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60일간의 기록
난 뭔가를 멈추는 것을 엄청 무서워하는 사람이다. 힘들다고 멈추면, 뭔가를 준비하느라고 멈춘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뒤처진다는 생각에 답답했다. 그건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고3 때도 그랬다. 수능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수능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심지어 내 나름대로 평소보다 수능을 못 볼 수밖에 없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가는 길에 도로에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난 아빠의 차에서 내려야 했고, 가방과 도시락통을 들고 거의 2km를 뛰어서 수능장에 도착했다. 추운 날씨에 그렇게 뛰는 바람에 난 화장실에서 한 바탕 토하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
아니, 아마 진정이 되진 않았던 것 같다. 숨이 진정되지 않아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언어(지금은 국어) 시험을 봤고, 언어 점수가 무척 낮았다. 수리(수학)부터는 평소와 비슷한 수준으로 시험을 봤지만 언어는 끝내 내 발목을 잡았다. 이 때문에 다시 수능을 준비할지 고민했지만 내 인생에서 재수 = 다른 사람보다 1년 늦어지는 공식일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왜 그렇게까지 1년쯤 재수하는 게 인생에 크리티컬 하다고 생각했었는지 잘 모르겠다.
재수 후 홍익대, 삼수 후 동국대를 입학했다가 결국 오수 끝에 고려대를 입학했다는 유튜버 '미미미누'. 미미미누님은 현재 유튜버에서 약 150만 명의 구독자를 거느리고 있다. 정확하진 않겠지만, vling의 유튜브 채널 분석에 따르면 미미미누님의 메인 채널은 최근 30일 조회수 수익으로만 최소 2천만 원 이상을 벌은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위키를 보니 미미미누님은 원래 코미디언을 지망했었다고 한다. 그의 끼가 유튜브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의 성공을 이끌었겠지만, 오수라는 콘텐츠도 무시 못한다고 생각한다. 근데 내가 미미미누님이었다면, 아마 심장을 치며 재수하기 전의 점수에 맞춰 어떤 대학을 다니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난 기대치 이하의 수능 결과를 토대로 마음 가득 미련과 함께 원치 않았던 대학에 입학했다. 결국 재수를 선택하지도 못했으면서, 4년 내내 모교를 좋아하지도 못했다. 그 학교를 꾸역꾸역 졸업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바보 같다. 1년 정도 도전해 볼 수 있었는데.
대학을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동기들은 다들 '이런 거 궁금해. 저런 거 궁금해' 하면서 저마다 휴학을 선택했다. 나도 궁금한 것, 하고 싶은 것, 쉬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원하지 않는 학교에 와서 휴학까지 할 수는 없었다. 개강 전날에 학교 가기 싫어서 엉엉 우는 바보 같은 짓을 하기도 했고, 그 짓거리를 반복하다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와 이별까지 경험했다.
그러면서도 난 꾸역꾸역 그냥 그렇게 살았다. 덕분에 칼졸업 후 24살에 꽤 괜찮은 직장에 입사했다. 동기 중 제일 어린 입사자 타이틀을 얻고 꽤 기분이 좋았다. 난 그만큼 뭔가를 멈추는 걸 무척 무서워한다. 멈추면 다시는 달릴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살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사실 휴학이든 재수든 멈추는 게 아니라는 것. 때로는 나에 대해 고민이 필요할 때도 있고, 더 좋은 결과를 위해 준비 운동이 더 필요할 때도 있다는 것을.
그걸 알고 나서야 퇴사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게 퇴사 60일 차를 맞이했다.
요즘 나는 이렇게 지낸다. 일어나면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적당한 시간이 되면 2~30분 정도 지금은 음이 맞지도 않는 피아노를 연습한다. 피아노는 내가 꽤 오래전부터 사랑하던 악기지만 회사 생활에 뒷전 중에서도 뒷전으로 밀려난 취미다. 이제 다시 한번 피아노를 쳐보려고 하니 피아노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오랫동안 조율하지 않아서 음은 엉망이라 듣기가 어렵다. 손은 굳어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나 치던 곡을 겨우 뚱땅거릴 수 있다. (이번주에 큰맘 먹고 조율할 예정이다.)
어쨌든, 피아노를 친 다음에는 운동을 한다. 난 여러 명이랑 운동을 한다. 아는 사람은 아니고 그냥 개별 pt를 감당할 돈이 없어서 단체 pt를 한다. 처음에는 사람들이랑 운동하는 게 부끄러웠는데 몇 번 하다 보니까 못하는 것도 부끄럽지도 않고, 땀냄새날까 봐 걱정되는 마음도 조금씩 옅어졌다.
처음엔 pt 선생님이 가까이 오면 당황해서 쭈뼛거렸는데 이제는 pt 선생님한테 근손실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선생님, 근데 매일 운동하면 저 근손실 오진 않을까요?", "선생님, 근데 저 예전보다 좀 잘하는 것 같지 않나요?"
운동을 마치고 나면 이유 없이 백수의 하루가 무척 생산적으로 느껴진다. 단백질 쉐이크를 먹고 샤워를 하면 벌써 오후가 되어버리지만 하루를 이대로 마무리해도 좋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럴 때 침대에 누우면 2시간 정도 마치 여기가 스페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에스타(스페인 사람들이 너무 더워서 자는 낮잠)를 때려버리게 된다.
혹시 졸음을 참고 책상에 앉게 되면, 네이버 블로그 포스팅을 한 두 개쯤 한다. 책도 읽는다. 퇴사하고 벌써 책을 몇 권은 읽었다. 책을 읽으면 느끼는 것도 많고 블로그랑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면 내가 여전히 생산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되기도 한다.
미래에 대한 고민은 하면 할수록 복잡해서 조금 미뤄놓게 된다. 내가 이런 걸 미뤄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이번에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래서 요즘 내 통장에 들어오는 돈은 하나도 없다.
인생에서 몇 번쯤은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어릴 때 재수를 1년 했더라도, 대학을 다닐 때 휴학을 한 학기 했더라도 지금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란 걸 알고 있다. 어쩌면 그 휴식을 토대로 더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끔은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내가 백수로 지내는 시간이 먼 훗날에는 그렇게 기억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솔직히 백수인게 조금 쫄린다. 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