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4. 내 인생에 다신 없길, 그녀_(2)

[4~6개월] 이게 진짜 산전수전

by 하이히니

그녀를 좋아할 순 없어도, 그녀를 증오하지는 말자는 마음으로 살고 있었는데,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터졌다.


감사실에 민경이 언니에 대한 투서가 다섯 장이나 접수된 것이다. 주된 신고 내용은 그녀의 폭력적인 성향, 업무 태만 등 대부분 사실이긴 했다. 그 투서 때문에 그녀는 물론 팀 전체가 감사실로 불려 가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와 보라 언니가 투서를 보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실 그녀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민경 언니는 나와 보라 언니는 의심하면서도 세호 오빠는 절대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도, "남자가 설마 투서까지 썼겠어?" 라며, 우리를 의심했다.


하지만 우린 진짜 아니었다. 언니가 안쓰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서도 그랬지만, 사실 저런 투서를 보내도 바뀌는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내용 확인 대신 누가 투서를 보냈는지를 더 열심히 밝힐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경험상, 신고한 사람 영혼만 탈곡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민경 언니가 이렇게 날뛰도록 방관하는 조직인데 신고해서 뭘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마음으로 참고 살았는데... 갑자기 누가 투서를 보냈단 말인가! 그때부터, 나와 보라 언니는 내부 고발자로 손가락질당하게 되었다. 여기서 왜 또 우리가 피해자가 된단 말인가!


민경 언니는 신고당한 것이 분한 지 팀장님을 따로 불러내 닦달하는 등 예전보다 훨씬 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날뛰자 선배들은 애꿎은 나와 보라 언니를 추궁했다.

“너희, 진짜 신고한 거 아니야? 맞지? 너희 아니면 누가 했을지 추려봐. 쟤 이상한 거 아는 사람 얼마 안 될 거 아니야. ”

“저희 진짜 아니고... 저희도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녀가 이상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 한 두 명도 아니고, 진짜로 알 길이 없었다. 당시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는 꽤 충격적이어서, 사무실에 있던 수십 명이 매일 그녀에 대한 가십거리를 다른 층으로 물어 날랐다. 그녀의 이상함은 너무나 유명했다. 참 이상한 것은 늘 이런 일이 터지면 사건의 본질보다 도대체 누가 신고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머지 사람들이 중요하지 않은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민경 언니는 본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까 봐 오히려 팀장님을 신고하기에 이르렀다. 그 일로 팀장님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민경씨, 지금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신고요? 제가 신고 내용처럼 그렇게 이상하고 태만하면 이 팀 관리자가 능력 부족인 거 아니에요? 그게 사실이면 저 때문에 사람들이 다 힘들어하고 있었다는 건데 그걸 방치한 거잖아요?”

“하...정말...”

“전 이 신고 취소할 생각 없으니까 무서우면 제가 신고당한 거나 똑바로 해결하세요. 우리 부모님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이러는 거예요? 나한테 피해가 생기면 가만 안 있어요. Keep in mind! 저한테 문제 생기면 팀장 그만둘 생각 하셔야 될 거예요. 팀에서 문제 생기면 제일 잘못한 건 팀장이에요. 팀장님”


신고당한 민경 언니가 궁지에 몰릴 것이라는 다른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민경 언니는 게임을 할 줄 아는 여자였다. 싸우면 이기는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더 힘센 사람? 높은 사람? 아니다. 더 미친 사람이다. 민경 언니보다 덜 미친, 팀장님은 문제가 더 커질 것을 우려해, 감사실에 신고내용이 사실무근이라고 했다. 그리고 팀원 모두에게 민경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외부에서 절대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보라, 현수. 세호. 잠깐 얘기 좀 할까?”

“네 팀장님.”

“정말 신고한 거 아니야?”

“네. 저희도 억울해요. 괜히 욕이나 먹고.”

“근데 신고했다고 해도 이해가 된다. 팀장인 나한테도 저러는데, 자기들한텐 오죽했겠어? 나 진짜 민경씨 미친 사람인 줄 알았어. 날 죽일 것 같더라니까?”

“저희도... 팀장님한테까지 저럴 줄은...”

“걱정됐겠지. 사실 민경씨 곧 이직해. 몰랐지?”

“정말요? 어디로요?”

“아직은...모르는 게 좋을 것 같아. 자기 딴엔 스트레스를 받았나 봐. 트러블이 많았으니까...그게 여기랑 수준이 안 맞아서 그런 것 같다고 하더라고. 아무튼...고생했어. 조금만 참자.”


오. 민경 언니가 이직한다고? 어딘진 모르겠지만 빨리 가버려라! 진짜 조금만 더 참자. 우린 민경 언니가 최대한 빨리 이 회사를 떠나 주길 바랐다. 그날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견뎠다. 우리가 본인을 신고했다고 생각하는 민경 언니는 그 뒤로 복도에서 지나칠 때 보라 언니의 어깨를 일부러 치고 가기도 했다.


“어머~거기 있었니? 미안. 앞으로는 조심해.”


정말 고등학생 청춘 드라마에서나 겨우 볼 법한 장면들? 그런 장면들이 몇 차례 반복되고 난 뒤에, 나는 민경 언니의 이직 과정이 ‘신원조회’라는 끝자락까지 와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직하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게 되었다.


그 날...휴게실에서는 선배들이 민경 언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 너희 앞으로 어떡해 진짜? 정민경 "C"로 간다며?”

“네?”

“어머? 너희 몰랐구나? 팀장이 말 안 해? 정민경 "C"에 간대. 너희 팀이랑 같이 일한다는데?”


민경 언니가 C로 이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라 언니는 텀블러를 떨어트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쉽게 말하면, C는 우리의 갑이었다. 내가 일하는 ‘B’ 기관은 공공기관이고, 'C' 앞에선 늘 을이 되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의견에 따라 업무를 하고, 관리를 받기도 하고, 보고도 해야 했다.


민경 언니는 그곳에 임시직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건 진짜 헬게이트가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임시직이긴 해도, C의 구성원이 되는 것도 맞고, 급여도 우리 회사에서 받았던 이상의 수준을 받을 예정이란다. 이제는 우리가 업무 보고 할 때 그곳에서 그녀를 봐야 했다. 어쨌든, 우리의 갑이 된 그녀를 말이다.


그녀의 퇴사 시기가 다가올수록, 마음은 뒤숭숭했다. C에 입사하는 데에 별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좋아졌는지, 그녀는 우리에게 갑자기 말을 걸고 예전처럼 훈수를 두기도 했다.

"Free advice. 너희들도 너희들을 위한 게 뭔지 잘 생각해. 한국에 있는 그저 그런 대학 나와서...평생 이 조그만 회사에서...이렇게 살다 죽으려고 태어난 건 아닐 거 아니야? 물론 너희들이 나처럼 해외에서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답답하겠지."


원래 비싼 건 이유가 있다고 하던데, free advice라서 그런지 그녀의 조언은 매우 형편없었다.


어쨌든 시간은 야속하게 흘렀다. 결국, 그렇게 민경 언니는 C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가 C에 가게 되자, 팀장님은 다시 나, 보라, 세호를 소집했다.

"이렇게 부른 건...민경씨 얘기는 다 알지?"

우리는 힘없는 목소리로, "네..."라고 했다. 우리의 힘 없는 대답을 듣고, 팀장님은 한참 뜸을 들였다.

"아...이런 얘기 하는 거 나도 좀 그런데...셋 중에 한 명이 한 달 정도, C에 파견을 가야 할 것 같아..."


파견? 파견이라...사실 경우에 따라 파견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건 정말 아니었다. '을'의 기관에서 '갑'의 장소로 혈연단신의 몸으로 파견을 간다? 가서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외롭게 지낼지 눈에 선했다. 게다가...혹시...


"팀장님...근데 혹시 그럼 C에 파견가면 민경 언니 있는 부서에서 일하는 거예요?"

"아...많이 불편들 하지? 근데...딱 한 달이니까..."


잔인한 팀장님은 간단하게 상황만 설명해준 뒤 자리를 비웠고, 내일까지 셋이 논의해서 파견갈 사람을 정하라고 했다. 어떻게 이럴수가...! 셋이 누가 죽을지 정하라는 것만큼 잔인했다. 쉽사리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상황에, 입을 연 건 세호 오빠였다.


"내가 갈게."

"오빠..."

"노답이긴 한데... 너희들이 가는 것보다는 내가 가는 게 더 나은 것 같아. 정민경 어쨌든 나한텐 좀 덜 심했잖아. 그리고...사실 그 투서...내가 썼어. 내가 썼는데 그게 너희들한테 더 피해가 갈 줄 몰랐어. 미안하고...그래서 이건 내가 갈게."


몇 주 후, 세호 오빠는 C에 출근하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파견 와서 너무 힘들다면서 욕도 하고 밝은 모습을 유지하더니, 그는 점점 더 말수도 적어지고 우울해 보였다.


그러다, 업무 차 보라 언니와 만나게 되었는데, 보라 언니에게는 커피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단다.

“저기, 보라씨 Can I have a cup of coffee please? 디카페인으로. 난 카페인은 아예 못 마시거든?”

“네? 커피요?"

“어. 그럼 내가 타 마실까? 그건 좀 그렇잖아. 안 그래?”


보라 언니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민경 언니에게 커피를 타다 바쳤고, (근데 디카페인이 아니라서 혼까지 났고) 결국엔 그 분통 터지는 마음을 참지 못해 내 앞에서 허공에 주먹질을 해댔다. 보라 언니는, 세호 오빠가 C에서 정말 힘들게 일하고 있을 것 같다면서 걱정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민경 언니는 본인 수준에 맞는 곳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에 C에 입사하긴 했지만 그녀는 그곳에서도 한결같은 소나무처럼 본인의 본색을 드러내며 지냈다.


“대학 안 나온 거예요? 원래 여기 수준이 이랬어요?”, “평범한 사람이랑 결혼한 거예요? 솔직히 우리 정도 급이면 검사, 판사 아니면 만나기 좀 그렇지 않아요?” 이런 말을 내뱉으면서 우리 회사에 있었던 것처럼 일도 안 하니 그곳에서도 자연스럽게 도태되었다. 그렇게 그곳에서도 대부분의 일에서 제외되었고, 다행히 우리와 마주칠 일도 적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님이 나를 불렀다.

“현수. 정말 미안한데, 이번에 민경씨랑 일해야 될 거 같아.”

“저요?”

“정말 미안해. 근데 나도 현수가 최대한 민경씨랑 안 엮이게 할 거고. C에서도 노력할 거라고 했어.”

“근데 같이 일하면서 어떻게 안 엮여요...?”


청천벽력 같은 소식. 이제 나도 그녀에게 커피를 대령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고위급 해외 인사가 C를 방문해서 MOU를 맺는다는데, 민경 언니가 관련 업무를 맡았단다. 이 일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무조건 이 일을 혼자 하겠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행사 규모가 좀 있어서 몇 명 지원 인력이 붙었는데, 그중 하나가 나였다. (하필, 그 사람의 모국어가 불어였기 때문에)


내가 불안해한다는 것을 눈치챈 팀장님은 나를 계속 달래주었다.

“정말 걱정 마. 이미 거기 과장이랑도 말 다 했고. 일단 민경씨한테 전화해서 간단한 일정이랑 자료 받아. 딱 하루만 고생하자. 거기 과장 말로는, 일단 현수씨가 불어를 할 수 있으니까 그분 모시고 행사장까지만 오면 될 것 같아. 그때만 민경씨랑 있으면 끝이야.”


엮일 일 없게 해 준다더니, 전화를 하라고?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렇게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김현수입니다. 통화 가능하십니까?”

“왜 전화하셨죠?”

“지금 저희 팀장님께 전달받기로, 이번 행사 때문에 제가 몇 가지 지원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관련해서 자료 요청드리려고 전화드렸습니다.”

“그걸 왜 달라고 하죠? 지원 필요 없고 제 일입니다.”

“(나도 하기 싫다고...) 당일에 간단하게 의전을...”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 그녀는 내 말을 매섭게 끊었다.

“의전? 네가 여기 낄 급이야? 의전 시킬 거면 최소한 너네 본부장 불러. 이건 내 일이고 넌 여기 낄 수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일 없으니까 욕심내지 마. 그리고...영어 뭐 잘하시긴 하세요? 한국 대학 졸업해놓고?”


이거, 이 일 제대로 할 수 있는 거 맞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