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개월] 이게 진짜 산전수전
민경 언니는 나를 약탈자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본인이 돋보일 수 있는 일을 빼앗으려는 그런 사람 정도로? 결국, 나는 이 일을 팀장님에게 보고했고, 팀장님은 'C'에 있는 민경 언니의 상사와 통화해서 이 일을 해결하고자 했다.
“현수. 내가 다 통화했어. 권주무관이 대신 자료 보내주기로 했고, 그냥 당일엔 몇 시간 전에 가있어. 입구에서 행사장까지 한 5분만 안내하고. 당일에도 권주무관이랑만 통화해.”
그리고 행사 당일, 나는 2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서 권주무관에게 연락했다.
“주무관님, 저 김현수입니다.”
“아, 내용 전달받았어요. 민원실로 갈게요.”
민원실에서 조우한 우리는 고위급 인사 동선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큰소리치던 민경 언니가 동선 관련해서 어떤 일도 해놓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통 고위급 인사가 방문할 때는 차가 진입할 수 있도록 차량 번호 확보, 주차 장소 확보, 방문증 발급 없이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이름, 사진 등 정보 전달 등을 해두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일이 전혀 처리되어 있지 않았고, 이 대로라면 고위급 인사의 차량은 C에 들어올 수도 없고 신분 확인을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 주차 공간도 확보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가 미리 했어야만 하는 일을 급히 처리하기 위해 나와 권주무관은 동분서주 움직였다. 그렇게 고위급 인사 도착 예정 20분 전에야 민경 언니가 뿌린 똥을 다 치우고 그를 맞이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주임님, 저는 사무실 갈게요. 이거 제가 한 거 알면 또 정민경이 난리 칠 거 같아서. 주임님도 걱정되네요.”
“주무관님, 저도 접견실까지만 가요. 설마 5분 동안 무슨 일 생기겠어요?”
아니. 민경 언니와 함께라면 5분 동안 충분히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걸 꼭 기억해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민경 언니에게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네, 김현수입니다.”
“지금 고위급 올 시간 다 됐는데 어디서 뭐 하고 있죠?”
“정문 쪽으로 오신다고 전달받아서 정문에서 대기 중입니다.”
“왔는데 저한테 왜 보고 안 했죠? “
“저는 전달받은 대로 권주무관님이랑 통화했습니다.”
“지금 여기서 누가 중요한 사람인지 모르나 봐요? 내려갈 테니 대기하세요. 일단.”
그녀는 몇 분 뒤 평소보다 유독 더 무서운 표정으로 정문에 왔다. 그녀의 발걸음에서 분노가 느껴져 해코지당할까 봐 두렵기도 했으나, 마침 고위급 인사의 비서에게 정문 바로 앞이라는 연락이 왔다.
나와 민경 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위급 인사와 수행원들에게 인사했다. 여기서 5분만 더 버티면 된다는 생각에 정신을 다잡았는데, 갑자기 민경 언니가 내게 말했다.
“김현수씨. 이제 그쪽은 필요 없는 사람이니까 이제 그냥 가세요.”
태어나서 필요 없는 사람이니까 가라는 말을, 아니 그 비슷한 말도 처음 들어보는 탓에 난 당황스러웠다. 다시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접견실까지만 안내드리고 가겠습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네요. 다시 한번 말할게요. 김현수씨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없어야 되는 사람이니까 가세요.”
한국어를 알아듣는 수행원들은 나와 민경 언니를 번갈아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을 지었고, 외국인들은 한국어를 몰랐지만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했다. 나 또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면전에서 이런 수모를 다한 건 난생처음이었다.
내가 쉽사리 물러나지 않자, 민경 언니는 경비원에게 갔다. 그러더니, 나를 손가락질했다.
“저기요. 저 여자 보이죠? 저 여자 잡상인이니까 그냥 끌어내 주세요. 안 나간다고 하면 들어서 버리세요.”
들어서 버리라고? 들어서, 버리라고?
실제로 경비원들은 날 들어서 버리진 않았지만, 내게 와서 신원 확인을 했다. 행사 장소까지 3번 정도 경비원을 지나쳤는데 그때마다 민경 언니는 그들에게 가서 “저 잡상인 못 끌어내면 그쪽도 업무태만입니다.”며 나를 끌어내라고 했다. 그때마다 난 신원 확인을 받았다. 미리 받은 방문증과 정상적인 행색, 그리고 지나가다 나를 알아본 다른 직원 덕분에 앞서 간 그들을 뒤따라갈 수 있었다.
그들을 뒤따라가면서도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3번씩 끌려 나갈 위기에 처하면서 이 일을 해야 하는 건가?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수행원들은 민망함에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한국어도 모르는 고위급 인사는 오히려 내 눈치를 보며 내게 말을 걸기도 했다. 고위급 인사가 내게 관심을 주자 민경 언니 얼굴은 욹그락붉그락했다.
그렇게 행사장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엘리베이터 앞까지 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나는 사람들이 먼저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게 밖에서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내가 탑승하려는데, 민경 언니는 안에서 닫힘 버튼을 계속 눌렀다.
“김현수씨, 필요 없는 사람은 이 엘리베이터 못 타요. 끈질기네요. 그만 하시죠 이제.”
나는 무슨 오기로 거기까지 가려고 했을까? 지금도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겠지만, 난 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온 힘을 짜내 웃으며 말했다.
“행사장까지만 안내드리고 가겠습니다.”
“김현수씨, 제가 좀 혼내야 할 거 같으니까 오늘 이 일 끝날 때까지 대기하세요. 알겠죠?”
정말 수치스럽고 모욕적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의 사람들은 모두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차라리 처음 잡상인 취급받을 때 나왔어야 했나? 어쨌든 나는 그들을 행사장까지 배웅했고, 터덜터덜 건물을 빠져나왔다. 최대한 이 상황에서 멀어지고 싶어서 조금 걸었고, 이내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그때 민경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 받았다. 그러자 또 전화했다. 안 받았다. 문자가 왔다.
'오늘 저한테 혼날 게 있을 텐데. 대기하라고 했을 텐데 어디가신거죠?' 답장하지 않았다.
앉아서 멍하니 몇 분을 보냈을까. 보라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현수야, 너 어디야?”
언니의 목소리를 듣자 겨우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언니...”
“너 울어? 왜 그래?”
수화기 넘어 “뭐야, 현수씨 울어?”라며 걱정하는 팀장님의 목소리도 들렸다. 정말 서러움이 폭발했다.
“언니...흐흡..흑...정민경 그년이...흐흡..흐으으..윽...” 나는 꺽꺽거리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정민경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방금 걔가 팀장님한테 전화했어. 직원 교육 제대로 안 시키냐고... 너보고 날뛰는 망나니랬나 망아지랬나? 앞으론 수준 있는 순종적인 직원 보내라고 했데.”
언니와 전화를 끊고도 앉아서 엉엉 울었다. 그때, 세호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너 어디야?"
"나...왜?"
"나 지금 보라한테 전화받았어. 정민경 진짜 미쳤나... 어디야?"
어차피 그 기분으로 도저히 회사에 바로 복귀할 수가 없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우리는 근처에 있던 카페에서 음료와 케이크를 먹었다. 한 20분쯤 지났으려나? 이제 좀 마음이 진정되고 있는데, 뒤에서 그 무서운 목소리가 또 들렸다.
"김현수씨."
민경이 언니였다. 또다시 몸이 굳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어. 뭐 억울하다 싶으면 남자 앞에서 우시죠?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큰 일을 망칠 뻔했다고요!!"
언니의 고함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우리 쪽을 쳐다봤다. 세호 오빠는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주무관님. 여기 공공장소예요. 진정하시고...김현수씨 이제 조심히 회사 들어가 보세요."
난 가급적 민경 언니와 빨리 멀어지고 싶었다. 내가 일어나자, 민경 언니는 내 앞에 와서 내 앞을 막으며,
"제대로 사과하고 가세요."
이 사태를 보고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세호 오빠는 민경 언니와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주무관님, 진정하시고, 김현수씨 빨리 나가세요."
오빠는 나를 보고, '괜찮으니까, 어서 너라도 나가...☆' 같은 표정을 지었고, 화내고 소리치는 민경 언니를 붙잡고 있었다. 나야 그냥 회사로 돌아오면 그만이지만, 세호 오빠는 또다시 민경 언니와 함께 사무실에 들어가야 할 텐데, 또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너무 걱정스러웠다. 도살장에서 나 혼자 도망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내가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팀장님은 민경 언니와 소리치며 통화하고 있었다.
“김현수씨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하지 마세요! 그리고 어디 공공기관 팀장 주제에 의견 얘기하지 말라느니 그딴 소리합니까? 자꾸 그러시면 전화 끊겠습니다.”
우리 팀장님의 큰 목소리가 사무실 구석구석 퍼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또다시 미어캣처럼 그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날을 기점으로 나와 보라 언니는, 정민경의 만행을 묵묵히 견뎌온 호구같이 착한 직원이 되었다. 팀장님은 부당한 대우를 받은 나를 위해 정민경과 맞선 사람이 되었다. 팀장님이 C에 이 일로 여러 차례 컴플레인을 했고, 그 덕에 정민경은 그 회사의 모든 일에서 제외되었다. 그 덕에 다음 계약에 계약 연장은 없을 거란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이와 함께 회사 안에선, 그녀가 그곳에 입사할 수 있었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돌았다.
때는, 그녀가 우리 회사를 다니고 있을 때로 돌아간다. 당시 'C'는 업무 지원을 명목으로 우리 회사 직원들을 자주 불렀다. 가끔은 'C' 안에 자리를 마련해두고 일을 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일종의 갑질로 분류되는 행위였다.
나와 보라 언니 또한 수시로 불려 가 일을 지원했고, 민경 언니도 그런 업무 지원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본인이 갑질을 당했다는 생각에 분노한 그녀는 때마침 C에서 나온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다. 그 자리에 지원하고, 'C'의 담당자에게 연락했다.
“저 정민경인데, 지금 채용 공고 나온 거 보고 지원했거든요?”
“아...근데 저한테 왜 전화를 주신 건지?”
“가능하면 제가 거기서 일했으면 해서요.”
“다니는 회사는 정규직인데 거긴 어쩌게요? 그리고 절차가 있는데 저한테 연락을 하셔도 소용없어요.”
“지난달 저한테 갑질 한 거 기억하시죠?”
“갑질이요?”
“저는 다른 회사 사람인데, C에 출근하게 해서 일 시켰잖아요. 제 일도 아닌데.”
“근데, 실제로 그 업무 제대로 하지 않았잖아요.”
“갑질을 거절한 거죠. 저 그때 날짜도 있고 기록도 있어요. 저 합격 안 하면 갑질로 신고합니다.”
이 전화를 받고 적잖이 당황한 담당자는 우리 회사에 전화해서 이 문제를 상담했다. 이 문제를 전달받고 우리 팀장님, 그리고 본부장님까지 고민을 했는데, 어쩌면 이게 우리 회사에서 정민경을 나가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단다. 물론 C로 가는 것 때문에 한 동안 고생은 하겠지만, 저런 성격과 실력이라면 계약이 연장될 수 없었고 당분간만 참으면 그녀를 볼 일이 아예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그렇게 우리 팀장님은 담당자에게, “업무 역량은 좋은 편이고 맡은 일에는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갑질 문제에는 조금 예민한 것 같지만 구성원으로서는 좋은 직원이다.”라고 했다.
안 그래도 그녀가 신고를 할까 봐 부담스러웠던 담당자는 팀장님의 말이 사실이길 바라며 그녀를 채용한다. 여기까지가 그녀가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던 비하인드 스토리란다.
본인의 실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일자리를 갖게 된 그녀는, MOU 행사를 기점으로 점점 이상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계약 만료 30일 전. 그녀는 계약 연장이 없을 것이란 통보를 받았다. 그러자 그녀는 또다시 협상을 시도했다.
그녀가 협상을 시도하면서 카드로 들고 나온 것은 본인의 수첩. 그 수첩은 그녀가 근무하면서 적어두었던 치부책이었다. ‘OO월 OO일 OO시 OO분 권주무관 화장실 간다고 했는데 20분 자리 비움.’, ‘OOO이 나에게 반말함.’, ‘XX월 XX일 XX시 XX분 이사무관 개인적인 통화로 15분 자리 비움.’ 등등...
“저, 계약 연장 안되면 이걸로 국민신문고 신고할 겁니다. 썩은 이면을 알릴 거라고요!”
"저희 부모님이 국제변호사인 건 알고 있죠? 다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요?"
그녀는 여기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아니. 구성원들은 본인들이 어떤 불이익을 받게 되더라도 그녀를 내쫓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계약 만료가 없다는 통보를 받고 30일 동안 그녀는 그곳의 사람들을 몹시도 괴롭게 했지만, 결국 C를 떠나게 되었다.
지금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 제일 절실히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세상에 생각보다 이상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회사를 다녀서 이상한 건지, 이상한 사람이 회사에 들어온 건지 잘은 몰라도,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굉장히 많았다.
더 답답한 건, 회사 밖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안 보면 그만이지만, 업무로 만난 사람이 저 지경이면 도저히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저런 사람들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다가도,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다 회사 안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었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좋은 사람들보다 나쁜 사람들이 더 부각되어서 잘 표현이 되진 않았지만, 저런 시간을 함께해준 좋은 사람들도 참 많았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더 화를 내고 싸워주던 보라 언니, 세호 오빠, 마음 맞는 동기들 같은...?
이상한 사람이 많아도, 세상엔 좋은 사람들도 있고 또 나도 좋은 사람이 되면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