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53일간의 기록
퇴사하고 꼭 하고 싶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로컬살이다.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서 리틀포레스트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나는 꽤 오래전부터 어딘가 시골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싶었다. 잦은 이직으로 로컬살이를 위한 충분한 휴가가 없었던 탓에 결국 퇴사를 하고 나서야 로컬살이를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막상 한 달이라는 꽤 긴 기간 동안 어딘가 시골에서 살 생각을 하니 비용도 비용이고 내 부실한 생활력이 우려스러웠다. 리틀포레스트는 커녕 리틀배민월드가 될 것이 뻔했다. 다행히 세상이 나를 돕는지 취지만 맞는다면 저렴한 가격에 로컬살이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꽤 많았고, 난 벌써 세 번째 로컬살이를 진행 중이다. (지금 그래서 경상도 함양에 있다.)
나의 첫 번째 로컬살이는 태안 고남면에서 하는 어촌살이 프로그램이었다. 가자미 목까지 딸 정도로 나름 날 것의 어촌 생활을 경험하게 해 준 로컬살이. 직접 그물을 짜기도 하고 배를 타고 게까지 수확하면서 많은 것들을 처음으로 해볼 수 있었다. 혼자 하는 국내 여행 경험이 거의 전무한 나에게 고남면은 많은 것을 열어준 곳이다.
이곳에 다녀온 뒤로 생선의 비린 내와 밤하늘을 수놓는 벌레들이 훨씬 친근하게 느껴졌다. 가로등이 적은 탓에 생기는 어둠의 매력도 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숙소 근처에 마트가 하나도 없는 탓에 삼시세끼 차려주는 밥을 먹으며 편하게 지냈고 나름 고된 일정에도 불구하고 2kg나 찌는 기염을 토했다.
두 번째는 진천 뤁스퀘어에서 진행한 2박 3일 로컬살이. 로컬'살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짧은 기간 동안 그곳에서 여유로운 일정 속에서 스마트 팜 견학도 하고 사업기획에 대한 여러 고민을 해볼 수 있었다. 비슷한 나이대의 청년 6명과 굉장히 좋은 숙소에서 두 밤을 보냈는데, 6명이서 한 방을 사용하며 수년 전 학창 시절 수련회가 떠오르기도 했다. 삼시세끼 차려주는 맛있는 밥을 먹으며 하나로마트에서 덕산 막걸리까지 야무지게 사 마셨다.
퇴사하고 얼마 사이에 태안 로컬살이, 그다음은 진천. 이번에는 세 번 로컬살이를 위해 함양으로 떠난다고 하자, 이에 대한 내 주변인의 반응은 이렇게 나뉘었다.
1. 개 부럽다.
2. 너 쉬는 거 맞아? 무슨 일 하듯이 로컬살이를 해? entj의 휴식은 원래 이렇게 이상해?
1번은 전적으로 공감했다. 그렇지. 개 부러울 일이었다. 내 주변에서 이 나이에 이 상황에 일하지 않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로컬살이를 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2번? 솔직히 일하듯이 로컬살이를 한다는 의견에는 크게 공감이 되지는 않았다. 태안에서도 진천에서도 나는 너무 재미있었으니까.
근데 세 번째 로컬살이를 떠나기 전 갑자기 뭔가 내키지 않는다는 마음이 들었다.
세 번째 로컬살이는 함양으로 떠나는 휴일 스테이. 컨셉은 이랬다. 일주일 동안 참여자끼리 느슨한 관계와 여유로운 일정 속에서 산책, 텃밭 농사, 로컬 음식 만들기, 책 읽기 등등의 활동을 하며 자신만의 시간도 함께 갖는 프로그램. 하루에 점심 한 끼는 무료 제공되고, 나머지 식사는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이 프로그램을 신청하며 내가 상상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정말 적당히 느슨한 관계와 일정 속에서 나에게 집중하는 것. 심지어 아침과 저녁은 그냥 샐러드와 단백질 쉐이크로 해결하며 좀 더 멋진 바디 쉐잎을 만들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다 이 모든 것들이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한 것은 프로그램 시작 며칠 전. 참여자들의 오픈 채팅방이 열리면서부터였다. 각자 식사를 해결하기보다는 함께 요리를 만들어 먹어야 하는 분위기였고, 미리 먹을 만한 반찬을 싸 오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난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 빼고 의견이 잘 맞는 것을 보니 왠지 그들과 나는 결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많은 것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며칠을 가까이 지내야 하는 것도, (심지어 오픈 채팅방에서의 대화로 추정하건대 나랑 조금 안 맞을 것 같은 사람들과), 이들 중 누군가와는 같은 방을 써야 한다는 것도. 서울에서 함양까지 가야 하는 것도.
게다가 일기예보에 따르면 함양에 있는 기간 내내 비가 내릴 예정이었다. 이 모든 것이 뒤엉켜 하루 전까지도 가기 싫다는 생각을 5번 정도는 했다가 예약금을 걸어둔 것이 있어서 갔다.
서울에서 출발하는 날에는 비가 많이 내려 짐을 가지고 이동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시간이 촉박해 백수 주제에 택시까지 타는 부담스러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속으로 몇 번을 생각했다.
'아, 가지 말까?'
그리고 지금 나는 경상도 함양에 와 있다. 근데 막상 오니까 너무 좋았다. 행복할 정도로 좋았다.
이 행복함의 시작은 무척 사소한 것이었다. 나랑 같이 방을 쓰는 룸메이트가 며칠 뒤에나 합류할 예정이라 이틀 정도는 혼자 방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로컬살이를 하면서 단 하루도 혼자만의 개인 공간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룸메가 며칠 동안 없다는 것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나랑 성격이 맞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그이들의 성격은 얼마나 좋은지. 내가 오기 전에 미리 도착해서 밥을 만들어 두고 나를 환대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런 진심의 환대를 받아본 적이 얼마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들을 처음 보는데 그냥 마음이 녹아내렸던 것 같다.
혼자 샐러드와 단백질 쉐이크를 먹겠다는 어리석은 다짐을 뒤로 한채, 어느새 나도 다른 참여자들이 맛있게 먹을만한 간단한 음식들의 레시피를 계속 찾게 되었다. 그러다 감자피자, 크림뷔릴레까지 만들게 되었다. (둘 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음식이었다.)
요리에 쓰인 감자와 양파는 직접 텃밭에서 수확'만' 해온 것들이라 더 뜻깊었다.
난 세 번째 로컬살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전에 나름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혼자 시간을 보내며 내가 계획했던 뭔가를 완성하는 일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내가 계획한 일은 아예 시작도 못했다. 펴보지도 못했다. 그 대신에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맛있는 걸 해 먹고, 동네 나무 아래서 요가를 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자전거를 탔다. 밤에 노을이 질 때쯤에도 자전거를 탔다.
자전거를 타면서 본 풍경은 온통 초록이었다. 때론 하늘색이기도 하고 분홍빛과 회색빛이 섞여 있기도 했다. 난 내가 계획한 것이 꼭 완성되어야먄, 최소한 시도해야만 그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렇지 않아도 너무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너무나도 절실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