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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4개월] 감사실에서 생긴 일

by 하이히니

나는 못 마시는 것이 참 많다. 술도 거의 못 마시고, 커피, 탄산음료, 각종 에너지 드링크까지 모두 못 마신다. 하지만 알다시피, 내가 못 마시는 이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꽤 많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술, 커피, 탄산, 에너지 드링크를 좋아할 거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된 비극.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때는 입사하고 4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이미 썼던 것처럼, 그 당시 민경 언니는 근무 태만, 폭력적인 행동 등에 대한 투서가 접수되었다. 이에 대한 사실 관계를 조사하던 곳은 회사 감사실이었고, 민경 언니는 물론 그 당시 팀장부터, 세호 오빠, 보라 언니, 나까지 팀원 대부분이 감사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감사실. 조사.

이 단어 자체가 주는 긴장감이 있었다. 그래도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괜찮겠지?


하지만, 감사실의 분위기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좋지 않았다. 일단 사방이 막힌 공간에 위치한 감사실은 그 어떤 소음도 허락되지 않은 듯이 조용했다. 일하고 있는 직원들도 뭔가 시니컬한 표정이었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도 뭔가 위압감을 줬다.


“어, 김현수씨. 여기 방으로 들어와요.”


다행히, 감사실장님은 꽤나 온화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감사실장님의 방으로 들어왔을 때의 그 조용함과 쌀쌀한 공기가 날 얼어붙게 했다. 분명 밖에 날씨는 이렇지 않았는데, 도무지 그 안이 왜 이렇게 추웠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긴장돼지? 일단 여기 앉아요.”

“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그냥 간단한 것만 물어볼 거니까. 이거 마시고.”


그는 내게 에너지 드링크를 하나 건넸다. 그 음료를 받기 했지만 먹지 않는,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음료였다. 그 음료를 마시지 않고 테이블 위에 놓으려는데,


“김현수씨,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그냥 편하게 마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강권하며) 나 그렇게 불편한 사람 아니래도 그러네.”

“(네?) 아닙니다. 평소에 에너지 드링크를 안 마셔서...”

“그래도 이럴 땐, 편하게 얘기 나누면서 마셔도 괜찮아요.”


트릭인가? 그는 테이블 위에 있던 에너지 드링크를 가지고 가더니 손수 뚜껑을 여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환하게 웃으며,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 편하게.”


하지만 나는 이미 그의 강권으로 불편해질 대로 불편해진 상태였다. 뚜껑까지 따버렸는데, 먹어야 하나? 근데 먹어본 적도 없는 음료를 먹었다가 괜히 큰일 나는 거 아닌가?


머릿속에 이런 고민이 왔다 갔다 할 때, 갑자기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내게 해왔던 말 한마디가 생각났다.

‘나는 꼭 누가 뭐 못 먹는다, 안 먹는다, 이러면 예민한 것 같고 별로더라?’

별로더라...별로더라...


안 먹으면 예민, 별로? 예민하고 별로? 난 고민을 하다, 별 큰일이 나겠냐는 마음으로 원샷을 했다. 마시면서도 이걸 사람들은 도대체 왜 좋아하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최소한 예민하고 별로인 사람이 되는 것은 피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그래. 편하게 마시니까 좋잖아.”


실장님도 흡족해 보였고, 이후 신입직원으로서 내가 회사에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지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질문과 답변이 몇 차례 오고 간 이후, 그렇게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간략하게 설명을 하자면, 그 팀에 있는 민경 씨에 대해 신고가 접수되었고, 신고 내용은... 그런데... 이 상황....그리고...그 팀은...”


근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몸에 힘이 점점 빠지고 정신은 몽롱해졌다. 그리고 실장님이 하는 말을 중간중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몽롱함에 나에게 뭔가 큰일이 난 건 아닌가 싶었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여긴 감사실이야!


“그러니까, 지금까지 현수씨가 겪은 일에 대해서도 얘기를 좀 했으면 좋겠어.”


다행히 실장님이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은 제대로 알아들었고, 대충 내 얘기를 들려주면 되는구나! 싶었다.

“네, 실장...님...저는요...”

“그래, 현수씨.”

“저는...민경 언니가...솔직히 일도 안 하고... 그리고... 어 그리고...”

“현수씨, 왜 이래?”


왜 이러긴. 나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에너지 드링크를 원샷했고, 이런 일은 나도 처음 겪는 것이었다. 제대로 대답을 하고 싶지만 눈앞은 점점 희미해지고, 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현수씨! 현수씨! 정신 차려!”

“저는...아주 괜...찮습니다...”


내 기억에 따르면, 실장님과 감사실 팀원들은 나를 걱정했고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팀 선배인 송선임이 나를 부축하던 기억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완전히 정신을 차린 것은 얼마 뒤 회사 보건실에서였다. 정확히 언제부터 잠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감사실에 들어간 이후 1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 해에 입사한 신입직원인 내가, 보건실에서 잠을 자다니!


허겁지겁 휴대폰에 쌓여있는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클릭하기가 제일 겁나는 메시지는 바로 송선임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맨 마지막 메시지는, ‘그리고 너 앞으로 에너지 드링크 절대 마시지 마.’.


안 그래도 무서운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났을까? 떨리는 손으로 그녀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너 아무래도 에너지 드링크가 잘 안 맞나 보다. 감사실에서 그거 먹고 조사받다가 갑자기 거의 잠들어서, 우리 팀으로 전화 왔어. 그 전화받아서 내가 너 여기 눕혀두고 간다. 팀장님한테는 말해뒀어. 그리고 너 앞으로 에너지 드링크 절대 마시지 마.’


생각보다 너무 따뜻한 메시지...에 감동할 시간은 없이 당장 사무실로 뛰어갔다. 나를 보더니 송선임은, 생각보다 호쾌하게 웃으며 날 반겨줬다.


“나, 회사 다니면서 에너지 드링크 마시고 기절한 사람 처음 봤다. 정말. 괜찮아?”

“네...너무 죄송합니다. 저도 처음 마셔봐서...”

“진짜 너 앞으로 그런 거 다시 마시지 마.”


그다음 날, 다시 조사를 받기 위해 감사실로 향했고, 감사실의 모든 사람들은 어제보다 한층 따듯하게 나를 반겨줬다. 그리고...그 뒤로 실장님이 정년퇴직하기까지 실장님은 나만 보면 그 에너지 드링크 얘기를 했다. 계절이 바뀌어도, 내 직급이 바뀌어도...



<지금 생각해보면>


현수는 감사실에서 왜, 한 번도 마셔보지 않았던 에너지 드링크를 원샷했을까? 일반적인 신입사원에게, 뭔가를 거절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대표적으로 술자리에서 술을 거절하는 것, 급작스럽게 잡힌 회식 참여를 거절하는 것, 내 일이 아닌 업무 요청 등등이 있을 것이다.


물론 거절이 아닌 다른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걸 택해도 좋지만, 분명한 거절이 필요할 때도 있다. 나처럼 감사실에서 에너지 드링크를 먹고 뻗어서 팀 선배한테 실려가는 것보다는, 분명히 거절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일 테니까. 가끔은 조금만 더 마음을 굳게 먹고 거절할 필요가 있다.

(근데, 만약에 모든 상황을 절절히 호소하는 데도 강권하는 핵꼰대가 있다면, 난 그 앞에서 에너지 드링크를 원샷하고 잠에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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