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날 내버려 둬!
입사 초기 신입 시절에는 바로 윗 기수 선배들이 우리를 챙겨주는 일이 많았다. 마치 대학교 신입생일 때 2학년 선배들과 술자리가 많았던 것처럼, 당시 바로 직전 입사자들과 친목 모임이 꽤 있었다. 아주 친하진 않더라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가급적 언니-오빠, 누나-동생 하면서 (왜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서로 친해지려고 노력하며 지냈다.
그러다, 때는 여름이었다. 우리 기수와 우리 윗기수가 함께 주말에 1박 2일로 래프팅을 가게 되었다. 기수 모임이라고 하지만, 1박 2일이라는 부담스러운 프레임 때문에 실제 참여 인원은 7~8명 정도였다. 사실 참여 인원 대부분 언니, 오빠 하면서 이야기 하는 사이이긴 했지만 정말로 가깝게 지내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난 당연히 래프팅에 불참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김예림이라는 선배가,
“현수야, 너 없으면 분위기 이상할 것 같아. 다른 사람은 다 안 된대. 같이 가자. 응?”
"아...근데...하....근데 언니도 그냥 안 가시면 안 돼요? 상황이 좀..."
"몰라...정한 오빠도 갈 것 같고...이 와중에 내가 안 가면 못 잊은 것 같고...민호 오빠도...아 몰라...제발 가자. 응?"
언니가 이런 말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나보다 한 기수 선배인, 예림 언니는 아담한 체구에 쌍커플 없이 동그란 눈이 매력적인 언니였다. 내 눈에도 매력적인 언니가 다른 사람들 눈에도 매력적이었던지, 우리가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 동기, 그러니까 예림 언니 입장에서는 후배인 정한 오빠와 사귀며 CC가 되었다. 한 동안 그들은 잘 지내는 듯했으나, 몇 개월 지나 이별하게 되었다. 거기까지면 괜찮을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은 한 단계 더 진행되는데, 실연의 상처를 이기기 힘들었던 예림 언니는 힘든 마음을 본인의 동기, 그러니까 나에게는 선배인 민호 오빠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다 예림 언니는 민호 오빠와 사귀게 되었고, 그 상태로 정한, 민호, 예림 모두 래프팅을 가게 된 것이다.
정한 오빠와 민호 오빠는 나이가 같고 동향이라는 점 때문에 입사 초기부터 가까운 사이였는데, 안타깝게도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도 같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내가 그들이었다면 래프팅이고 뭐고 그냥 불참할 텐데, 다들 무슨 오기인지 무조건 래프팅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난 평소 거절을 잘하는 편도 아니었고, 그것도 선배이자 언니인 예림 언니가 계속 부탁을 하자, 그냥 래프팅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슨 이상한 책임감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가서 치정 분위기 조성을 막아야 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평소 회사 사람들은 나에게 ‘너 같은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나를 여성이 아닌 아이라고 생각해줬다. 이런 내가 있어야 치정의 분위기로 흐르지 않겠다 싶었지만, 엠티, 래프팅 모두 끌리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1박 2일 동안 그렇게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어디를 간다는 것도 싫었고, 심지어 난 생리 기간이 겹쳐서 래프팅을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그래서 최소한 래프팅에서만큼은 당연히 빠질 생각이었다. 가기 전부터 예약 담당하는 오빠에게 난 래프팅 예약하지 않는 것으로 부탁, 또 부탁을 했었다.
엠티 당일. 우리는 점심쯤 숙소에 도착해 이곳저곳 놀러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었다. 나랑은 무관하지만, 래프팅은 4시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있는데,
“현수야, 근데 왜 래프팅 안 해? 물이 무서워?”
“뭐? 현수 래프팅 안 한다고? 왜?”
“진짜로?”
“현수야, 물 무서워?”
“래프팅 예약 다 하지 않았어?”
“뭐라고? 래프팅 안 한다고?”
남자들은 내가 래프팅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어휴...그만해요. 물이 무서운 건 아닌데, 몸이 좀 안 좋고, 래프팅 할 상황이 아니에요.”
조금 더 친했다면 생리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이들에게는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다들 성인이고, 지금까지 여자 친구도 있었을 텐데 대충 눈치챘겠지 싶었다. 적어도, 내 주변 남자 사람들은 저 정도 말하면 대충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고 단념했다.
하지만 이들은 단념하지 않았다.
“컨디션이 왜? 노 젓는 게 힘들까 봐?”
“오빠들이 다 할게! 현수 너는 타 있기만 해.”
"오빠들만 믿어!"
믿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라고...
“고마운데, 제가 물에 빠지고 그럴 상황이 아니에요. 물에 닿으면 안 돼요.”
그때 예림 선배가 입을 떼기 시작했다. 언니는 내가 생리 중인걸 아니까, 든든한 지원군이 되겠지?
“현수야, 그냥 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하자~”
“(이 언니가 미쳤나?) 네? 아니...제가 어떻게 지금 래프팅을 해요...”
답답한 대화가 오고 갔다. 그냥 이 때라도 생리라고 말할까 싶었지만, 난 그때 부끄러움이 많았나 보다.
점심식사 후, 정한 오빠가 조용히 내게 왔다.
“너, 몸 안 좋아?”
“(1:1이니까 얘기해볼까?) 사실 나 지금 생리하거든. 예림 언니 혼자 여자라서 따라온 건데, 나 래프팅 못해.”
“아 생리하는구나. 근데 물만 안 묻으면 되는 거 아니야?”
“래프팅 하면서 물이 안 묻을 수 있어? 난리 나고 물에 빠트리는데?”
“아, 그런 거 때문이었어? 아 난 또 뭐라고. 나만 믿어 그럼!”
“아니야. 안 한다니까? 뭘 믿어?”
“아니야. 오빠만 믿어. 래프팅 하러 가자!”
“제발...”
하지만 정한 오빠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오빠만 믿으라며, 나머지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현수 래프팅 할 거래!”
숙소에서 쉬고 싶었던 난 거의 연행되어 끌려가는 수준으로 래프팅 하는 강까지 왔다.
정한 오빠는 또다시, “오빠만 믿어.”하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저희 래프팅 지도해주시는 강사 분이 누구시죠!!??”
반응이 없자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저희 래프팅 지도해주시는 강사 분이 누구시죠!!!!!!!!!??”
그의 외침을 들은 강사가 다가왔고, 갑자기 정한 오빠는 강사를 조용한 곳에 데리고 가더니 멀리 서봐도 열변을 토하는 듯 뭔가를 설명했다. 중간중간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고, 그것으로 보아 왠지 래프팅 하는 인원 중에 생리하는 애가 있으니 절대 물에 빠트리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냥 제발 래프팅 안 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건가?
그렇게 10분쯤 대기하고, 강사에게 간단한 안전교육, 설명 등을 받았다. 그 도중에 강사는,
“여기 아까 들어보니까 절대 물에 빠지면 안 되는 분 있다고, 그러는데 그분이 누구시죠?”
“얘요! 얘가 절대 빠지면 안 됩니다!”
정한 오빠는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쯤 되자, 왜 예림 언니가 정한 오빠와 헤어졌는지 조금은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정한 오빠의 말을 듣고 나머지 오빠들이 웅성거렸다.
“현수, 몸 괜찮아진 거 아니었어?”, “왜 물에 못 빠지는 거야?”, “수영 못한대?”, “아프대?” 등등...여기까지 온 이상 래프팅을 안 할 수 없었다. 허허벌판에서 동기들이 래프팅을 끝낼 때까지 몇 시간이고 앉아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래프팅을 하기로 결단했다.
“저 죄송한데, 지금 예약도 되어 있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래프팅 하긴 하는데, 저한테 물 뿌리면 진짜 안 돼요. 진짜 오빠들. 여자들은 물을 맞으면 안 되는 날이 있는 겁니다... 알겠죠?”
저 말까지 하자, 오빠들은 이제 뭔가 알겠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작 래프팅이 시작되자, 그들은 이성을 잃었다. 내게 물을 뿌리고, 다른 보트에 물을 뿌리면서 전쟁을 신청하기도 했다. 내 옷은 젖기 시작했고,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남자분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생리를 하는데 이렇게 하면 절대 안 된다. 진짜로...)
이 혼돈 속에서 몇 시간을 더 버텨야 하는지 문득 궁금해졌고,
“선생님, 저희 몇 시간 동안 더 가야 도착해요?”
“음, 한 2시간 더? 어디 불편하세요?”
“2시간이요?”
이 상태로 2시간은 무리였다. 옷이 몸에 젖자 하체에는 불길한 신호가 감지되었다. 더 이상 물에 노출되는 건 안 될 일이었다.
“저기, 잊었나 본데... 저 물 맞으면 안되거든요...제발 부탁해요. 제가 고집부려서 온 것도 아니고, 몸도 안 좋고. 오빠들이 오빠들만 믿으라며. 제발...”
“그래, 현수한테는 물 뿌리지 마!!”
나의 간절한 외침에 내 편을 들어주는 건 정한 오빠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현수야, 이럴 땐 물도 뿌리고 노는 거야!”, “물 뿌리자!”, “다른 보트랑 전쟁이다!”
카오스였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내가 이 오빠들에게 눈치를 기대한 것은 욕심일 수 있겠다. 가만 보니, 오빠들은 여자를 많이 못 만났을 수도 있다. 생리라는 것이 뭔지도 모를 수도 있고, 어쩌면 모태솔로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직접 말해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조금 늦긴 했지만, 이 보트 위에서, 지금이라도 진솔한 대화를 시도해보는 거야!
“오빠들, 내가 하고 싶지 않아서 말 안 했는데, 한 번만 말할게요... 저 생리하고 있어요. 물에 젖으면 안 되거든요... 정말... 조심해줘... 부탁합니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래... 그들이 모태솔로 비슷한 거라면 생리라는 단어조차 들어본 적 없을지도 모른다. 놀랐겠지... 이젠 조심하겠지?
하지만 그들은 조심하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은 생리라는 것은 모른다는 듯이 해맑았다.
“저기... 오빠들... 제가 생리 중이라고 분명히...”
나의 작은 목소리는 그들의 물장구에 묻혀 사라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존댓말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다들 그만해!!!!!! 생리가 뭔지 몰라? 모태솔로야?? 학교 다닐 때 이런 거 안 배웠어? 한 번만 더 말한다. 나 생리해! 생리한다고!! 생리라고!!!!! 물 뿌리지 말라고!!!”
급발진한 나의 외침은 다른 보트에 전해 질 정도로 컸다. 그 이후로 우리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노젓기에만 몰두했다. 더 이상의 물장구, 물 뿌리기 그 어느 것도 없었다. 다른 보트에서도 우리 보트를 피하는 눈치였다. 분위기는 짜게 식었고, 그렇게 래프팅은 마무리되었다.
래프팅이 끝났을 때, 정한 오빠가 내게 다가왔다.
“괜찮아?”
“대체 뭘 믿으라고 그런 거야?”
“너 뒤돌아봐”
“왜?”
“혹시 생리한 거 나왔을 수도 있잖아 봐줄게.”
“뭐야. 왜 이래?”
“뭐? 봐준다니까?”
“내가 진짜 앤 줄 알아!!? 다 큰 여자한테 무슨 헛소리야!!!!”
그때, 다른 동기 오빠들이 다가오더니 내게 사과했다.
“현수야, 고생했어.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힘들었지?”
“아니야. 내가 애초에 솔직하게 말할걸 그랬어.”
“고생했어. 우리 다 같이 온천 갈까? 숙소에 온천이 있거든!”
“온천?”
난 이때 확실히 느꼈다. 생리하는 사람들은 온천에 갈 수 없다. 근데 이 정도로 모른다면... 정말 이 사람들은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모태솔로일 것이다.
“온천 따뜻하니까, 좋지 않을까?”
“아니야. 오빠. 내가 온천을 어떻게 가겠어. 괜찮아 그냥 밥이나 먹자.”
“아니야! 온천 무료로 할 수 있어. 온천하고 와!”
"밥이나 먹자고..."
"아니야! 다른 애들도 온천 다 괜찮대!"
“그만해! 생리하면 온천 못가. 못 간다고! 오빠들은 다 여자 형제도 없는 거야?”
그 말에 당황하던 오빠들. 그렇게 1박 2일 래프팅 일정은 어색하게 끝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빠들이 정말 여자 형제도 없고, 학교에서 생리도 안 배우고, 모태솔로에다가, 눈치도 더럽게 없을 수 있는 건데 내가 너무 화를 낸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다.(하지만 저 오빠들이랑은 다시는 안 놀 거다.)