 사실이다. 이 남은 음식들을 어디에다 둬야 하는지? 이건 분리수거가 가능한 건지? 이건 냉장고에 넣지 않아도 되는지? 등등


 두 번째, 편식. 이것도 꽤 하긴 한다. 특히 어촌마을에 오니까 내가 편식한다는 사실이 좀 더 도드라져 보였다. 왜냐하면 난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는 방어회를 좋아하는 편이긴 했지만, 여기에서 잡은 가오리나, 다른 참여자가 사 온 소라를 먹지 않았다.

 특히 이곳에서 유달리 소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이 권하는 소라를 내가 거절할 때마다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소라 안 먹는데~" 라며, 내가 편식을 한다는 사실이 일파만파 퍼져갔다.


 세 번째, 이건 내가 생각한 이유인데 난 웬만한 종류의 신체 활동에 조금 어눌한 편이었다. 통발을 고치다가 물고기가 들어오는 입구를 막아버리는 것도 그 예시가 될 수 있다. 뭐만 해도 어정쩡해서 그런가, 어떻게 보면 꼭 세상에 마실 나온 공주님 같아 보일 수도 있었다.


 내 문제점 파악을 끝마친(?) 나는 이곳에서의 나머지 시간들을 좀 더 굳건하고 강인하게 지내야겠다, 다짐했다.




  그리고 어느 날 오후. 우리는 팀을 나눠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저녁에 필요한 장을 보고 정리하는 일을 맡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날 수확한 가오리를 옮기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맡은 일이 끝나고 가오리와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갔을 때, 그들 중 한 명은 가오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칼로 가오리를 후벼 파고 자르고 내장을 빼내고... 보기만 해도 어질어질해지는 광경이었고, 그 주변은 비린내로 가득했다. '여기서 또 윽, 윽 거리면 공주님 소리 듣겠지.'라는 생각에 꾹 참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난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잘 봐 두세요. 가오리 손질은 우리 다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어요."

 "네? 가오리를 손질한다고요? 저도 해야 된다는 뜻이에요?"

 "네. 별로 어렵진 않아요. 금방 해요."

 "네? 제가 저걸 한다고요? 할 줄 모르는데..."

 "하시면 아마 주변에서 다 알려드릴걸요? 저도 방금 전에 다 했어요."


 하필 그 소식을 전달해 준 사람은 나를 공주님이라고 부른 참여자였다. 다 돌아가면서 한다는데, 여기에서 내가 가오리 손질을 못하면 또 공주님 소리를 듣게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오리 손질은 정말 내 인생에서 상상도 해본 적 없는, 그런 일이었다.


 도저히...


 하지만 공주님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은데...


 하지만 도저히... 가오리 손질은 무리인데...


 갈등했다. 나를 공주님이라고 부른 참여자는 별 거 아니라며 할 수 있다고 날 격려해 줬다(?) 어쩌면 부추긴 것일지도 모르지만...




 결국 난 가오리 손질을 시작했다. 내가 손질하게 된 가오리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가오리도 하나의 생명체. 그가 고통 없이 죽음을 맞게 하는 것이, 그가 최대한 안락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의 마지막 배려일 것이다.


 내가 칼을 집어 들자 주변에서 사람들은 일심동체로 외쳤다. "가오리가 고통 없이 죽으려면 뭐든 한 방에 해야 해요." 그래 한 방에...!


(가오리 손질 동영상)

가오리 손질 / 가오리 죽이기

 하지만 생각보다 내 칼질은 시원치 않았다. 그의 몸에 칼질을 몇 번이나 한 것인지... 아마 정말로 가오리를 100번쯤은 죽인 것 같다.


 가오리의 웃는 얼굴을 보는 일도 무척 고통스러웠다. 가오리의 웃는 얼굴에 칼질을 내야 한다는 것...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가오리의 피인지 물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장갑을 적셨다. 무척 찝찝하고 비렸다.

가오리 죽이기


 한편, 주변 참여자들은 내가 가오리 손질하는 것을 무슨 게임인 것처럼(?) 지켜봤다.

 "내장 터지면 가오리 써져서 못 먹어요! 터트리면 안 돼!!!"

 "한 방에 죽여줘요!!! 가오리 불쌍해요!!"

 "거의 끝났어요!"

 "가오리 얼굴 좀 가려줘요!!"


 그들의 든든한 지원사격(?)에 가오리뿐 아니라 나까지도 초상을 치를 듯한 현기증을 느꼈지만 막판에는 제법 멋지게 가오리 손질을 끝마쳤다. 끝마친 후 내 등은 땀으로 흥건했다.


 이 정도면 공주님 소리는 안 듣겠지?


 + 내가 가오리 손질을 마친 후, 날 공주님이라고 불렀던 참여자가 찾아왔다.


"근데 대단하시네요. 이거 하실 수 있을 줄 몰랐어요. 포기하실 줄 알았는데... 저도 못하겠어서 안 했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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