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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히니 Aug 01. 2024

백수라면 -71.96%의 수익률을 마주해야 한다

퇴사 후 74일간의 기록

 지난주에 깨달은 내 인생의 진리.


 난 시간이 많더라도 하기 싫었던 건 끝까지 미루는 인간이다. 회사 때문에 시간이 없다는 건 말 그대로 핑계일 뿐. 그 핑계를 사용할 수 없는 백수가 되자 더 명확해졌다. 난 내 생각보다 의지박약이다. 하기 싫은데 안 한다고 큰일이 나는 일이 아니면 잘 안 한다. 


 그런 거 치고 회사 일은 무척 열심히 해서 워커홀릭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아마 회사 일은 '안 하면 큰 일 나는 일'이라고 분류했던 것 같다. 나름대로 책임감이 내 추진력이었던 건 아닐까? 


 자금은 백수 74일 차. 이제 내가 뭐 안 한다고 큰 일 날 것도 없고, 그래서인지 뭘 안 하는 것에 대해 생각보다 불안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백수 생활에 잘 적응해 나가고 있던 중, 며칠 전 일이다. 집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난생처음으로 까르보나라 불닭볶음면을 먹은 날이었다. (참고로 난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고, 부모님이 내가 컵라면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종종 몰래 집 앞 편의점에서 일탈을 즐기곤 한다.) 


 그 편의점에는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딱 두 자리뿐이었는데, 보통 그 자리는 다 내 차지였다. 내가 그 편의점을 다니는 동안 단 한 번도 그 자리에 누군가가 앉아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근데 그날은 체구가 큰 어떤 남자분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는 목이 늘어난 회사 단체티 같은 것을 입은 채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예능을 보며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난 그의 옆에 앉았고 까르보 붉닭을 조리하기 전 이어폰을 꽂았다. 내 최애인 사랑과 전쟁, 아내의 유혹, 내 남자의 여자, 야인시대 등등 중 뭘 볼까 고민했다. 그러다, '역시 밥 먹을 땐 사랑과 전쟁이지.' 하며, 이미 수차례 봤던 콘텐츠들 중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엄선했다. (https://www.youtube.com/@KeMi_TV)


 나는 키득거리며 까르보 불닭을 흡입했고, 너무 매운 나머지 아이스크림까지 먹기로 다짐했다. 그 일련의 과정 동안 체구가 큰 어떤 남자분은 내 옆자리를 지켰고, 나랑 비슷하게 키득거리며 라면을 드셨다. 그러고는 과자랑 음료수를 집어 들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평일 이 시간에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 보면... 백수인가?'


 그 남자에 대해 어떤 평가도 내릴 생각이 없었지만, 그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그가 백수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창 일할 시간인데... 여기서 라면 먹으면서 예능을 보고 있다니...'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물었고, 갑자기 뭔가 현실의 싱크가 맞춰지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평일 이 시간에 여기서 이러고 있는 상대를 보며 백수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 사람은 육아휴직을 썼을 수도 있고, 열심히 일하다 하루 연차를 낸 사람일 수도 있다. 여기서 진짜 백수인게 확실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세수도 제대로 안 하고 모자를 뒤집어쓰고, X회사(전 회사) 단체티를 입은 채, 크록스를 질질 끌고 나와 까르보 불닭과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나. 이것이 진정한 백수였다. 


 갑자기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내가 싫어하는 일을 미루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강력한 마음의 울림이 일었다. 그렇게 난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후에...)




 그리고 난 오랫동안 미뤄왔던 일 중에 하나를 시도해 보기로 다짐했다. 그건 바로 내가 지금까지 투자한 주식의 수익률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투자한 종목의 수익률을 체크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 아니냐고? 너무 쉬운 일 아니냐고?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지 않은 일이다. 


 난 핸드폰을 바꾼 이후에는 증권사 앱의 로그인 인증도 해놓지 않았다. 로그인할 수 없는 채로 거의 1년 이상을 방치해 뒀다. 바보 같은 일이지만, 처참한 주식 수익률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확인하지 않기로 혼자 다짐해 버렸던 것이다. 분명히 주식 수익률이 반토막은 나있을 것 같은데 로그인 안 한지 오래되다 보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두구두구두구... 인증부터 시작하고 로그인을 해봤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주식 종목은 총 4개다. 그중 하나는 -71.96%, 나머지는 -43.64%, -27.03%. -3.96%. 온통 파란 세상이었다. (안 돼!!!!!!!!!!!!!!!)

주식 수익률


 회사 동료들 중에는 내가 산 주식을 팔고, 내가 판 주식을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정도로 투자계의 똥손 중에 똥손이었던 나는 또다시 처참한 파란색을 마주해야 했다.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내가 투자한 것에 무심했던 것은 아니다. 사회 초년생 시절 재테크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그 관심에 비해 어리석었던 탓에 인터넷에서 무료로 해주는 재테크 설계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난 그때 운이 안 좋았다.


 설계사는 내 인상이 어리숙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말을 놓더니 본인 스스로를 '오빠'라고 칭하며, 무작정 어떤 상품에 가입하게 강요했다. 그 사람이 무서웠던 나는 그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서 대충 상품에 가입했는데, 알고 보니 다 변액보험 상품이었다. 암튼 그런 일을 겪으며 스스로 주식에 투자해서 부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나는 그 이후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며 몇 천만 원대의 손해를 입었다. (코인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내가 번 돈만 투자해서 빚은 없었으나 젊은 나이에 몇 천만 원을 잃은 것은 결코 가벼운 경험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 주식에 투자해서 돈을 벌고 싶으면서도 손해를 보면 그 상황을 회피하고 싶어졌다. 그러다가 저렇게 -71% 라는 숫자까지 보게 된 것이다.


 난 싫었지만 시간이 많은 백수로서, -71.96%의 수익률을 마주했다. 이제 하루에 한 번은 수익률을 확인하며 출구 전략에 대해 생각도 해볼 거고, 돈을 어떻게 모으면 좋을지 생각도 해보려고 한다. 24살쯤에 이런 생각을 했으면 좋았겠지만, 지금이라도 싫어했던 일을 마주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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