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100일간의 기록
오늘은 퇴사 104일 차.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100이라는 숫자는 뭔가 괜히 더 특별하다. 커플들이 사귄 다음에 100일을 기념하는 것도, 아이가 태어난 후 백일잔치를 하는 것도 '100'이라는 숫자가 뭔가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난 100일 정도면 어느 정도 성과가 보일만한 시기라서 다들 100일을 기념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커플들에게 100일은 '어느 정도 우리 사랑이 깊어졌음, 우리 많이 가까워졌음' 뭐 이런 의미일 테고, 아이의 백일잔치도 아이 입장에서는 '나 태어난 다음에 이젠 꽤 울었음. 우유도 꽤 많이 마셨음.', 엄마/아빠 입장에서는 '힘들긴 한데 애가 이만큼 자랐음' 뭐 이런 의미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퇴사 후 100일이 지난 시점에서는 내가 뭘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얼마나 잊지 않고 잘 지키고 있는지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내가 퇴사하면서 목표로 했던 것은 이렇게 한 6가지 정도 된다.
건강을 위해 운동하고 체지방률 30% 아래로 만들기 (원래 36% 수준)
평소의 관심사 : 지방살이 해보기
학업 : 외국어 공부하기
평생의 꿈 : 펀딩 하기, 브런치 열심히 하기 등등
부업 : 전자책, 네이버 블로그, 티스토리
커리어 :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하기
그중에 지난주에 발행한 결과보고서를 통해 부업(블로그 포스팅)과 평생의 꿈(브런치 열심히 하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았다.
https://brunch.co.kr/@ilovesummer/148
오늘은 나머지 부분들에 대한 결과보고서를 작성해보려고 한다.
01. 건강을 위해 운동하기
어렸을 때 난 이렇게 생각했다. 운동하는 것 = 오로지 다이어트를 위한 것. 어렸을 때 깡마른 편이었던 나는 다이어트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운동이라는 것은 내게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운동은 오직 다이어트를 위한 것이 아니다. 조금 더 확장해 보면 내 미래를 위한 거름 같은 것이 될 수 있는 것이 체력이고 그 체력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운동이다. 100일 동안 체지방률 36%인 몸을 30%로 만드는 일에는 실패했지만, 나름 유의미한 결과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2분 30초씩 6번이나 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난 수년 전에 런데이라는 앱을 알게 되었고, 30분 달리기 도전 훈련을 시작했었다. 8주 동안 달리기를 연습하면 30분 연속으로 달릴 수 있게 된다는 그 훈련.
하지만 지지부진했다.
8주 훈련 중 1주-1회 차 훈련을 다시 시작한 것만 14번. 수년간 4주-1회 차 훈련 이상까지 진도가 나간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 몇 년 만에 처음으로 4주-2회 차 훈련으로 진입했다. 2분 30초씩 6번을 뛸 수 있는 4주-2회 차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비록 이 훈련을 한 다음에 아파서 병원에서 수액까지 맞게 되었지만) 참 기뻤다.
훈련을 하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생각했다.
'남들한테 4주 걸리는 훈련이 한 4년은 걸렸구나.'
저 때 기분이 좋아서 무리했더니 귀신처럼 몸에서 이상신호를 보내서 수액까지 맞고 왔지만, 이젠 또 회복했다. 다시 경거망동하지 않고 다음 주부터 달릴 예정이다.
02. 지방살이 해보기.
내가 퇴사하고 가장 잘한 일 중에 하나가 지방살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고남면 어케이션,
https://brunch.co.kr/brunchbook/locallover
그 뒤에는 진천, 함양(https://brunch.co.kr/@ilovesummer/136), 상주.
지금은 경주 감포에 와있다.
지역살이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글로 발행하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몇 달 전까지 내가 머리 쥐어뜯으며 회의하고 숫자 하나에 하늘과 지옥을 오고 가던 사람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지역살이를 하게 되면 모르던 사람들과 이야기 할 일이 참 많다. 핸드폰 볼 일은 적다.
하늘 보는 시간은 많다. 넷플릭스 보는 시간은 적다.
주식 얘기는 안 한다. 여행 얘기는 많이 한다.
예쁜 옷은 잘 안 입는다. 편한 옷은 많이 입는다. 땅바닥에 앉을 일도 많다.
배달의 민족은 못 한다. 스스로 자급자족한다.
03. 외국어 공부하기
외국어는 정말 차가운 친구다. 누군가가 천재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천재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외국어는 정말 차갑다. 사용하지 않으면 그냥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멀어진다.
(그에 반해 자전거는 참 따뜻한 친구다. 몇 년 만에 자전거를 찾아가도, '어, 왔어?' 하면서 반겨준다. 어렸을 때 잠깐 고생해서 배운 그 감각을 평생 몸에 남겨둔다. 진짜 착하고 따뜻한 친구다.)
마지막에 퇴사한 회사가 외국계 회사였으므로 영어로 회의하는 일이 매일의 일상이었다. 우리 팀에 속한 팀원들을 제외한 모두가 외국인인 회사였으므로 그 당시 난 잠깐 영어를 잘하는 편이 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억지로 외국어를 쓸 필요가 없어지자 외국어는 내 머릿속에서 또다시 떠나갔다.
이를 잊지 않기 위해 챗지피티와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마저도 뜸해졌다. 한 동안 챗지피티와 과거 연애 상담, 내 미래, 친구랑 내가 멀어진 이유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는데 말이다...
반성하면서 최근 듀오링고를 다시 시작했다. 현재 4일 연속으로 듀오링고를 완료한 상태다.
04. 내 커리어?
과제 제안서를 쓸 때 자신 있는 내용은 좀 더 잘 보이게, 좀 더 앞에 쓰게 된다. 반면에 조금 더 자신이 없는 경우 뒤에 쓰고 작게 쓰고... 뭐 그렇게 된다. 비단 이 논리는 과제 제안서에 국한되지 않는다.
난 내가 블로그나 브런치 글 발행은 나름대로 열심히 꾸준히 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주에 글을 발행하면서 브런치와 블로그를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를 적었고, 정량적인 지표까지도 꽤 많이 포함했다.
하지만 지금 뒤로 갈수록 뭔가 정량적으로 애매하면서, 자신 없어지는 것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맨 마지막에 나오는 커리어 파트는, 현재 백수이긴 하지만 한 때 12년 차 직장인이었던 것에 비하면 역설적으로 제일 자신이 없는 파트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다 보니 마치 다시 대학교 1학년이 된 기분이다. 대학교 1학년 때 좀 더 고민했으면 지금 더 편했을거란 생각이 문득 문득 고개를 내민다. 어쨌든, 난 내가 브랜딩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책을 몇 권 읽어보고 강의를 들어보고는 있다. 브랜딩과 관련된 일을 내가 실무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까지 끌어올리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조금 막막하기는 하다.
또, 이것보다 더 좋아하고 흥미로울 만한 일은 없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실제로 돈 버는 일이 되면 얼마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게 될지 그것도 궁금하다.
정말 대학교 1학년이 된 것 같다.
실제로 대학교 다닐 때도 이것저것 고민이 많았는데 잘 졸업하고 잘 취업했으니까, 지금 이 시간도 정신 차려보면 잘 보낸 상태이지 않을까.
난 머릿속의 상상과 야망만 따지면 지금 일론 머스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릿속 세상과 현실 세상은 너무도 달라서, 난 그냥 열심히 즐겁게 사는 104일 차 백수다.
솔직히 이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도 꽤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열심히 살면서 꽤 즐겁기도 한데 잘못되기는커녕 정말 잘 살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