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81일간의 기록
나는 지금 생리 중이다. 생리를 방패 삼아, 집에서 곱창을 먹으며 넷플릭스를 보고 있다. (주변에서 '생리'라는 단어 자체에 불편함을 갖는 사람을 종종 보았던 터라 이렇게 직접적으로 생리 중임을 밝히는 것에 대해 조금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만약 타이밍이 며칠이라도 어긋났다면 며칠 전 지역살이를 갔을 때 생리를 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찝찝하고 꿉꿉한 날씨에 말이다. 여성의 생리 주기가 며칠 정도 틀어지는 것은 꽤 흔한 일이므로 이번에는 운이 참 좋았다.
지역살이 중에 생리를 하고 있었다면 난 아마 목공체험을 하다가 탈진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참여자들과 수다 떨며 맛있는 떡볶이를 먹는 시간을 놓쳤을 수도 있다. 염소 똥이 연상되는 비누 만들기 시간 대신 휴식을 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리를 하지 않은 덕에 신체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컨디션으로 일정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문득 억울해진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분 탓일지 모르지만 난 지금까지 온갖 중요한 일을 생리와 함께 했다. 그때마다 생리 주기를 조정하기 위해 피임약을 먹었다면, 지금까지 한 100번 이상 피임약을 먹어야 했을 것이다. 학교 다닐 때는 중간고사, 기말고사, 심지어 수능까지. 중요한 해외 출장들. 친구들과의 캠핑 등등 어쨌든 난 생리 중이었다.
생리 중에 무리해서 일을 하다가 (주말 출근 + 야근까지 해야만 하는 좀 빡센 일이었다.) 주말 퇴근 중에 졸도하여 119에 실려갔던 적도 있다.
누군가는 한 달 30일 중 고작 6~7일 정도 생리하는 게 뭐 큰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생각보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생리보다 더 피하고 싶은 것은 PMS 기간이었다. PMS는 월경 전 증후군, 월경 전 불쾌장애라고도 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생리 전에 무척 불쾌하고 심리적으로 우울감이 생긴다. PMS는 여성에 따라 좀 심한 경우도 있고 아예 없는 경우도 보았는데 난 꽤 심한 편인 것 같다.
한 달에 6~7일 정도는 PMS로 인한 감정기복을 감내해야 하는 기간이었다. 벌써 생리라는 것 자체로 지장을 받는 날이 한 달에 12~14일 정도가 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난 배란통이라는 것도 느낄 정도로 (좀 거칠게 표현하면) 생리와 관련된 꼴값은 다 떠는 몸을 가지고 태어났다. 배란통은 3일쯤 있었는데 배란을 하는 시기가 되면 통증이 와서 몸을 펴거나 운동을 하는데에 지장이 있었다.
자. 이로써 내가 한 달 30일 중에 생리 관련 이슈로 고통받는 기간은 17일쯤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예전부터 나는 내 성공(?)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가 생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 다 아는 것처럼 생리를 몇 달이라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내 입장에서 제법 극단적으로 느껴지는 '임신'이라는 해결책이다. 아직은 그럴 준비가 되지 않았으므로, 난 이 대자연을 받아들이며 살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까지 보다 보면 '근데 이 사람이 이 브런치북에 왜 생리 얘기만 주야장천 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생리 얘기의 비중이 너무 큰 것 같다.
이제부터는 살짝 숨겨진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난 오래 동안 생리 + 알파 (PMS, 배란통 등등)로 고통을 받고 있었으므로 이 기간이 되면 당연히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리고 생리 때문에 내가 뭔가를 제대로 못해내는 것을 살짝 억울해한 적도 있다. 생리를 핑계 삼으면서도 그 자체를 아주 살짝 원망하기도 했던 것이다.
근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까, 사실 지금 생리처럼 피할 수 없는 것 가지고 왈가왈부할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
난 내가 내 의지로 실천할 수 있는 일들도 제대로 못하거나 피할 때가 꽤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나에게는 '성공할 때까지 모든 것을 비밀로만 해야 하는' 이상한 고질병이 있다.
얼마 전 친구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근데 너 퇴사한 다음에 뭐 하려고 하는 거야? 요즘 뭐 해?"
난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아, 나 브랜딩이랑 콘텐츠 이런 것들에 관심이 가서 지금 그런 수업을 듣고 있어. 수업을 몇 달 정도 듣게 되는데 그 기간 동안에 내가 포트폴리오를 만들 수 있게 수업 내용을 좀 실천해 보게. 그래서 브런치, 블로그도 어떤 방향으로 운영하면 좋을지 계속 고민 중이야. 전자책이랑 펀딩에도 관심이 있어. 내가 회사라는 방패가 없더라도 내가 기획한 것들을 팔아 내고 홍보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거든. 블라블라블라블라...!"
근데 난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지금은 놀고 있어. 맨날 놀러 다니고 있어." 라고 대답했다. 왜일까? 마케팅을 하고 있는 친구라 이것저것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친구 입장에서는 전자책이랑 펀딩은 너무 트렌드가 지난 거라고 느껴질 거 같은데.'
'괜히 이런 얘기했다가 결국 예전에 했던 일 그대로 하게 되면 쪽팔릴 것 같은데.'
'브랜딩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는데, 이런 질문하면 대답 잘 못할 것 같은데.'
그 짧은 찰나에 난 별별 바보 같은 이유를 생각해내며 내 계획을 설명할 기회를 놓쳤다. 그 친구가 마케팅 일을 하지 않는 친구였어도 아마 상황은 비슷했을 것이다. 이렇게 그 누구에게도 내 계획을 말하지 않으면, 나중에 포기하기도 훨씬 쉽고, 방향성을 잃어서 실패하더라도 누구 하나 내 실패를 알아차릴 수 없다. 그런 장점(?)이 있지만 그 대신에, 누구에게도 피드백을 듣기 어렵다는 것, 도움을 받기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어찌어찌 내 인생이 여기까지 굴러오기는 했는데, 이제는 내가 그 심리적인 벽을 넘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먼저 브런치에서라도 외쳐본다.
"퇴사하면서 이런저런 책도 읽어보고, 강의도 듣다 보니 난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서 브랜딩을 하는 그런 일을 하고 싶어졌다. 내가 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조금 막막하기는 한데 여유를 갖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고 싶다. 그래서 앞으로는 누가 물어봐도 그냥 당당하게 얘기하려고 한다. 이렇게 얘기해 두면 쉽게 포기는 못 하겠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