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88일간의 기록
다른 사람들의 핸드폰 사진첩에는 사진이 몇 장 정도 있을까? 핸드폰을 바꿔도 기존에 쓰던 핸드폰에 있던 사진이 그대로 옮겨와서 그런지, 지금 내 사진첩에는 사진이 한 2만 장 정도 있다. 이게 다른 사람들에 비해 적은 편인지, 많은 편인지, 평균 수준인지는 잘 모르겠다.
(혹시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 댓글로 대답해 주실 수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사진첩 사진이 몇 장 정도라고 알려주시면 궁금증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상황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확실한 건, 내 기준에는 2만 장의 사진이 좀 버겁다는 것. 이미 중간중간 자주 사진을 정리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진첩에는 별별 것들이 참 많이 들어 있다. 수년 전의 가족여행, 지금은 책 이름도 기억 안 나지만 당시에는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어떤 구절, 오래전에 갔던 해외 출장지에서 잔뜩 찍은 사진들, 당시 사귀었던 남자 친구와 찍었던 사진들...
뭐가 참 많기도 많다.
내가 퇴사하면서 시간이 좀 생기자 이렇게 정리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용량만 차지하고 있는 사진들이 무척 거슬리기 시작했다. 백수 입장에서 뭔가 옛 기억들을 비워내야(?) 새로운 것들을 채워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언제고 맘 잡고 이 사진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필요 없는 것들은 삭제하고, 앞으로 뭔가 더 좋고 새로운 것들을 채워내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시작한 핸드폰 사진첩 정리. 지금 내 핸드폰에서 가장 오래된 사진은, 이 사진에게 나이가 있었다면 벌써 초등학교 2학년쯤은 되었을 정도로 제법 오래된 사진이었다. 그 시간을 다 품고 있는 내 핸드폰에는 이미 지나간 추억이 된 전 남자친구들 3~4명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지금 쯤 어떤 누군가의 남편이 되어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 시간을 한 몇 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왔을 때, 화려한 사진들을 대거 발견할 수 있었다. 모두 CES 때문에 라스베가스에 출장 갔을 때 찍었던 사진들로, 사진첩 내 제법 큰 용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요즘 내 동선은 보통 집-카페-도서관 정도다. 요즘 내 동선과 무척 어울리지 않아서, 괴리감이 큰 사진들이었다. 온통 화려하고 온통 거대했다. 백수가 된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이때 참 좋았다. 어느 정도 짬이 차고 간 출장. 그래서 그런지 동료들과 손발도 잘 맞았고, 모든 일이 마무리된 다음에는 떠들며 맛있는 것도 사 먹을 수 있는 여유도 생긴 때였다.
라스베가스.
온통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한 라스베가스의 거리. 밤이 되면 호텔마다 펼쳐지는 화산쇼와 분수쇼.
이곳을 거닐다 우연히 다른 회사 소속으로 출장 온 대학 동기들을 몇 명 마주쳤는데, "야, 우리 성공했다. 여기서 우연히 만나고."라는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라스베가스에 가면 국룰로 들려야 한다는 그랜드 캐년 코스.
이곳에서 나는 자연이 만든 것이 이렇게 무섭고 위험하고 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기도 했다.
라스베가스에서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는 휴가를 내고 샌프란시스코에 갔었다. 직장생활 중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외 출장을 갔다가 휴가를 내고 다른 지역을 들렀던 일 말이다.
겨울답지 않게 따사로운 날씨였고, 난 그곳 Tartine Bakery에서 빵을 사서 돌로레스 공원에 갔었다. 그 자체가 너무 좋아서 이런 행복이 자주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들으면 내가 아마 이 라스베가스 출장을 엄청 가고 싶어 한 것처럼 보일 것 같다. 근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난 라스베가스 출장을 엄청 가기 싫어했다. 심지어 내가 여기에 가야 된다고 결정이 났을 때 뭔가 배신감(?)에 혼자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당시 이 출장에 참여할 직원을 뽑을 때 살짝 이슈가 있긴 했었다. 다른 일이 바빴던 탓에 나는 이 출장이 썩 내키지는 않았고, 거절 의사를 밝혔었다. 근데 그냥 갑자기 출장자 명단에 내가 포함된 것을 보고 뭔가 소통이 되지 않았다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 이후로 이 출장 관련 업무를 하면서 계속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그게 아마 상사 눈에 티가 많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티가 났을 것 같다. 시간이 더 흘러 내가 좀 더 연차가 쌓이니까 더 알겠다. 분명 티가 났을 거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 출장을 정말 즐겼고, 조금 고생하긴 했지만 바쁜 일도 어떻게든 다 마무리하고 편하게 라스베가스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충분하게 상의하지 않고 출장에 보낸 것이 마음이 쓰이셨는지, 출장 이후에 휴가를 붙이라는 상사의 제안에 난 그랜드캐년과 샌프란시스코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시간들이 정말 소중하고 즐겁게 기억된다. 이럴 거면 난 뭐 때문에 그렇게 이 출장을 내키지 않아 하고, 꽤 오랜 기간을 부정적인 마음으로 채우고 있었을까?
요즘 원영적 사고, 럭키비키라는 단어를 꽤 자주 듣는다. 처음에는 또래들 사이에서만 자주 들었는데, 얼마 전에는 엄마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근데 럭키비키? 그게 무슨 뜻이니?" 아마 이제 어른들한테까지도 이 말이 전파가 된 모양이다.
럭키비키/원영적 사고는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 것이라는 낙천적인 생각을 뜻한다. 자세한 건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namu.wiki/w/%EC%9B%90%EC%98%81%EC%A0%81%20%EC%82%AC%EA%B3%A0
내가 저 라스베가스 출장자 명단에 들어간 것을 확인했을 때,
1) 와! 라스베가스? 내 돈 내고 가기 힘든 곳인데 거기서 커리어도 쌓고 재미있는 구경도 많이 할 수 있잖아?
2) 아...내가 바쁘다고 말했는데 왜 상의도 없이 통보하냐...
난 충분히 1번처럼 반응할 수 있었다. 실제로 가기 전에도, 현지에서도 미친 듯이 열심히 일했고 일이 끝난 다음에는 열심히 놀았다. 근데 왜 2번처럼 반응하며 몇 주를 부정적으로 보냈을까.
이 사진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이왕이면 더 긍정적인 에너지로 일하고 사람들을 대했다면 나에게 더 좋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까?
아니, 이제 원영적 사고를 도입해 본다면.
"지금 이 사진들을 보면서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완전 럭키비키잖아? 앞으로 내 인생은 더 멋져질 일만 남았잖아?"
처음에는 사진 정리하는 게 좀 힘들었다. 정리할 것도 많고, 정리하면서 전 남친들 흔적들을 의도치 않게 마주하게 되는 것이 영 찝찝했다.
근데 마음을 바꾸니까, 사진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참 좋았던 시간이 많은 것 같아서 내 인생에 행복이 내 생각보다 많았던 것 같아서 기쁘다. + 덤으로, 여행 다녔던 것을 포스팅한 다음에 이용했던 상품의 링크를 달아서 팔았더니 1909원의 수익을 얻었다. 백수인데, 1909원 버는 게 어디 쉬운가? 완전 럭키비키다.
마지막 두 편은 토요일에 업데이트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